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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통일] 15 북한의 종교정책은 어떻게 변화되어 왔나?

정지웅 (ACTS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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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정지웅 교수(ACTS대)

북한의 종교정책은 대내 정치적 목적과 대남 및 대외 전략의 필요성에 따라 직접적인 구속을 받아왔다. 김일성은 정권수립 초기에 이념투쟁과 체제건설을 위해 종교를 반혁명적 요소로 간주하고 제거하려는 의도를 갖고는 있었으나, 자신의 정권을 공고화하고 반제반봉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필요와 이용가치를 우선하여 선별적인 종교정책을 추진하였다. 김일성은 당시 북한 사회에서 개신교를 비롯한 종교 세력이 아직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는 종교인들의 연합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있기도 했다.

1947년 결성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일제 식민지 잔재와 봉건적 질서 타파를 위해 토지개혁을 비롯한 혁신적인 반봉건적 사회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지지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이러한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동조세력이 필요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당시 중요한 사회세력의 하나였던 종교계의 지지는 필수적이었다. 이에 따라 김일성 정권에 대해 호의적인 종교세력은 이용하고, 비판적인 종교세력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가운데 공산주의정권은 1948년 9월 9일에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헌법에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문화했다. 그러나 이는 선전 문구에 불과했으며, 실상은 반종교정책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북한당국은 종교를 반동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인민정권의 정치적 입장에 동조하는 종교인들은 통일전선 차원에서 만들어진 종교단체들에 가입하였고, 박해를 받는 종교인들은 대거 월남을 결행하였다. 심지어 1950년에 북한 형법에 "종교단체에 기부를 강요하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종교행위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더욱이 6․25전쟁의 참상으로 북한주민들 사이에서는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환치되는 경향이 일반화되었다. 이는 북한사회에서 종교 자체의 존립 근거 상실로 이어지고 만다. 엄청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은 북한주민의 반미감정은 전후에 그 자체로 반종교 선전기능을 훌륭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활용, 김일성 정권은 기독교에 대해 6․25전쟁 때 '철천지 원쑤' 미군을 위해 일하는 등 미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탄압 및 말살을 자행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여타 종교에 대해서도 사회주의 혁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철저히 탄압했다. 그 결과 1950년대 중반 경에는 모든 종교단체와 종교의식이 사라지거나 지하화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1958년에는 노동당이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의 일환으로 사상검토사업을 벌였고, 1959년에는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해야 하는가>라는 반종교지침서를 내놓고 노골적으로 종교를 말살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 전역에 걸쳐 모든 종교 활동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 같은 북한사회의 무종교 현상은 196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북한은 1970년대 접어들어 한반도 주변에서 데탕트 기류가 고조되고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전략적 필요에 따라, 즉, 대남 통일전선 구축의 필요성에 따라 조선기독교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등 종교단체들을 부활시켜 이들을 대남 평화선전 또는 국제사회에서의 친북 지지세력의 규합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종교가 북한사회 내부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힘과 요소를 모두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북한 당국은 종교를 상황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필요한 모양새대로 활용하며, 이를 체제에 적용시켜 나가는 행태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한 당국은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1972년 개정 헌법에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동시에 명기하는 형태로 북한사회에도 마치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러나 대내적 차원에서는 '반종교 선전의 자유'가 여전히 종교의 자유를 부정하는 법적인 근거로 작용했다. 이때부터 북한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대외적으로 위장하면서 국제적인 기독교기구, 즉 세계기독교협의회(WCC), 아세아기독교평화회의(ACPC), 세계기독교평화회의(WCPC) 등과 접촉을 시도하며 우회적인 방법으로 남한의 기독교계에 통일전선을 구축하고자 집요하게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소련 및 동구권의 개혁개방 노력 등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부 종교활동 규제완화를 시도하는 등, 보다 유화적인 종교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1981년부터 해외기독교지도자들의 방북이 가시화되었으며, 정례적인 모임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의 대화"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1983년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신약성서와 찬송가를 발행한 데 이어 1984년에는 구약성서를 발간했다. 1986년에는 조선불교도연맹이 제15차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기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매도한 기존의 정책을 어느 정도 완화하여 기독교의 긍정적인 측면도 드러내는 전향적인 자세를 나타낸다. 기독교는 원래부터 '인민의 아편'이었던 것이 아니라, 발전과정에서 특정시기에 인민을 착취하고 지배계급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은 종교를 무조건 비판하던 입장을 완화시키며, 때로는 합작과 연합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가운데 남한 종교인들의 방북은 물론, 봉수교회와 장충성당 등 종교시설의 건립을 허용하는 등, 비록 통일전선 차원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전에 비해서는 진전된 종교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또한 제한된 소수의 '신자들'만의 참가이기는 하였지만, 공인된 교회와 성당, 그리고 사찰에서 공식적인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예컨대, 1988년 5월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주관으로 묘향산 보현사에서 처음으로 석가탄신일 기념법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매년 석탄절, 열반절, 성도절 등 주요 절기의 기념법회를 공개적으로 개최하기 시작한 것은 그 좋은 예에 속한다.

1989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산하에 종교학과, 즉, 불교,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 이슬람교 등 5개 학과 -지금은 정교회학과도 설치되어 있다- 를 개설했고, 양강도 삼수군 중흥사에는 승려교육기관인 불교학원을 설치하는 등, 국가 차원에서 종교지도자 양성체제를 마련하였다. 같은 해 남한 및 국제 종교단체들과의 교류를 위해 조선종교인협의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조선종교인협의회는 남북대화 및 통일논의 등 대남선전과 국제적 연대성 강화를 위한 창구역할을 담당할 목적으로 1989년 5월 30일 창설되었다. 주 임무는 한국내 각계각층 인사 및 해외교포들과의 접촉, 교류를 통해 반정부 통일투쟁을 선동하는 것이지만, 식량난이 심화되면서 대북지원을 유도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결국 이 협의회는 종교활동을 지원하고 활성화를 꾀하는 일보다는 비종교적인 목적의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셈이다. 결성 당시 위원장은 천도교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덕신이 선출되었다. 부위원장에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 강영섭, 조선불교도연맹 위원장 박태호, 조선카톨릭교협회 위원장 장재언 등이 각각 선출되었다. 그러나 1989년 11월 최덕신이 사망한 이후 천도교 중앙지도위원장인 정신혁이 위원장을 맡았다가 그가 사망하자 장재언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 소련 및 동구권 사회주의체제 붕괴의 여파로 위기를 느낀 북한 당국은 종교에 대해 한결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체제방어적 차원에서 종교교류에 따른 외부 사조의 유입을 철저히 차단하는 한편, 종교단체를 통한 통일전선 구축 노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우선 북한은 1992년 4월 사회주의헌법을 개정하면서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 사회 질서를 해치는 데 리용할 수 없다"(제68조)고 명시했다. 그런데 이 조항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전 헌법의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삭제한 대신, 신앙의 자유를 종교건물 축조와 종교의식 거행이라는 일정 범위로 제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 사회 질서를 해치는 데 리용할 수 없다"고 규정했는데, 이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 남한 내 통일운동가와 재외동포들과의 통일운동을 고려하면서도 북한체제에 미치는 후유증을 염두에 둔 조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다분히 추상적인 데다 당국의 자의적인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해 여전히 종교탄압을 합법화하는 구실이 된 것도 사실이다.

1995년에는 남한 및 서방 각국의 종교단체들과 더욱 빈번한 접촉을 시도했는데, 이는 홍수 등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로 심각한 식량난을 겪게 되면서 인도적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1998년 9월 5일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에서는 헌법 제68조를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 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 수 없다"라고 개정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92년 개정 헌법의 같은 조항에서 '누구든지'를 삭제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후반에는 극심한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남한 종교단체들의 지원을 적극 유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남한 종교인들의 방북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 결과 채택된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에는 남한의 대표적인 7대 종단이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단체인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와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와 함께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를 구성하여 남북한 민간교류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대북지원 활성화를 통한 인적, 물적 교류협력을 증진시켜나가는 방식으로 북한 당국의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정지웅·오일환·신효숙, "주체사상, 김일성․김정일 어록, 북한의 학교문화 및 교과서 분석," 기독교 북한선교회 제9회 학술세미나 [2007년 6월 15일], 8-10).

오늘날 북한의 종교정책은 기본적으로 체제 보위 문제로 인해 다분히 방어적 차원의 통일전선 구축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아직도 북한의 종교는 체제종교로 기능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부에 부분적이나마 종교시설이 들어서고, 간혹 종교의식이 거행될 수 있을 정도로 북한의 종교정책이 다소나마 변화하게 된 것은 남북한 간의 종교교류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지난 2016년 2월28-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가 중국 심양에서 북한의 조그련 관계자와 만난 것에 대해 통일부는 과태료를 부과하였다. 통일부에 북한주민접촉의사를 밝혔지만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심각한 정치군사적 대립이 종교 본연의 평화 활동까지 제약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평화를 위한 기도가 끝나도 또 다시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길 희망한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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