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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23 "이름 없음의 자비와 횡포"

정재현의 신앙성찰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2.3. 포괄주의(9) 라너: '익명의 그리스도교'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교는 이제 다른 종교인들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교의 필요성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다. 따라서 선교의 수행은 익명의 그리스도교와 조화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적인 근거에서 이와 같은 선교의 수행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일종의 복음적 사명의 잠재적인 청취자로서 전제하기 때문이다. (라너, 118)

물론, 선교가 단순히 이름을 붙여준다든가 개명을 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야 당연히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익명의 그리스도인에게 선교를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복음의 말씀은 그 말씀이 들려지기 위하여 은총을 필요로 하며, 또 복음의 말씀은 사람들이 객관적이며 반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일종의 은총의 화육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은총은 믿음의 설교 가운데에서 이해될 수 있도록 객관화되며 또한 전자는 이러한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선행한다. (라너, 122)

바로 이 구절에서 라너는 익명성과 선교수행 사이, 또는 은총과 신앙 사이에서 그 순서와 연결을 아주 명약관화하게 선언합니다. 익명적일지언정 은총이 이미 들이닥쳤습니다. 아니 은총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아닙니다. 무조건이고 그래서 선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무조건적 선행은총은 이제 화육해야 합니다. 역사로, 현실로,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수행되며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행은총이 신앙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바로 신앙에서 화육하는 것이니 선행은총의 화육을 위해 선교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라너는 은총의 온전한 실현과 성취가 오히려 선교를 통해서야만 가능한 것이니 이미 은총이 화육의 필수성을 지니기 때문이라고 갈파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은 하나의 성육신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며, 또 그것 자체는 인간 실존의 모든 차원에서, 즉, 인간 실존의 역사와 공동체 속에서 구현되고 표현된다. (라너, 124)

이제 라너는 선교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와 같은 특정종교의 세계적인 보편화, 또는, 보다 원색적으로 표현하여 세력 확보라는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이 인간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그리고 그 역사의 차원을 아우르는 화육적인 역동성을 성취하는 과제라고 밝힙니다. 과연 익명성의 형식을 불사하고서라도 인간 실존의 개별적 차원뿐 아니라 인류사회와 역사를 전 범위로 아우르는 하느님의 은총을 이토록 광범위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새겨준 통찰이 그리스도교와 신학사에서 일찍이 언제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감격적인 선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다음과 같은 부언은 우리의 이러한 해석을 더욱 단호하게 지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까지 익명의 그리스도교에 속한 것이 선교의 설교를 통하여 반성적으로 이룩하게 되는 자기귀속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과격한 변명이며 또 한편으로는 보다 큰 기회를 의미한다. ... 따라서 지금 익명의 그리스도인보다는 명시적인 그리스도교에게 구원의 기회가 더욱 크기는 하지만 으뜸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서 선교의 열의가 식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라너, 126)

라너는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앞선 진술은 익명성이 선교를 통해 화육하고 가시화되는 것이 '변명'이면서 '기회'라는 양면성을 지닌다는 예리한 분석을 내어놓았습니다. '변명'인 것은 그리스도교라는 특정종교에 속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통한 정당화를 가리킨다면, '보다 큰 기회'는 다음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구원에 관한 비교판단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으뜸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해서'라는 말이 내포하는 바와 같이, 그리고 앞서 선교가 펼쳐져야 할 차원에 대한 선언에서와 같이, 화육적인 성취가 세계의 역사를 통해서 더욱 진전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라너도 특정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성육신에서 절정에 이르는 은총의 화육이니만큼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해 점차로 더욱 참되게 이루어져가야 한다는 시대의 통찰을 이전의 포괄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바로 앞서 살폈던 트뢸취가 말하는 '생성 중인 그리스도교'와도 같은 맥락에서 역사의 거대한 운행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경륜이 익명적 은총과 선교적 화육으로 엮어져 가야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본 라너의 논의를 하나의 명제로 추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단 핵심어를 고르면 '은총,' '익명,' '선교,' '가시화'입니다. 이를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보면, '은총에 의한 익명성은 선교를 통한 가시화를 요청한다'라고 추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이 포괄주의가 지니는 요소들에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은총에 의한 익명성은 선교를 통한 가시화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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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 주관 대상화

은총은 인간의 어떠한 조건에도 지배되지 않는 무조건적인 것이어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이름 붙이기에도 앞선다는 뜻에서 익명적이라면, 익명성은 인간이 그토록 무조건적인 은총을 아직 경험하기 이전에라도 이미 앞서 깔려져 있고 들이닥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선험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알려주는 선교는 원초적 보편성에 역사적 구체성을 부여하는 주관적인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러한 구체화가 가리키는 것처럼 경험 가능한 것으로 드러내는 가시화는 선교의 대상에서, 그리고 대상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라너의 주장을 위와 같이 정리하면서 포괄주의의 요소들을 입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배타주의가 되어버린 복음주의가 특수성에서 출발하여 보편성을 향해 간다면, 포괄주의는 보편성에서 출발하여 특수성으로 가는 논리구조를 가진다는 점입니다. 이미 배타주의가 밖을 쳐내는 입장이고 포괄주의가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니 논리구조가 대칭적이기는 하지만, 이를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배타주의에서는 나사렛 예수라는 시공간의 특수성에서 시작하여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라는 보편성으로 나아가니 이 특수성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들은 보편성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포괄주의에서는 모든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의지인 은총이 어떤 구체적인 이름을 갖지 않더라도 이미 깔려있다는 보편성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주는 특수성으로 가는 구조를 지니니 시작 단계에서 보편성을 공유하는 많은 것들이 이제 이름을 붙여가는 과정 안에 단계적으로나마 포함될 수 있다는 분석인 것입니다. 굳이 견준다면, 다름을 배제하는 것과 다름을 포함하는 것 사이의 논리적 대비와 역사적 대조를 이렇게 추려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추리건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구호는 다름을 배제하는 배타주의적 태도가 야기할 수밖에 없는 갈등과 충돌의 문제를 상당히 해소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주장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익명성이 하느님의 은총을 널리 모든 인류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선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은 분명히 익명이 지닌 '자비'입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익명성은 이제 구체적으로 화육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이름 붙이기는 불가피하며 결국 다른 사람에게 내 이름을 붙이겠다는 선교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횡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포괄주의는 결국 포함이라는 그럴듯한 구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월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고 나아가 배타주의의 변형이 아닌가하는 혐의를 받기도 합니다. 아니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의 이름 붙이기를 허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결국 부득이하게 갈등의 가능성을 지닙니다.

마무리한다면, 종교 간 관계유형에서 배타주의와 다원주의가 양쪽 끝에 있다면 포괄주의는 그 중간선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배타주의에서 볼 때 포괄주의는 다원주의로 간주되고, 다원주의 입장에서 보면 포괄주의는 배타주의로 읽힙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포괄주의는 그 위상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20세기 중엽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제안한 이후 이 통찰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설사 트륄취나 라너의 세부적인 논의들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배타주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는 많은 상식인들은 다른 종교들의 의미를 통째로 부정하는 폭력의 문제를 직시하고 나아가 평화공존을 위한 모색의 시도로서 이러한 포괄주의적 입장을 수용하는 범위가 상당히 넓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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