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12 복음주의의 주장: “그리스도의 유일성”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Nov 23, 2015 09:47 AM KST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1.  복음주의/배타주의(3) 
앞서 던진 물음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셨나요? 누가 “내 맘대로” 하고 있나요? 미안한 말씀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가의 여부만이 다를 뿐입니다. 저마다 자기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게 바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야기를 덮어놓더라도 먼저 인간 스스로의 주제파악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저 앞에서 말씀드렸던 ‘자기라는 인간’에 대한 되돌아보기 말입니다. 
‘자기라는 인간’은 이미 “내 맘대로” 할 가능성이 진합니다. 이는 결국 세계관의 문제인데 그 근본은 인간관, 즉 인간의 자기 이해입니다. 일각에서 ‘세계관’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뿌리는 인간관입니다. 그런데 인간관이라고 해도 그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같은 객관적인 인간관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에 연관된 자기 이해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이해입니다. 이건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알던 모르던, 의식하던 못하던 그렇습니다. 이럴 수밖에 없는데 이렇기 때문에 이런 줄 모르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기가 없이 그 ‘무엇’이 그 무엇 그대로 그 ‘무엇’으로 새겨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키지요.
그런데 자기를 주체로 보게 된 근세에서는 이미 ‘무엇’ 만이 아니었습니다. 앎의 주체이니 앎이라는 행위의 꼴과 얼을 살피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어떻게’입니다. 이제 ‘어떻게’가 ‘무엇’에 가서 붙습니다. 이렇게 근세에서는 주객관계가 성립되었는데 현대에는 이 둘의 관계를 다시금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주객관계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무엇’이 있었다면서 이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이로 돌아가려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물론 근세 주객관계에서 주체에 지나치게 힘을 많이 부여한 일방성에 대한 반발이라는 뜻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실’의 이름으로 ‘무엇’만으로 몰아가려는 것도 역시 일방적입니다. 이러나저러나 둘 다 일방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중심주의적입니다. 현대 이전의 시대는 어떻게든 한쪽으로 몰아가는 중심과 환원 방식이 기조를 이루었습니다. 허나 오늘날은 주객관계만 해도 주가 객을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합니다. 아직도 주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근세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맥그래스가 보기에는 니체가 해석만 있다고 하면서 사실을 내팽개쳤다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우리에게 사실이라는 것은 언제나 ‘해석된 사실’임을, 그리고 ‘해석 없는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선언했을 따름입니다. 어떤 ‘무엇’이라고 하더라고 그 무엇을 그 ‘무엇’으로 그렇게 새겨낸 ‘어떻게’, 그리고 많은 ‘어떻게들’ 중에서 하필이면 그런 ‘어떻게’이어야 할 이유인 ‘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엄연한 ‘왜’를 보지 못하고서는 ‘무엇’으로 나머지들을 통일시키려는 생각이 꽤 집요합니다. 깔끔하고 분명해 보이니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왜’로부터 나온 이야기는 ‘무엇’ 입장에서는 사실이 없다고 함으로써 혼란만 일으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해석 이전의 사실, 해석 이전의 진리를 어디서 어떻게 구할 것입니까? 세계가 ‘있는 그대로’ 구성되고 작동한다면 해석 이전의 진리, 해석 이전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는 ‘있는 그대로’ 구성되고 작동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시대의 흐름에 따른 패러다임 전환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그러하였으니 이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알려지는 대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알려진다는 것은 무색무취의 현상이 아닙니다. 앎이라는 것은 이미 나름대로 의도와 관심, 목적 등에 의해 방향과 각도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앎이란 그저 ‘그대로의 있음’에 대한 사심 없는 앎이 아니라 삶이 삶을 꾸려가기 위해 있음에 대해 내뻗는 몸짓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앎이란 있음에 대한 것이기 전에 먼저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삶이 곧 ‘알려지는 대로’의 이유와 근거입니다. 삶이 앎을 그렇게 만듭니다. 그러니 ‘알려지는 대로’란 더 근본적으로는 ‘삶이 시키는 대로’라고 풀어야 합니다. 있음에 대한 앎을 ‘인식’이라고 한다면, 삶은 있음에 대한 앎을 ‘해석’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살고 있으니 사실이란 것은 ‘이미 해석된 사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있음 그대로’만 붙잡으려 하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내 맘대로 할 거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로 가능하지도 않은 ‘있음 그대로’를 가능한 줄로 생각하고 이것만 붙잡으려는 태도도 역시 “내 맘대로”에 해당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내 맘대로”는 남들만 하는 짓이 아니라 나도 하고 있는 짓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는 아니라고 우기지 맙시다. 현대인의 자화상이 포함하는 주제파악이란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앞서 말한 ‘자기라는 인간’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고 가르칩니다. 이건 삶이 사람에게 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삶을 산다’기보다도 ‘삶이 나를 산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맥그래스가 보여주듯 종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을 향하는 ‘무엇’ 물음과 이에 따른 ‘있음 그대로’를 고수합니다. 오늘날에도 이 틀을 고수하고 있는 설교들을 보십시오. 절대적인 명제로 선언되고 일방적으로 선포됩니다. 그래야 한다는 왜곡된 카리스마의 강박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라고 선포되어야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하면 카리스마는 일순간 붕괴되고, 나름대로의 관점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다고 하면 ‘영빨이 없는 삯꾼’으로 취급되고 맙니다. 그래서 ‘무엇’이고 ‘있음 그대로’이며 ‘사실’입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사실’인데도 말입니다. 
이쯤하면, 근대와 현대에 대해 맥그래스가 가한 비판에서 취할 것이 무엇이고 걸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의 핵심적인 주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맥그래스는 복음주의의 핵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구원, 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중요성입니다. 이들은 그 뜻이 약간씩 다르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하나의 묶음으로 엮일 수 있습니다. 그 중 계시를 살펴봅시다. 여기에서 계시는 근대인들에게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에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됩니다. 
‘계시’라는 개념은 계몽주의자들에게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계시가 사고하는 개인의 자율성을 위태롭게 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궁극적으로 다른 원천, 즉 독립적인 인간 이성으로는 다가설 수 없는 원천에서 궁극적으로 파생되었다고 인정해야 한다면, 자유롭게 사고하는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44). 
맥그래스에 따르면 근대인들에게 계시는 인간에게 있어서 상당히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시를 이성과 조율하거나 무시 또는 약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맥그래스에게 계시와 구원은 유일성의 근거입니다. 본, 경배, 케리그마는 인간의 차원에서 풀어내는 것이지만 계시는 이를 넘어선 것이니 명실공이 유일성을 주장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명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시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스스로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계시의 원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구원의 원리가 오직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45).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것”을 명백하고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계시란 과연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하신다는 것”을 맥그래스는 어떻게 알았나요? 이는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말씀과 비슷한 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인데 누가 이를 보고서 이렇게 기술했을까요? 인간 창조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 인간의 언어로 표출되었습니다. 어떻게 읽고 새겨야 할까요? 같은 방식으로, 맥그래스의 주장도 진위여부를 가릴 필요는 전혀 없지만 그 뜻을 새기려면 거의 ‘내 맘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도 이를 받는 인간이 새기는 해석의 틀 안에서 비로소 뜻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그 좋은 증거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신-인 만남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렇게도 다양하고 심지어 상충하기도 한다는 것은 계시와 해석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드러내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맥그래스의 이런 주장과는 달리 현대신학자들은 기독론을 축소하거나 무관심했다고 평가합니다. 54쪽에 이어지는 다른 현대 신학자들에 대한 맥그래스의 평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선포에 담긴 기독론적 내용은 루돌프 불트만과 게르하르트 에벨링, 그리고 특히 폴 틸리히의 저서들에서 축소되었다. 틸리히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존과 위격을 무시했으며 이것들이 그의 신학에 주목할 만한 공헌을 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예증일 뿐이다(54).
결국 예수를 두고 ‘역사적 실존과 위격’을 근거로 보는가, 아니면 ‘원리를 보여주는 예증’으로 보는가의 대립으로 추릴 수 있습니다. 맥그래스는 예수의 역사적 실존과 위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유일성’과 관계있기 때문입니다. 이천년 전 나사렛에서 단 한번 출현한 그 존재의 역사적 실존은 당연히 유일하고 중요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에 속하고 동의한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맥그래스가 말하는 ‘위격’이란 ‘성자’를 일컬을 터인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현대 신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격하시켰다고 평가합니다. 맥그래스가 보기에 위에서 언급된 일련의 현대 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 자율성을 핵심적인 가치로 갖는 완전한 인간상의 그림에 대한 하나의 예로서만 예수를 보여줬을 뿐입니다. 여기서 기준은 완전한 인간상이며 예수는 그 기준에 만족되는 적절한 한 예시 정도일 뿐입니다. 원리, 예증, 신뢰, 본보기는 보편적인 기준을 먼저 그립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개별적인 인물이 그 기준에 만족되는지 살핍니다. 그 기준에 예수가 합당하다면 뭔가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신성을 근거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않고 인간성을 기준으로 예수를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불트만은 선포 혹은 ‘케리그마’를 무엇보다도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했다. 즉, 케리그마는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실존적인 결단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같은 쪽). 
‘실존적인 결단’은 위에서 인용된 구절에서 ‘원리를 보여주는 예증’과 연관됩니다. 모두 인간의 차원에서 벌어지고 벌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맥그래스가 보기에 이러한 식의 “케리그마에는 정보를 주는 ‘내용’이 있을 수 없다”(같은 쪽)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그가 바로 “예수의 역사적 실존과 위격”이라고 말한바, 인간의 차원이 아니라 그 너머 신적인 영역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예수의 ‘역사적 실존과 위격’이 먼저 전제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앞의 신학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맥그래스의 논지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갑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엮여지는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복음주의는 ...케리그마적 통찰력을 그 세계관 전체에 도입하였다”(55).
여기서 케리그마적 통찰력은 말씀 선포이기에 특수하면서도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계관 전체로 확장되면서 보편적으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복음 전도의 중요성에 대한 복음주의의 강조는 이러한 기독론에서 비롯되는 전적으로 타당하며 자연스러운 결과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자 주님이시라면, 그 사실을 세계에 선포해야만 한다. 복음 전도에는 기독론적인 기반과 동기가 있으며, 복음주의는 이를 선택된 소수를 위한 임의의 특별 프로그램이 아닌, 교회의 생활과 증거에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분이시기에 복음 전도는 그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신자의 반응에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모두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55) 
이러한 주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인 것은 복음의 세계선포를 위한 본질적 기반과 증거다.’ 이렇게 정리된 한 문장 안에 앞서 나왔던 종교간 관계유형분석의 항목들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인 것은 복음의 세계선포를 위한 본질적 기반과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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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유일성-특수성]                 객관 [보편성 확보]        실체
이렇게 항목들을 대입하여 분석해 보니 복음주의가 배타주의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은 뒤의 내용 없이도 이미 주어로서 자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서 보편을 확보하는가의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전제되는 특수한 ‘자체’입니다. ‘대상을 주무르는 것’, ‘대상의 주체화’나 ‘어찌 나올지 모르는 타자와의 긴장’ 등에 앞서 이미 ‘자체’가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지 않아도 ‘스스로 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며, 그 다음에는 “본질적 기반과 증거”라는 표현입니다. 기반과 증거는 이제 ‘자체’를 ‘실체’이게 합니다. 즉 ‘스스로 그렇게 있음’을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이게 합니다. 실체란 그런 것입니다. “복음의 세계선포”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계선포를 통한 보편성을 굳이 관계방식에서 보면 객관적 유형이라고 확인되지만 엄밀하게 보면 객관도 아닙니다. 아니 객관 이전입니다. 사실상 고중세시대에는 ‘객관’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주체로서 자리 매겨져야 객체라고 읽혀질 이유가 생기는데, 인간이 자리매김하지 않는 이상 ‘객체’로 설정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객관’은 후세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다른 유형들과 비교하자니 애써 ‘객관’이라는 말을 붙인 것입니다. 객관적 보편성보다 자체와 실체가 훨씬 중요합니다.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특수성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 1장 결론부에서 이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특수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확고히 해야 한다. (57) 
말하자면 인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의 정당성의 근거는 “복음의 세계선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체와 실체로 충분하며, 세계선포를 통해 확보될 것이 기대되는 보편성(객관)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골방에서 한 사람만 인정하더라도, 아니, 단 한 사람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그 자체로 참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금 미리 비교한다면, 포괄주의는 ‘선험적 보편성’에서 시작합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칼 라너의 표현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 관점에 있어서는 ‘익명’, 즉 아직 이름이 없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그러한 상태에서 그 본래 이름을 알려주는 것, 이것이 포괄주의가 말하는 선교입니다. 이것과 견준다면 복음주의, 즉 배타주의는 저 보편성이 없어도 특수성은 특수성 그대로 그 자체로서 성립합니다. 이것이 복음주의의 매력인데 바로 이런 이유로 배타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체로서 자기정당화는 충분한 것 같은데, 또 다르게 특수할 수 있는 타자는 끼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자체의 눈으로 보면 자기의 특수성은 마땅히 보편성으로 나아가지만 타자의 특수성은 보편성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자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 논리구조는 사실상 동어반복이지요. 고전형이상학의 논리구조가 바로 그러합니다. 인식론적 성찰, 즉, 앎이 있음의 문지기 역할이라도 한다는 생각을 도저히 하지 않았던 사고방식입니다. 그 자체로는 확고하다는 이념을 깔고 있기에 꽤 있어 보입니다. 카리스마가! 그런데 그런 카리스마가 골동품이 된지는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아니 골동품 정도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정체가 폭로되면서 저항을 받았던 것이지요. 특수하더라도 자체이기 때문에 보편이 될 수 있다는 이념의 폭력이 보편의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꽤 오랜 세월 정치, 사상, 문화, 그리고 종교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리고 성서도 그런 틀에서 읽혔습니다. 자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제 복음주의가 다원주의를 어떻게 비판하는지를 살피기 위해 5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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