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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경술국치 단상

역사는 불가역적으로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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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지유석 기자))
▲30일(수) 서울 종로구 율곡로 주한일본대사관에서 제12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열린 가운데 시민들이 대사관 앞 평화비 앞에서 철거불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910년 8월29일. 역사는 이 날을 경술국치라고 기록한다. 당시는 경술년이었고, 말 그대로 경술년에 나라가 치욕을 당했다는 의미다. 그로부터 106년 하고도 이틀이 지난 2016년 8월31일, 이 나라는 또 한 번의 치욕을 당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날 10억 엔의 돈을 한국에 보냈고, 한국은 이 돈이 도착했음을 1일 확인했다. 기술적인 조치 때문에 입금확인에 하루의 시간이 걸렸다는 후문이다. 이 모든 일들은 ‘12.28한일 위안부 합의'의 세부 이행 지침에 따른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일본이 무모한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저지른 범죄에 대한 보상이 10억 엔으로 완결될 수 있는가?

전쟁의 와중엔 반인도적인 범죄가 횡행한다. 그럼에도 피식민지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전쟁 중인 병사의 성욕을 채우는데 동원한 사례는 사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제사회가 위안부에 경악하는 이유도 죄질이 더 없이 파렴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위안부의 강제 동원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위안부를 비롯한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 저지른 죄악에 대해 한사코 사과를 거부하는 자세로 일관해 왔다. 더구나 지금 일본 아베 내각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의 지위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돈의 성격도 문제다. 10억 엔이란 돈이 배상금일까? 아니면 다른 명목의 돈일까? 이 점은 중요하다. 배상금이라면 일본이 과거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한일 양국의 입장은 미묘하게 엇갈린다.

복수의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 돈의 성격을 ‘치유금'이라고 본다. 일본 정부는 줄곧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 모든 정황에 비추어본다면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10억 엔을 내놓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구체적인 자료 공개를 꺼린다. 외교부는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침해할 우려'를 거부사유로 들었다. 도무지 이해 불가다. 10억 엔의 성격을 공개하면 국익이 어떻게 침해당한다는 말인가?

위안부 합의와 한일국교정상화, 역사는 반복되는가?

이 모른 논란에도 아랑곳없이 10억 엔이란 돈은 한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한일 양국 정부가 간과하는 지점이 있다. 10억 엔 아니라 100억, 1000억 엔을 들여도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를 ‘불가역적'으로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12.28위안부 합의는 과거를 바로 세우는데 실패한 한일 양국 정부가 저지른 또 하나의 중대한 외교 실책이었다. 그런데 비단 책임 소재가 한일 양국에만 있지 않다. 막후에서 압력을 가한 미국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로의 회귀를 기치로 내걸었다. 이 같은 전략목표를 달성하려면 한일 양국의 협력이 필수다. 그런데 한일 양국이 과거사로 껄끄러우니 미국으로서도 부담이고, 그래서 한일 양국을 끌어 앉히다시피 협상 테이블로 불러 낸 것이다.

이런 광경은 낯설지 않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도 그랬으니 말이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에게 우려를 금치 못했다. 바로 이때 이승만 정권 시절 군사고문관을 지낸 하우스먼이 직접 나서 케네디 행정부의 우려를 잠재웠다.

이에 케네디 대통령은 1945년 이후 숙원이었던 전략목표를 관철시키기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 숙원이란 바로 한일 국교정상화였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 기억을 내세우며 일본과의 국교 회복에 완강히 저항했다. 박정희의 등장으로 사정은 달라졌다. 마침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역시 경제개발을 위해 일본의 자금을 필요로 했다. 결국 미국은 박정희의 취약점을 적극 파고들어 전략 목표를 관철시켰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은 희석됐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2.28위안부 합의는 여러모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때와 닮은꼴이다.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미일중러 등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민감한 지역이고, 한국 외교가 미국과 일본의 입김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같은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도, 한국 정부가 나름의 역량을 발휘했다면 미-일의 이해관계에 끌려 다니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결국 한국 정부의 무능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에 떠안게 됐다. 더구나 피해할머니들은 일본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와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경술국치일인 8월29일(월) 피해할머니 12명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각 1억원 씩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정부에 위안부 피해 구제를 포기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를 할머니들이 또 하나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게 됐으니 이분들에게 참으로 송구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이 정부는 부끄러운 줄 모른다. 위안부 합의의 당사자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KBS일요진단'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난 20년 동안을 회고해보면 박근혜 정부처럼 많은 시간과 노력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할애한 정부는 없다"고 자화자찬 했으니 말이다.

나라가 힘이 약하면 외세에게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라를 책임지는 위정자들이 슬기를 발휘하면 외세의 입김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정부의 무능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 또 다시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유석 luke.wycliff@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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