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사랑의 수고"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Mar 29, 2020 10:11 PM KST

- 시편 126편 데살로니가전서 1:2-7, 누가복음 6:3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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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다섯 주째 각 처소에 흩어져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할 수 있지만, 공적 집회에서 더 엄숙하게 예배할 수 있기에 하루빨리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재개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옛날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거룩한 공간'(예루살렘 성전)에 갈 수가 없어 대신 '거룩한 시간'(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공간을 공유하지 못하면 시간을 공유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누렸습니다. 함께 모이지 못한다고 사라져 버릴 신앙이라면 그게 신앙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국가와 사회의 평안에 협력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흩어져서 그 책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교우들께서는 가능하면 시간을 지켜서 경건하고 바른 자세로 이 예배를 드려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19로 개학이 연기되자 아이를 둔 가정마다 엄마들의 고생이 심합니다. 최근 어느 초등생의 일기입니다. "방학이 길어지자 엄마들이 괴수로 변했다. 그중에서 우리 엄마가 가장 사납다. 그래서 나는 아주 두렵고 무섭다. 그래서 나는 아주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개학 연기로 엄마들은 괴물이 되어 가고 아이들은 '확 찐자'가 되는 중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아니라 살이 '확 찐자' 말입니다. 또 어느 집에 붙은 <코로나 방학 생활 규칙!!>입니다. "1. 주는 대로 먹는다. 2. TV 끄라고 하면 당장 끈다. 3. 사용한 물건 즉시 제자리. 4. 한번 말하면 바로 움직인다. 5. 엄마에게 쓸데없이 말 걸지 않는다. * 위 사항을 어기면 피가 코로나올 것이다." 엄마들이 무슨 죄입니까. '삼식(三食)이'가 된 남편, '육식(六食)이'가 된 아이들 때문에 엄마들 고생이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집에' 있어야 합니다. 보호장구를 다 착용한 미국 간호사들이 들고 있는 피켓 사진을 보았습니다, "I stay at work for you; You stay at home for us!" "당신을 돕기 위해 (밖에서) 일하고 있으니, 우리를 돕기 위해 당신은 집에 있으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나대신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때론 밤을 꼬박 새워 나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집에 있더라도 우울해하지 말고 우리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에' 있어야 할 성서적 근거를 밝혀준 어느 유머입니다. "질문 1: 홍수가 왔을 때 노아와 가족들은 어디에 있었나요? 답: 집에. 질문 2: 세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어디 있었나요? 답: 집에. 질문 3: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어디에 있었나요? 답: 집에. 질문 4: 여호와께서 이집트에 10번째 재앙을 내리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에 있어야 한다고 했나요? 답: 집에. 질문 6: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디에 있어야 하나요? 답: 집에."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23세였던 1665년에 런던에 큰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가 다니던 케임브리지대학도 휴교령을 내렸고, 이후 20개월 동안 학생들은 전염병을 피해 시골 등으로 흩어져 두려움과 고립감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대부분은 학생들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자 권태로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뉴턴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 무료한 시간을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만드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 역시 시골의 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매일 수학책들을 쌓아놓고 씨름했습니다. 날이 좋으면 집 부근 과수원에 앉아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를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왜 사과는 나무에 붙어 있을까, 왜 달은 지구 궤도를 벗어나지 않을까.' 뉴턴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은 타고난 천재성 때문이라고만 말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그 긴 20개월의 지루함을 견뎌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 10:22, 24:13, 마가 13:13)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야고보서 1:12)입니다.

이런 시련의 시간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나태주 시인의 시, <기도>입니다.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번에 우리는 재난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재난은 가난을 차별합니다"(강준만 전북대 교수). 코로나 19가 확산하는 동안 크게 세 차례 집단감염 사례가 있었는데(경북 청도대남병원, 대구 한마음아파트, 구로 콜센터), 이 사례들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가난'이라고 어느 기자는 예리하게 짚었습니다(한겨레 이재훈 기자, "코로나 집단감염, 지금 여기의 책임윤리," 2020.3.16.). 비정규직 노동자, 대리운전 기사, 문화예술인, 아르바이트생, 프리랜서, 돌봄교사 등이 재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택배 노동자는 물량에 치여도 일을 멈출 수 없고, '플랫폼 노동자'는 일거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간병인, 콜센터 직원 등 가장 취약한 이들의 삶이 무너집니다. 코로나 극복의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거리'가 없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분들에게 재난은 가혹합니다. 경제학자들은 이번 코로나 확산에 따른 경제충격이 1997년 외환위기와 2003년 금융위기 때보다 심각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아랫목은 펄펄 끓고 윗목은 차갑게 식은 양극화된 경제구조 안에서 약자들은 더욱 큰 고통을 당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글, <한 번에 한 사람씩>을 읽어봅니다. "나는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입니다. 나는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 껴안을 수 있을 뿐입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할 수 있고 나도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떨어뜨리는 한 방울의 물과 같습니다. 만일 내가 한 방울의 물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지금 교회가 '모이는 교회'로 예배할 것인가, '흩어지는 교회'로 예배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수준의 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저는 흩어져서 예배드리는 내내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고, 또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교회의 현장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십니다(호세아 6:6, 마태 12:7). 우리는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는 추상적입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섬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타이밍이 중요한데, 사회적 접촉이 다 끊어진 사람들에게는 지금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신 것처럼 우리도 오늘 이 땅의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함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마태 25:40)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인가 '군림'인가로 정통(正統)과 사이비(似而非)가 갈립니다. 신천지는 14만 4천 명 안에 들어야 세상을 다스리는 왕처럼 군림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태 20:28, 마가 10:4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군림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사이비는 '겉은 비슷하나 본질이 다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여성 최초로 교회 박사의 칭호를 얻은 스페인 아빌라의 성 테레사(St. Teresa of Avila, 1515-1582)는 영국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c.1420)과 함께 중세 신비주의 사상의 대가(大家)인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 그분께서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밖에는 / 그분께서는 당신의 눈을 통하여 이 세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 당신의 발로 세상을 다니시며 선을 행하고 계십니다. / 당신의 손으로 온 세상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 당신의 손이 그분의 손이며 당신의 발이 그분의 발이며 / 당신의 눈이 그분의 눈이며 당신이 그분의 몸입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성경 말씀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 3:16-18)라고 했습니다. 다가오는 부활절에 우리가 다시 모일 때 부활절 감사헌금은 전액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19 발생 초기에 확진자가 많아 온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한때 확진자 숫자는 부동(不動)의 2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위까지 내려갔습니다. 진단 키트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다른 나라들도 적극적으로 바이러스를 검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지금 서유럽과 미국은 참담한 상황입니다. 미국은 확진자가 1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서울시보다도 인구가 적은 스위스마저 확진자 숫자가 한국을 따돌렸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우리나라의 확진자와 비슷한 숫자가 사망했습니다. 스페인은 사망자가 폭증하여 아이스링크를 임시 영안실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코로나 사태 초기에 한국에 확진자가 많았던 이유는 우리의 우수한 진단능력 덕분이었습니다. 압도적 검사로 신속히 확진자를 찾아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나 '워킹 스루'와 같은 창의적인 방법으로 찾아냈습니다. 양성 반응이 나오면 즉시 격리하고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 무료로 치료해주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강제로 격리돼 검사와 치료를 받더라도 병원비는 개인이 내야 한다고 하는데, 병원에서 2주만 격리되면 입원비로 약 6만 달러, 한화로 약 7천만 원이나 내야 한다고 합니다. 당국의 방역에 우리 국민은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높은 시민의식과 역량으로 회피하지 않고 모두 용감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사재기 같은 건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하자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사재기(panic buying)하는 바람에 마트의 진열대가 텅텅 비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홍콩, 일본, 호주 등 전 세계적으로 생필품 사재기, 특히 휴지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호주의 한 슈퍼마켓에서는 휴지를 두고 칼부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호주의 어느 편의점 휴지 판매대 앞에는 이런 표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휴지 1개에는 3.50달러(한화 약 2,600원), 2개는 99달러(약 7만 3,690원). 욕심을 부리지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주십시오."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감이 고조되자 과거 'LA 폭동'과 같은 사태가 재발할까 봐 아시아계 미국인이 대거 총기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거주 중인 한 프랑스인은 휴지와 식료품이 가득 쌓인 한국 마트 사진을 자신의 SNS에 게시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정말 문명국가다," "우리도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등의 댓글이 달렸다고 합니다.

한국에 사는 한 분의 글입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세상이 시끄러운 가운데 근처 시장에 갔다... 소독액들을 비치해 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후에 시장에 오는 것이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시민이 자발적으로 소독약을 비치해두고 함께... 노력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밝아졌다... 한국은 자국민뿐 아니라 외국인도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있게 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끼리 서로 놀라워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들이 대구와 경북에 의료 봉사를 간다고 자원하는 모습이었다... 어느 날에는 80세가 넘는 할머니께서 마스크를 선물하고 도망을 치듯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행복감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외신들에서는 코로나 통제에 대한 한국의 접근을 칭찬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대응이나 한국인 모두의 태도에서 따뜻한 심성을 보게 되어 외국인 며느리로서 행복감을 느끼고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세계일보, "[한국에 살며] 코로나 19 사태가 보여준 한국의 따뜻함," 2020.3.25.). <네팔한국문화센터> 대표인 먼주구릉 씨의 글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는 크게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세계는 코로나 19를 기준으로 BC(Before Corona), 즉 '코로나 이전'과 AD(After Disease), 즉 '질병 이후'로 나뉜다는 익살스러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 등 저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즈>(Financial Times)에 기고한 글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는 전체주의적 감시체제냐 시민 역량 강화냐의 사이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고립이냐 글로벌 연대냐의 사이에서의 선택이 될 거라며, 한국과 대만과 홍콩을 예로 들면서 인류는 시민적 역량 강화로, 글로벌 연대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UCLA의 옥성득 교수도, "만일 한국이 없었다면 세계는 국가주의 모델로 가면서 자유와 민주, 경제 안정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한국이 팬데믹 시대에 세계 민주주의의 첨병이" 되었으며, 이로써 지난 150년간 주도권을 잡아 온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그를 모방한 일본의 이중적 오리엔탈리즘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과거 서양인들은 일본을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로, 조선은 "우물 안의 은둔국(隱遁國), 잠자는 미개국(未開國)"으로 비하했습니다. 이를 모방한 일본은 야만과 불결의 땅 조선을 자신이 식민지로 만들어 계몽하면 근대화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한 작가는 1898년 도쿄의 긴자 거리와 시궁창에서 돼지가 노는 한양의 불결한 이미지를 대조하며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의 '이중적 오리엔탈리즘'입니다. 하지만 옥성득 교수는 "이제 그런 제국주의 시대 위생 오리엔탈리즘의 시대는 역전"되었으며, "일본이나 서구의 여러 나라가 위생 후진국이 되었지만, 한국은 전염병 방역 체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한동대학의 정진호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 역시 이번 코로나 사태는 "20세기를 통해 서구사회가 지녀온 오리엔탈리즘이 종언을 고하는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합니다. "1세기 전만 해도 조선이라는 이 나라는 서구인들의 눈에 너무나 미개하고 더러워서 자신들이 키워낸 일본이라는 선진문명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인식이 뒤집히고 있습니다. "아직 결코 맘을 놓을 시기는 아니지만, 만약 한국이 중국식 봉쇄와 통제 정책이 아닌 투명한 정보공개과 자율적 민주주의 시스템을 유지한 채 이 사태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면,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지닌 서구 국가들이 한 가닥 희망의 한숨을 내쉬게 될 것"입니다. 정교수는 "전쟁 폐허 속에 일어난 이 작은 나라 코리아가 세계 문명사의 전환을 가져오는 첫 단추를 끼고 있다. BTS와 '기생충' 열풍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직후에 벌어진 코로나 사태가... 오리엔탈리즘에 물들어 살아왔던 유럽과 미국[으로 하여금]... 동양의 작은 나라에 희망의 눈길을 던지"게(경북일보, "[특별기고] 코로나 19와 오리엔탈리즘의 종언," 2020.3.23.) 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쓴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십자가에 달리는 한국'을 보았습니다.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던 그 시절에, 그는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존재인 나는 누구인가"를 고뇌하면서 한국 역사 속에 나타난 절대자의 섭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절대자의 섭리 속에서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세계사의 모든 죄와 짐을 지고 가는 '수난의 여왕'으로서 우리의 역사를 보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이, 한국이 '세계사의 하수구'가 되어 더러운 모든 것들을 기꺼이 모두 받아주고 처리해 줌으로써 인류를 정화하는 십자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그는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불행은 우주의 아픔이요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하지만 민족 반만년의 고난사에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은 이제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한국사 속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등촉(燈燭), 한국이 그 빛을 발휘하는 날 아시아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라고 함석헌 선생은 예언했습니다.

약 3천 년 전 이사야 예언자는 보잘것없는 약소민족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국경 안에 다시 없을 것이며...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이사야 61장, passim). 오래 전의 이 외침을 오늘 우리를 향한 소망의 말씀으로 읽어본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단 한 푼의 대가, 한마디의 칭찬도 바라지 말고 피와 땀과 눈물로 시민을 구하자." <대구시의사회> 호소문의 이 구절을 읽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키운 우리 민족의 심성(心性)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거듭되는 역경과 시련을 사랑과 연대의 힘으로 견딘 우리 국민의 저력(底力)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나라와 이웃을 걱정하는 이 착한 백성의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힘이 바이러스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정신적 면역체계의 근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데살로니가전서 1:2-3). 데살로니가 교회는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환난 가운데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데살로니가전서 1:6-7)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데살로니가전서 2:20)이라고 말합니다.

집에 계시느라고, 아이들을 돌보느라고, 안 해본 원격수업을 하느라고, 벚꽃놀이도 삼가고 '나보다 더 외롭고 나보다 더 추운' 이웃을 섬기느라고 고생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이 '사랑의 수고'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루어가는 이 방역의 기적은 환난 가운데 있는 세계에 본이 될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17)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가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밝히는 하나님의 진리등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린도전서 15:58)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의 교독문처럼,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편 30:10)가 되십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편 30: 5, 1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독일의 신학자 한스 큉의 말처럼, "이해할 수 없고 극복하기 어려운 무의미한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사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고난 중에서 숨어계시며 현존(現存)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견디면서, [우리는] 고난과 싸울 뿐만 아니라 고난 중에 있는 자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무의미한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해답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 유안진 님의 <내 믿음의 부활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지난겨울 / 얼어 죽은 그루터기에도 / 새싹이 돋습니다 // 말라 죽은 가지 끝 / 굳은 티눈에서도 / 분홍 꽃잎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 저 하찮은 풀포기도 / 거듭 살려내시는 하나님 / 죽음도 물리쳐 부활의 증거 되신 예수님 // 깊이 잠든 나의 마음 /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 살아나고 싶습니다 // 당신이 살아나신 / 기적의 동굴 앞에 / 이슬 젖은 풀포기로 / 부활하고 싶습니다 // 그윽한 믿음의 향기 / 풍겨내고 싶습니다 / 해마다 기적의 /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기적의 증거'가 됩시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텅 빈 예배당에서 허공을 향해 외치며 우리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해봅니다. 조금만 더 '사랑의 수고'를 하며 다시 모일 날을 기다립시다. 최일환 님의 시 <시골 교회 가는 길>을 읽으며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다시 이렇게 교회로 모이는 꿈을 꾸어봅니다. "솔밭 사이 언덕길로 / 교회 가는 길 / 주일 학생들은 솔방울처럼 / 뚜그르르 / 잘도 굴러가다가 // 유채꽃 고운 밭둑길에서 / 나비처럼 훨훨 / 날개를 펴네요 / 양쪽 겨드랑이에 / 노랑 날개 달고 / 교회 있는 교회 안길로 / 접어드네요 // 골목마다 퍼져 있는 / 아이들의 찬송 소리 / 유별나게 맑은 / 여선생님의 고운 소리에 / 교회 창문이 열리면 / 우르르 따라 들어간 / 파아란 시골 바람 / 향그런 꽃냄새 // 하늘나라 얘기는 / 교회 안에 재미있게 / 가득 차 있어 / 주일 학생 모두 싣고 / 하늘로 올라간다 / 시골 교회 가는 길은 / 하늘로 가는 길 / 하늘나라 가는 길에 / 시골 아이들 / 모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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