베리타스

과학을 왜곡하는 성서는 절대적 권위 아니다!(스압주의)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

입력 Jun 03, 2020 07:45 AM KST

지질학자들의 발견에 의하면 약6천만 년 전에 화성만한 크기의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 것이 지구상에 우연적으로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 그 충돌의 우연성은 이 지구상의 생명체들의 환경조건들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지구는 정상 궤도에서 이탈되었고, 기후패턴이 변했으며 생명종들은 대환난을 겪었다. 공룡들이 멸종하고, 지구 표면상에서 양서류 동물들의 지배가 무너졌다. 어떤 종류의 생명체들의 멸종은 또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의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과학이 발견한 이 우연성과 자연성의 자연의 법칙은 종교와 정치와 철학의 기초가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충돌의 우연성이 척추동물이 출현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아무도 그런 대격변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으며, 우주에서 흔하게 일어나듯이 그저 자연적으로 일어났다.

척추동물의 한 종류인 인간은 우연한 충돌의 기회로 탄생한 생물종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인 사실이고 우주의 법칙이다. 그렇다고 인간은 하찮은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인간과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바르게 알면 인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260만 년 전에 등장한 인간 생물종은 끊임없이 진화하여 259만5천 년이 지난 후에 자신의 체험에서 깨달은 하느님의 의미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탄생하기 오래 전에 인간의 정신과 언어와 정보가 있었다. 2천-3천 년 전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 저자들은 조상대대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삶의 지혜를 토대로하여 자신들의 참된 인간성과 온전한 삶의 비전과 방식을 하느님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종교와 경전은 하느님 또는 죽음 후의 내세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인간과 현세적인 삶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현대과학은 종교와 철학과 정치 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과학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 즉 종교와 정치와 철학과 문학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안타깝게도 보수적인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익과 생존의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과학을 부정하는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늘어놓는다. 또한 많은 교회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부인하고, 비상식적이고 몰상식한 초자연적인 기적을 무작정 믿는 것이 훌륭한 믿음이라는 교리에 철저하게 세뇌되었다. 그리고 과학에 무지한 성서를 절대적인 권위로 믿는 망상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바이러스 팬데믹과 같은 지구적인 위기에서는 물론 개인적인 절망에서도 문자적인 성서를 잔뜩 움켜쥐고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꿈꾸고 있다. 성서는 수많은 지혜서들 중에 하나일뿐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왜 성서가 절대적인 권위가 될 수 없으며, 온 인류에게 유일한 경전이 될 수 없는 이유들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솔직하고 용감하게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과 수용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핵심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고 책임이다.

nasa
(Photo : ⓒNASA 홈페이지 갈무리)
▲태양계의 모습.

기독교 성서는 물론 불교와 회교도와 힌두교의 경전들도 현대 과학의 우주진화 세계관에 기초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지 못하면 인류 사회에 설득력있는 경전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육체와 영혼의 분리, 이 세계와 다른 세계의 분리, 현세와 내세의 분리, 천국과 지옥의 분리, 제도적인 종교의 내부인은 깨끗하고 선한 사람이고 외부인은 더러운 죄인이라는 성속의 분리, 그리고 특히 허공을 떠도는 보이지 않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맹신,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에 대한 망상 등등을 부추기는 성서와 경전들은 인류의 밝은 미래에 전혀 도움이 안되며 오히려 위험하고 추악한 장애물이다. 2천년 전 기록된 고대 성서가 138억 년 전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우주의 출현과 진화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현대인들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는 인류에게 필요한 지혜서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성서문자주의와 직역주의에서 찾을 수 없다.

현대기독교인들은 성서 전체가 처음부터 은유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삼층 세계관에서 살았던 성서저자들은 당시의 보편적인 문학형식인 신화와 서사시를 이용하여 성서를 은유적으로 기록했다. 고대 사회에서 지극히 제한적인 어휘로 심층적인 깨달음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은유법이었다. 이렇게 은유적인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더욱이 아무 의심과 질문없이 무작정 암송하는 내세지향적 믿음은 이미 지난 백 여 년 동안 심각하게 설득력을 잃고 설 자리를 상실했다. 오늘 21세기 현대과학 시대의 현대인들은 성서를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서 스스로 은유적으로 읽으려고 한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 기초가 되는 기독교의 원초적인 신학과 신앙은 믿지 못할 것을 억지로 믿는 수동적이고 꼭두각시같은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함은 자율적으로 깨닫는 참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문자주의와 직역주의는 21세기에 참 인간이 되는 길에 걸림돌이 되며, 그 길을 가로 막고 있다.

시들시들 죽어가는 교회 기독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성서를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다시 읽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왜냐하면 성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성서를 이해하고 사는 것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읽기 전에 먼저 성서의 실체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고대 문서들을 언제, 어디에서, 누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기록하였고, 이 문서들이 어떻게 정경(Canon)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성서직역주의자들이 몇 개의 성서구절을 문자적으로 인용하여 저지르는 죄악들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이러한 성서탐구는 한국과 전 세계의 주류 신학교에서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성서비평학이다.

성서는 원초적으로 한 두 사람이 단번에 단행본으로 완성한 책이 아니다. 물론 하늘에서 떨어진 책도 아니며, 하느님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쓴 책도 아니다. 성서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의 성서는 수십만 개의 필사된 사본들 중에 극소수를 의도적으로 짜맟춘 선집(先集)이며, 고대 히브리어(구약성서)와 그리스어(신약성서)로 기록된 최초의 사본들은 다양한 언어들(라틴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 한국어, 등)로 번역되고 또다시 번역되었다. 무엇보다 전세계 교회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어느 사본의 번역판을 정경으로 채택하자고 공식적으로 결정한 적도 없다.

다만 성서는 오랜 세월 동안 그냥 읽혀졌다. 결론적으로, 낡은 삼층 세계관에서 은유적으로 기록된 고대 성서 사본의 번역판을 읽는 21세기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138억 년의 우주진화 역사에 기초한 우주진화 세계관의 새로운 렌즈가 필수적이다. 사실상, 오래된 패러다임의 낡은 렌즈로 성서를 읽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흥미를 잃었을뿐만 아니라, 성서를 습관적이고 관념적으로 읽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일에 식상하고 지쳤으며, 성서에 대한 설득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남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안타깝고 불행하게도 여전히 과거의 낡은 방식이 가장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서를 새롭게 은유적으로 다시 읽고, 21세기의 언어로 전환하는 재해석의 방식이 성경의 진리를 해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생물종들 중에 지능이 가장 높고 영특한 인간은 불편한 진리 또는 우주적인 진리를 모른척 내지는 못본체하는 우둔함이 있다. 다시 말해, 인류는 수 천년 동안 인간 경험의 한계와 지식의 부족함 내지는 무지함을 사심없이 용감하게 극복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종교적 교리와 형식과 전통이라는 틀을 만들고 그 안에 도피했다. 결국은 현세의 인간성을 무시한체 내세의 형이상학적인이고 초자연적인 신성을 하늘 위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자기만족, 자기기만, 또는 자아도취는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이자 죽음의 공포의 부산물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생명을 잘 모르면서 하느님과 죽음 후의 삶과 영생을 확실하게 안다고 주장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거짓과 은폐에 불과하다. 따라서 예수를 따른다는 기독교인들이 역사적 예수의 인간성을 무시하고 예수를 믿는다 말은 큰 모순이며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가 깨달은 하느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인간성을 벌레만도 못한 더러운 죄인으로 하찮게 여기고, 옹졸하고 편협하고 잔인한 하느님을 만들고, 그 하느님에 자신을 얽메고 맹신한다. 지난 2천 년의 인류사에서 이 만들어진 하느님은 전쟁과 테러를 일으키고, 인종차별과 종교차별과 성차별과 빈부차별로 인류사회를 암흑과 절망에 빠트렸다.

호모싸피엔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것과 살아 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경이로운 생물종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왜 나는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등의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우주와 지구와 자연세계에 대해서 탐구하는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생물종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종교의 기능과 의미는 사람들이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들을 자유하게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으면서 삶의 힘과 용기와 희망을 얻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이다. 종교는 자신의 종교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분법적인 교리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종교는 자율적이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기독교 성서와 다른 모든 경전들도 이 틀에서 벗어나면 거짓과 은폐의 회칠한 무덤이 된다.

현대과학에 의하면 2백60만 년 전 지구상에 인간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 즉 40억 년 전 최초의 생명체 세포는 산소를 만들어냈고, 이 산소는 미래의 생명체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산소는 지구의 대기 중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생물체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수십 억 년 동안 단세포 생물체들이 지구 대기권에 산소를 불어 넣어 주어서 지구상의 대기 중에 20% 정도의 산소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 숫자는 증가일로에 있다. 이러한 생명의 기원을 무시한체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근에 NASA의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생명의 기원은 지구가 아니라 외계에서 비롯되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물론 외계에서 만들어진 인간이 지구로 이주했다는 말이 아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과학이 밝히는 사실은 생명의 각 개체는 예측 불가능한 우연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우연한 생명체이다. 우주와 지구의 시작과 생명의 탄생에 대한 과학의 발견은 인간은 미리 계획한대로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다. 즉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인간을 계획적으로 창조해 낸 것도 아니다. 더욱이 생명이 우연적인 것이라고 해서 하느님에게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초자연적, 물질적, 인격적인 신으로 숭상하는 객체적 존재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닫고 살아내는 삶 그 자체이다. 즉 하느님은 삶의 방식이고 표현이다. 현대과학이 공개적으로 계시하는 우주진화와 생물의 진화와 양자 물리학과 천체학을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창조론과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런 비상식적인 발상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약 138억 년 전,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빅뱅으로 출현한 우주 세계와 생명체와 인간은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의해서 미리 설계된 완성품이 아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는 예정되고 계획한대로 운행하는 확실성(Certainty)의 세계가 아니라, 내일을 모르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불확실성(Uncertainty) 속에서 팽창하고 있다. 따라서 불확실성의 우주에서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이루어가려는 지혜는 인간의 본성이다. 역사적 예수는 스스로 참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사는 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의 삶이라고 가르쳤으며, 이것이 성서의 핵심사상이다.

21세기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삼층 세계관에서 기록한 고대 성서를 현대 과학이 발견한 우주진화 세계관에 기초하여 이해해야 한다. 성서는 절대적인 권위가 아니라, 수많은 지혜서들 중에 하나일뿐이다. 성서의 권위와 믿음은 과학을 무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고, 하느님과 믿음체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맹신하는 신자가 되기보다 가장 먼저 자율적인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어야 한다. 성서는 참된 인간의 길을 안내하는 책이기 때문에 성서를 낡고 추악한 성서근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 이 글은 전 지질학자인 최성철 은퇴목사(캐나다연합교회)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외부필자의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피니언

기고

'다양성'과 '다원성'

"왜 보수교회,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여기는 보수교회는 '성정체성'에 관한 이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관용이나 환대의 결핍, 죄와 죄인..

많이 본 기사

우물안 개구리

"한국교회만 남았다." "한국교회가 최후의 보루이다"--이런 선민의식, 우월의식은 1950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가 반공의 최전선이다.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