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거룩한 삶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출애굽기 3:1-5, 베드로전서 1:13-16, 요한복음 17:1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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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2019년 기해년(己亥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기(己)는 노랑이고 해(亥)는 돼지이니 노란돼지의 해입니다. 사람들은 황금돼지의 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좋아합니다. 올해 태어나는 아기는 제 먹을 것을 가지고 나온다고 해서 바닥이던 출산율이 그나마 조금 오를 거라고도 합니다. 12년 전도 같은 돼지의 해였는데 그 때는 정해년(丁亥年), 즉 붉은 돼지의 해였습니다. 6백 년 만에 한 번 돌아온다는 돼지의 해라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 때도 너도나도 아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관련업체들의 상술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이런 풍문을 믿고 싶어 하는 걸까요? 돼지면 그냥 돼지지 왜 '황금' 돼지여야 할까요? 사람들은 작년 2018년 무술년(戊戌年)도 '황금' 개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개는 그냥 개지 왜 '황금' 개여야 할까요? 모두가 황금을 욕망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해돋이를 보기 위해 바닷가로 가거나 산에 오르곤 합니다. 대통령께서도 이번에 남산에 올라 해맞이를 하셨더군요. 여러분 중에도 새해 첫 새벽에 산에 오르신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성서에도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산에 오른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의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새로운 소명과 삶의 목적을 부여받는 이야기 말입니다. 호렙산 혹은 시내산이라고 불리는 이 산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성서는 분명히 말하지는 않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산 위에서 세 가지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새 이름이 계시되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어디에 임재하고 현존하시는지 나타났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졌습니다.

먼저 거룩한 하나님의 산 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즉 '야훼'(YHWH)로 처음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야훼]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야훼]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출애굽기 6:2-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엘 샤다이'에서 '야훼'로 처음 알려진 것은 이 산 위에서부터입니다. 후에 이집트의 파라오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는 모세의 요청을 듣고 이렇게 화가 나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여호와[야훼]가 누군데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출애굽기 5:2). '야훼'라는 신이 누군데 감히 태양신인 '레'(Re)와 그의 아들인 자신에게 명령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도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만난 하나님의 이름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집트에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애굽기 3:13)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유명한 출애굽기 3:14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로 번역되어 있는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출애굽기 3:14)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존재하게 하는 이' 혹은 '존재의 근원'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되어 있지만 글자그대로의 뜻은 그냥 '나는 나다' 혹은 '나는 그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사실 답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나는 곧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조각상만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언어나 개념도 신처럼 섬길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부하셨습니다. 이름 주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인간의 개념과 사변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다만 '나는 나다' 곧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야훼,' 즉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모세가 오른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서 드러났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우상을 없애시는 참 신과 주가 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디에 현존하시는지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burning bush)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가장 거룩한 상징입니다. 그런데 떨기나무는 백향목과 같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나무가 아닙니다. 관목 가시나무의 일종입니다. 사막에서 자라는 키가 작고 볼품이 없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나타나셨습니다. 아침에 이글거리며 솟아오르는 장엄한 태양 속에서 말씀하지 않으시고 말라비틀어진 작은 가시나무 덤불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떨기나무는 히브리어로 '스네'(seneh)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사막의 뜨거운 태양열과 달아오르는 지열에 쉽게 자연발화하곤 했습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그런 자연현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타서 없어지지(consumed)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이 나면 타서 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신기하여 모세는 그 떨기나무에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출애굽기 3:7, 9). 그랬습니다. 이 고난 받는 히브리 노예들이 바로 '스네'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살이라는 사막과 같은 삶 속에서 하늘의 태양신이라는 레(Re)와 그의 아들이라는 파라오에 의해 쉽게 불살라 없어지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스네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자 그들은 더 이상 쉽게 불살라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히브리 노예들처럼 이 땅의 모든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스네와 같이 업신여김을 당하는 보잘 것 없는 모든 생명과 함께 하십니다. 모세가 오른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서 나타난 우리의 야훼 하나님은 괴로워서 부르짖는 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알려졌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의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신발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신부터 벗으라고 하셨을까요?

첫째로, 우리가 신고 있는 신발은 '신분의 상징'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걸맞은 신발을 찾아 신고 있습니다. 군인은 두터운 군화를, 달리기 선수는 가벼운 운동화를 신습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신발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굉장히 비싼 신발이 있는가 하면 단 돈 몇 천원을 주고도 살 수 있는 신발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고 있는 신발은 그렇게 우리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신분이라는 허상에 묶여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 안에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고관이던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높은 신분 때문에 남들 몰래 예수님을 찾아갔지만 결국 자신의 신분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의 타협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내세울 것이라고는 전혀 없던 어부나 세리나 창녀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조선 땅에 맨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에도 이 새로운 신앙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은 잡초와 같은 민중들이었고 여성들이었습니다. 조선의 지엄한 양반계급이 복음을 외면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들의 지체 높은 신분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신발은 우리의 '보호의 수단'입니다. 신발을 신지 않으면 우리의 발은 길바닥의 유리조각에 찔리고 돌부리에 부딪혀 멍이 들 것입니다. 모세가 망명생활을 하던 미디안 광야는 뜨겁게 달궈진 모래와 바위로 뒤덮인 황무지였습니다. 맨발로는 도저히 다닐 수 없는 거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두 세 겹 짐승의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자신의 발을 보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신발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먼저 스스로 고안한 보호의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시 61:3)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신발은 우리의 '기호의 표현'입니다. 이제 신발은 신분의 상징과 발의 보호를 넘어 각자의 개성과 기호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신발가게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말로 다 열거할 수 없는 다양한 패션과 색깔의 신발들이 까다로운 입맛의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찾아 신는 우리의 신발은 우리 각자의 개성과 기호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결코 무개성, 무기호의 인간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독특한 개성과 재능을 하나님의 목적에 다시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가 맨발이 되어야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과 개성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섭리에 새로 사용하실 겁니다.

불타는 가시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섰을 때 모세는 그 거룩한 땅을 더럽히고 있는 자신의 신발을 벗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자신의 신발을 벗고 맨발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 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모세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려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산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산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왜 우리를 거기로 부르십니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서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 11:45)라고 말합니다. 특히 레위기가 이 말씀을 강조합니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위기 20:26). 신약성경에도 같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에베소서 1:4) 하셨다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로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것이라 말씀합니다(베드로전서 2:9).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로마서 6:19)고 권면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로마서 12:1)고 강권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린도전서 1:3)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이사야 6:3)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 9:10)고 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산 위로 부르십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우리도]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원하십니다(고린도후서 7:1). "친히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할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십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3).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삶에서 그의 거룩하심을 반영하며 살아야 합니다. 단지 예배에서만이 아니라 온 삶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실에서 거룩함으로써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새해 우리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산에 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올라야 합니다.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야 합니다. 거기서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고통 받는 모든 생명의 아픔에 귀 기울이시며 우리를 거룩한 새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새해 이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9.1.6.)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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