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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선] 파우스트의 "아름다운 순간"과 하나님의 아들들

입력 Jan 21, 2017 08:23 AM KST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스
(Photo : ⓒ Pixabay.com)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욕망의 극단을 추구하라고 유혹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에 보면, 파우스트가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와 맺은 계약의 조건이 나온다. 인간의 한계를 넘고 싶어 하던 파우스트에게 악마가 다가와서 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신에 요구한 조건은, 만일 그가 "아름다운 순간이여, 떠나지 마라!"라고 말하게 되면 그의 영혼이 악마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그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에 "아름다운 순간이여, 떠나지 마라!"고 외치게 되어 있으니, 파우스트는 욕망을 좇는 인생의 전형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 전형이란, 인간이 그 "아름다운 순간"을 고정시키고자 하는 그 순간 그의 영혼이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적 모순을 인간의 실존적 굴레라고들 일컫기도 한다.

파우스트가 충족시키고자 했던 욕망을 굳이 범주화해보자면, 물질적, 권력적, 영적 욕망으로 명명할 수 있다. 이 범주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던(누가복음4:1-13) 욕망에 근거한 것인데 이 세 범주의 욕망은 인간에게는 거의 본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파우스트는 전설 속의 미녀 헬렌과 결혼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정치적 권력을 누리다가 이상국가 건설의 꿈을 실현하는 자리에 가서 그 순간을 고정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다. 이런 줄거리는 인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도 파우스트적 결말을 겪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물질적, 권력적, 영적 욕망을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을]"(열왕기상3:12) 만큼 누렸다. 그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뒤 거리낌 없이 즐겼던 지혜와 재산과 명예의 복은 보통사람에게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경지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육체적으로 죽기 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죽어버렸다. 그가 만년에 산당에서 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경고도 두 번씩이나 무시했던 것은 그가 "아름다운 순간이여, 떠나지 마라!"고 외쳤던 결과이다.

작금의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을 볼 때, 그 "아름다운 순간"을 붙들고자 한 것이 분명한 정치인, 관료, 교수, 기업가, 의사, 법조인들이 있다.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오고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린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에 몰입한 결과 그들의 사회적, 혹은 영적 죽음을 재촉했다. 한국교회에도 "아름다운 순간이여, 떠나지 마라!"고 외쳤을 것이 분명한 목회자들이 여럿 있다. 목회자들의 추락은 상대적으로 더 추악하며 사회와 교회에 더 큰 파장을 끼쳤다. 그리고 대형교회도 하나의 인격체로 볼 때, 쓸 데가 없어서 모이게 된 헌금이 형성한 거대한 재정과, 권력을 구가하는 사회 고위층 성도들의 인맥과, 각종 영적 프로그램을 이수한 경력으로 포장된 영적 능력 등 세 가지 범주의 욕망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영적 능력도 결국 물질적, 권력적 욕망을 실현하는데 이용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대형교회들도 "아름다운 순간"을 고정하고자 시도한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하게 누리고 싶은 이 인간적 욕망이 죽음을 부르는 조건이라니, 이런 부조리가 있는가? 문제의 핵심은 파우스트적인 욕망이 육체의 소욕에 해당한다는 사실에 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8:13-14). 예수께서는 이러한 욕망의 유혹에 대처하는 법을 친히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늘 묵상하며 실천해야 한다; 일상의 모든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영적 능력이나 훈련의 결실은 명예를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중보하며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서 증명된다. 물론,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광야의 상태에 있을 때 실행될 수 있다. 누구든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지만, 이 광야의 상태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끌려가던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원해준 그레트헨의 손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나 인간적 조건을 돌아보면 광야의 상태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며 욕망에 대처하라는 말이 너무 이상적이거나 모호하게 들린다. 이에, 감히 3가지 "기"를 추천해 본다. 우선,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동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세상적인 안목에 충실하게 되면 세상이 주는 달콤한 독약을 거절할 동기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감수해야 할 불이익을 감당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구애받지 않고 누릴 수 있는 부나 권력이나 명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제해야 하는 동기가 분명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당하는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을 용기이다. 세 번째는 내부의 적인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유혹을 극복하려는 "오기"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적은 자신이라는 유명한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오기가 필요하다. 이 동기, 용기, 오기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름다운 순간"을 고정하려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답게 인생의 매 순간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동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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