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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20 "여전한 하나의 폭력"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Mar 10, 2016 07:39 AM KST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2.2. 포괄주의(6): 트뢸취

트뢸취는 '주변일대에서 최고의 타당성은 그리스도교에 귀속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타당함의 기준은 어디에서 주어지는가요? 그리스도교의 타당성은 그리스도교로부터 나옵니다. 트뢸취도 이를 인정합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우리와 함께 성장했으며 우리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98). 여기서 트뢸취는 본인이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가치는 우리에게만 타당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용모이며, 우리가 우리의 위치에서, 우리를 속박하고 우리를 구원하며 우리를 위해 절대적인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감지하기도 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인지하기 때문이다.(98)

"우리에게만," "우리를 향하신," "우리의 위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등의 표현에 주목합시다. 여기서 트뢸취가 말하는 '우리'는 그리스도교 문화권에 속한 유럽인들입니다. 왜 이런 표현을 계속 쓸까요?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지배하려던 배타주의와는 달리 이제 포괄주의에서는 타자가 분명한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태도가 가리키는 것처럼 자기-타자의 관계가 비록 불균형적일지언정 설정되기 시작합니다. 배타주의에서 자기의 일방성만 구가되던 것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트뢸취의 사상적 배경은 18-19세기의 유럽이라는 점을 염두에 둡시다. 이 때 유럽의 지적 풍토는 유럽중심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입니다. 트륄취도 역시 시대의 아들이고 역사의 산물이며 풍토의 한계를 싸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수정된 포괄주의조차도 다른 입장에서는 다양하게 비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타당성을 그리스도교 신자로 국한시킨 것이 보기 나름으로 정반대의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의 입장에서는 "우리에게만"이라는 말이 거슬릴 것입니다. 복음주의는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도"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편성은 잠재되어 있으므로 선교를 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할 것입니다. 포괄주의는 이에 어떤 식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복음주의자들의 공격에 대비해 다음과 같은 포석을 깔아 놓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정신적 종교들 가운데에는 운명에 의해 형성된 근본태도들(Grundhaltungen)이 결정적으로 남아 있다. 만일 우리가 그 근본 태도들을 가치비교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종교 자체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들이 그때그때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성분으로서 속해 있는 전체 문화체계 자체만을 비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결정적인 가치비교를 감행할 것인가? 이 차이점들을 해결하시는 하느님 자신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99)

종교를 문화에 포함시키면서 범주를 확대하고 일상화합니다.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또 다른 과제이긴 하지만 종교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당연하고도 불가피하게도 문화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트뢸취도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종교가 사회적 차원에서 생성하고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 역사적으로 읽어가는 방법이 타당할 뿐 아니라 더 큰 범위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주의가 말하는 온 인류를 향하는 보다 더 점잖은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초보적 다원주의 입장에서는 "우리에게만"이라는 말을 더 철저하게 밀어 붙어야하는 것 아니냐고,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교가 타당하듯 누군가에게는 다른 종교가 더 타당할 수도 있지도 않느냐며 포괄주의를 비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구절은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원주의가 표상하는 신의 절대성을 향한 가교 역할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점들을 해결하시는 신'을 말할 때 우리는 이를 그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신은 절대적이지만 오직 신만이 절대적이고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그러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인에게만 타당하다고 교통 정리하는 것이 좋은 전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차이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놓칠 리 없는 트뢸취도 그의 글 마지막에서 이 문제에 집중합니다. 물론, 복음주의든지, 포괄주의든지, 다원주의든지 간에 선교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렇다면 포괄주의에서 선교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이는 뒤에 살펴볼 라너에게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오지만 트뢸취에게서도 이미 유사한 논지가 나옵니다.

세계 종교들과의 정신적인 투쟁만이 가능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세계종교들과의 확실한 접촉이 가능할 것이다. 반면에 모든 이교는 유럽과의 접촉을 통해서 곳곳에서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해체되었으며 이로부터 보다 고차적인 종교와 문화를 통한 보충을 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선교의 의무와 결과가 있다.(100)

즉,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에게 고차적인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트뢸취는 유럽인 자신들이 갖고 있는 고차적인 종교와 문화를 통하여 이보다 열등한 다른 종교와 문화를 보충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트뢸취에 따르면, 유럽은 고차적인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도 문화권은 유럽과 만나면서 해체되었으니 이제 고차적으로, 자신들의 방식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선교의 의무와 결과가 있다는 것은 선교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대책 없는 거만을 떨지는 않았습니다. 역사의식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경우라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세계종교들은 그들의 문화권에 상응하는 종교적 자각의 형태들이며 자기의 내적인 성향들로부터 정화되고 심화되는 데 의존한다. 이 경우 그리스도교와의 접촉은 그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러한 내적인 발전 속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100)

일방적으로 가르쳐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서구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가 부지런히 주장했던 서로 만남과 배움이라는 과제를 주장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점에서 트뢸취의 포괄주의는 슈바이처의 그것보다는 훨씬 더 초기다원주의로 접근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의 고백에 불편해 하실 분들의 항의를 염두에 두었는지 트뢸치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공동의 목표를 전혀 제시할 수 없으며 인간 공동의 최상의 가치라는 객관적인 의미에 있어서 어떠한 절대성도 제시할 수 없는가?"(102). 그리스도교 자체 안에서의 시비 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저마다 주관적인 절대성을 명분으로 하여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이러한 절대성이 역사적인 종교들 가운데 하나의 종교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들 모두가 하나의 공동 방향을 암시하고 단지 최종적인 통일성과 객관적 절대성이 놓일 수 있는 곳에서 내적인 성향으로부터 이제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하나의 최종적인 정점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102)

과연 모든 종교들은 주관적 절대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되 객관적인 절대성은 최종적인 정점으로 지향될 뿐이라고 함으로써 역사의식을 토대로 하면서도 서구 그리스도교가 표방한 초기다원주의의 기본이념인 일원성의 궤적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다원주의에 대한 예고의 뜻 외에도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종적인 정점에 이르기 전까지 역사의 현실에서는 절대성이 여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못 박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하여 뭇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과 회의를 트뢸취도 의식하고는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다듬고 보듬는 섬세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것이 회의와 불안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감지하기 바란다. 우선 우리에게 진리가 되는 하나의 진리는 그 때문에 진실(Wahrheit)과 삶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날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 속에서 체험하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은 본질 자체이며 자기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본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류에 대한 사랑 속에서도 체험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경쟁(Wetteifer)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적인 정화와 투명함을 위한 경쟁인 것이다.(103)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타자가 이미 저마다 '자기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본질'이라는 것을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확인하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주관적인 절대성이 대책 없는 무정부적 상대주의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회의로 빠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기와 타자의 관계를 이렇게 '척도존중'과 '사랑체험'을 통해서 부대끼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연대적 경쟁이고 경쟁적 연대로 승화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선언합니다.

만일 우리가 각각의 집단들 속에서 가장 높은 것과 가장 깊은 것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만남을 희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크게는 종교들의 만남에 타당하며 개개의 종파들의 만남에도 적용되며 개인들 서로 간의 만남에도 적용된다. 신적인 삶은 우리의 이 땅에서의 경험에 있어서는 하나(Eines)가 아니라 여럿(Vieles)이다. 그러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예감하는 것(Das Eine in Vielen zu ahnen)은 사랑의 본질이다.(104)

마지막 두 문장이 중요합니다. 먼저 '신적인 삶'이라는 주어는 하나일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이제 역사의 눈으로 인간을 보니 체험의 영역에서는 여럿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외면하고 자꾸 하나에 집착하면 자기의 삶과 믿음만이 그 하나에 해당하고 자기와 다른 것은 하나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도 신과 신앙을 혼동하는 착각이고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신격화와 신성모독의 오류입니다. '하나'라는 것은 신이 우리를 이끌어 이루어내실 그 무엇이지 우리에게 덥석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잊어버리면 이런 착각에 빠지지만 이미 우리는 역사에서 살고 있고 역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서는 그것이 '여럿'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럿'이라고 하고 끝내버리면 다원주의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등장합니다. 트뢸취는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예감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고도, 그 의미를 넌지시 집어넣으며 포괄주의의 핵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나온 '하나가 아니라 여럿'라는 표현이 그 뒤에는 '다양성, 통일성'으로 바뀐 점에 주목합시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말하면서 '다양성'을 살리되, '통일성'을 말하며 '하나'를 다시 부여잡습니다. 이 예감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 문장에 포괄주의의 대표적인 요소들인 대상, 선험, 주관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사랑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이름 대신에 쓴,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그러나 '주관'적으로 설정된, 가치입니다. 다양성은 '대상'에 해당합니다. 통일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되 가야할 방향으로서 앞당겨 설정되었기에 '선험'적입니다. 즉, 트륄취에게 있어 그리스도교는 다양한 종교들을 끌고 올라가는 사랑의 정점을 통일성의 형태로 녹여내는 종교가 되어야 하며, 그러한 사명을 지닌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랑에서 종국적인 보편성이 이루어지며, 그런 점에서 여전히 우월성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예감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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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화               선험                    주관

복음주의가 유일성을 근간으로 하나를 주장한다면, 이제 포괄주의는 통일성을 표방하면서 역시 하나로 모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통일성을 책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주의가 그만한 이유로 배타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면 포괄주의와 논리적으로 대칭 관계에 있지만 하나가 배정되는 위치가 대조적일 뿐 하나를 붙잡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성이든 통일성이든 그 좋은 이름들이 '하나의 폭력'에 휘둘리지 않을 길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리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미 하나 안에 들어있으면 그 하나가 전체로 보이니 그 안에서 편안하다고 하겠지만 하나의 바깥에 있으면 하나는 결코 하나가 아닐 뿐 아니라 폭력이고 억압으로 겪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포괄주의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역사는 바로 이에 대한 무수한 증거들로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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