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시론] 실패의 운명을 타고난 태극기집회
박종서 목사(양지평안교회)

입력 Feb 25, 2017 07:25 AM KST

편집자 주] 평택샬롬나비 시국토론회 <최순실 국정농단과 민주주의의 회복>이 2월23일(목) 오후 평택대학교 제2피어선빌딩에서 개최된 가운데, 박종서 양지평안교회 목사가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를 발제했다. 발제문의 전문을 전재한다.

촛불집회의 힘

촛불집회는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시발되었다. 국정농단은 잠시 조작 음모론에 휩싸이기는 했지만 최근 특검이 공개한 통화기록들을 통해 사실이었음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국정이 농락될 수 있는지,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국민의 마음은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恨, 변화를 추구하는 마음,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마음으로 단지 촛불이라는 거대한 분위기에 휩쓸려 박근혜 퇴진 구호를 외쳐왔다. 때문에 촛불집회에서의 각종 구호와 퍼포먼스가 너무 과격한 것은 아닌지, 이 집회가 정말 종북세력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실 박근혜 퇴진이라는 주장에 목숨을 거는 것은 너무 시야가 좁아 보이고 권위에 대한 상처와 도전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그동안 어둠을 밝혀내고 눈치를 보던 공적 기관들과 언론매체들이 제대로 작동케 하는 원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그것이 시민혁명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태극기집회의 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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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
대한문 광장에서의 태극기 집회 광경.

그럼에도 태극기집회의 숫자가 여전히 늘어가고 있고 아직도 그 기세가 등등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들은 거짓정보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은 왜 잘못된 권위에 저항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세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대중들의 불안한 심리 때문이다. 물론 남북 분단의 정치적 상황도 한 몫을 하지만 더 근원적인 이유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내재해 있는 죽음에 대한 실존적 불안 때문이다. 이런 보편적 불안 위에 병리적 불안이 덧칠해진 사람들은 남한 땅의 모든 지하가 땅굴로 되어 있고, 남한의 모든 주요 요직은 이미 빨갱이들이 점거하고 있어 나라가 월남처럼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거짓 뉴스를 듣고 불안에 함몰되고 만다. 이들이 태극기를 선호하는 이유는 태극기라는 기호(sign)가 주는 안전감이 그들의 불안을 완화시키기 때문이다. 태극기는 자연스럽게 구국과 애국, 3.1 운동과 같은 단어들을 연상케 한다. 태극기가 주는 의미들은 확신을 주고 안정감을 준다. 무엇보다 태극기와 태극기집회는 '나라사랑,' '안보'와 '안전'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제시한다. 이들이 촛불집회를 싫어하는 이유는 '촛불'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지시나 기호가 아니고 상징체계여서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자체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불안을 확대 재생산하는 속성을 갖는다. 불안이 팽창되면서 결국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박근혜 대통령 외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이 때 일어나는 '이상화'는 과대포장되어 '이상화 대상'이 무슨 거짓말을 해도 이미 다 믿을 준비를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대상에게 맹종하고 순종하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상화는 이상화 대상의 어떤 결점이나 부도덕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다. 심지어 미화되어 환각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병리적 이상화'를 '병리적 권위주의'가 받아먹고 함께 공생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이유는, 수구 보수 기독교의 잘못된 성경관에서 태극기집회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알다시피 태극기집회의 거의 모든 리더들은 기독교 목사들이다. 성경은 마치 우주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집약적이고 상징적이고 다층적이다. 서구의 거의 모든 유명대학과 인문학의 시초는 사실 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더 잘 해석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지고 시작되었다. 성경은 문맥과 함께 통시적인 안목으로도 해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월적이고 역사성을 배제한 단면적 시각으로만 해석되어질 때 성경은 해석하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게 된다. 무엇보다 성경에는 번성하고 정복하며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남성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내어주며 소외된 자를 살피고 공감할 수 있는 섬세한 여성성이 있다. 오직 정복하고 '돌격 앞으로!' 라는 남성성의 구호는 반지성적이며 관계적이지 못하다. 이렇게 분화되지 못한 정신, 곧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잃은 정신은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며 유치한 것에 눈물을 흘리는 유아상태에 머물게 된다. 성경만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는 전능적이고 경직된 생각은 이들의 지적능력과 사고를 마비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선과 악, 사단과 하나님에 대한 마니교적인 이원론 역시 대중들의 불안과 연합될 때 그들로 유아에 머물게 하며 두려움 속에 살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태극기집회에 열광하고 반공과 안보에 휘둘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촛불집회라고 왜 안보가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세 번째 이유는,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안간 힘을 쓰며 무너진 둑을 보수하려는 노력 때문이다. 이 운동에 합세한 우파의 논객들은 모든 문명의 이기, 문화와 예술 그리고 감각적 이미지들을 사용해 왜곡과 선동, 부분확대, 과대포장 등의 기법을 동원한다. 그들을 이러한 기법들로 거짓뉴스를 만들어 내고 불안에 떨고 있는 대중들에게 안보와 반공이데올로기로 더 많은 불안과 공포를 주입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태극기집회의 기초가 '반공이데올로기'와 '안보'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더 깊이 살펴보면 이러한 반공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의 '익명의 이데올로기'를 감추기 위한 방어막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위장을 위해 태극기의 대극을 공산주의로 놓고 다시 촛불을 인공기로 치환시켜 버린다. 불안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이렇게 이용된다. 불안은 사실 생각하게 하는 동력이고 '변형'과 '변화'를 향한 매개가 될 수 있음에도 이들은 불안한 대중들에게 더 큰 불안을 주입함으로써 자신들의 음모를 해독하지 못하게 하며 자신의 입지를 지켜내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촛불은 열린 체계다. 촛불은 기호가 아니라 상징(symbol)이다. 촛불집회는 '이쪽이 길이야!'라는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여기는 길이 아니야,' 그리고 '이건 아니야!'라는 부정의 방법, 곧 '감시의 역할'을 한다. 태극기 입장에서 보면 촛불집회는 "목표가 저긴데, 더 잘 살 수 있는 길과 목표가 보이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왜 여기서 멈추고 추락하려고 하지?"가 된다. 태극기집회는 이렇게 촛불집회에 대한 반동(reaction)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촛불의 저항정신은 부조리와 비민주의적 행태에 대한 것이다. 촛불집회는 언제든지 민주주의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그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태극기집회는 불안을 신진대사하는 정신기관의 고장을 말하고 있지만 촛불집회는 불안을 견디며 소화해 내려는, 더 성숙을 지향하는 몸부림이다. 태극기집회는 자신들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유아적 나르시시즘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다. 촛불집회는 성장통에 대한 갈등이다. 태극기집회의 핵심감정은 두려움이고 촛불집회의 핵심감정을 성숙에 대한 고통이다.

촛불집회나 태극기집회 그 모두의 동력이 자가생산적이지는 않다. 때문에 둘 모두 다른 세력에 이용될 가능성은 다분하다. 촛불집회는 외양적으로는 좌파이데올로기와 왠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 이용당하기 쉬울 듯하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고 해석되는 순간 촛불의 의미는 달아나 버린다. 열린 체계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는 다른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할 수 없는 구조를 이미 가지고 있다. 촛불자체가 상징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는 촛불의 발단이 최순실 국정농단이었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사실을 통찰한다. 촛불은 순진하고 무력한 리더 밑에서 함께 직무를 유기하고 국정을 농단한 전문 지식인들도 겨냥한다. 그렇다고 여기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촛불이 상징하는 모든 민주주의적 가치와 헌법 정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과 사랑 등, 그 모든 의미를 포함한다. 태극기집회의 발단은 촛불집회에 대한 반동이기는 하지만 더 깊은 원인은 누군가의 아바타의 역할을 위해 태동된 것이다.

나가며

촛불집회는 이제 변화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통찰한다. 결과에 관계없이 촛불집회는 그 기능을 충실히 행해 왔고 역사적인 사건으로도 남게 될 것이다. 이제 태극기집회가 촛불집회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태극기집회는 촛불집회가 없어지는 순간 그 동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태극기집회는 이미 실패의 운명을 타고 났다. 교회와 교회의 리더들은, 왜 하나님은 목회자들이 이끌고 있는 태극기집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의 촛불집회를 통해서 일하고 계신지 점검해야 한다. 촛불의 소망, 더 좋은 세상을 염원하는 그 촛불의 빛이 새로운 세상을 조금씩 열어갈 것이다.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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