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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10 “복음주의가 보는 근대: 문화의 노예”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Nov 03, 2015 01:28 AM KST
1. 복음주의/배타주의(1) 
▲정재현 연세대 교수. ⓒ베리타스 DB
앞에서 종교 간 관계 유형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비교하면서 각 유형의 논리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을 간단하게 살폈습니다. 논리적 근거는 씨줄에 해당하고 역사적 배경은 날줄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공시성과 통시성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논리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이 가로와 세로라는 것은 이것이 임의로 고른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 말에는 세 가지 유형에 대해 구조와 역사를 한데 엮는 체계적인 분석을 하겠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논리적이고도 역사적인 순서대로 배타주의로 분류되는 복음주의부터 살펴봅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도교가 본격적으로 다름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근세에 와서의 일입니다. 그런데 만남의 시작은 일단의 거부였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16-7세기는 배타주의(이전에는 ‘배타’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가 지배적이었고, 18-19세기 포괄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났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 다원주의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의 전환이 진화나 발전이라고 미리 질러 짐작하고는 배타주의보다 포괄주의가, 포괄주의보다 다원주의가 더 우수한 유형이라고 전제하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인 전개 과정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나중에 나온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때문에 ‘논리적 근거’가 중요한 것입니다. 논리적 근거는 통시적인 흐름에서 역사적인 과거로만 치부하기에는 간단치 않은 것을 공시적으로 끌고 나옵니다. 연대기적으로는 그랬지만,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각 입장은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의 사조로, 그래서 엄연히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좋은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세로축에 대한 고려 없이 가로축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연구실의 임의적인 조작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로축 뿐 아니라 가로축을, 가로축 뿐 아니라 세로축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복음주의 유형을 대표하는 자료로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복음주의와 그리스도교적 지성』(IVP, 2001)을 살피겠습니다. 앞으로 살필 유형들의 분량에 대해 형평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1장과 5장만을 보려 합니다.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주장과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선 살펴야 할 것은 맥그래스가 16-17세기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는 ‘복음주의,’ 즉 ‘배타주의’의 입장에 서서 그 이후의 시대와 그 시대적 사조들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후에 개진되는 그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맥그래스의 핵심주장은 무엇인가요? 장의 제목 그대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입니다. 물론 하느님이 절대적인 존재이고 하나라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성육신이라는 방식으로 현현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유일성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성서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유일성’이라는 주장을 끌어내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의를 엮어내고 있을까요? 조금 달리 묻는다면 이 저작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전제인가요? 결론인가요?  
책으로 들어가 봅시다. 맥그래스는 복음주의의 주장을 집약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냅니다.   
복음주의는 단지 그리스도의 유일성(uniqueness)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성(definitiveness)을 강조한다. 하지만, 전자를 고백하는 것은 후자를 옹호하기 위한 중요한 첫 단계이다.(29)  
유일성은 시작에서의 언어이고, 궁극성은 끝을 마무리하는 언어입니다. 유일성이 이미 전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일성과 궁극성을 포괄주의나 다원주의와도 소통되고 비교가 가능하도록 다른 어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성을 특수성으로, 궁극성을 보편성이라고 바꾸겠습니다. 그러니까 유일성에서 출발해서 궁극성으로 간다는 것은 특수성에서 출발해서 보편성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이천년 전 나사렛’은 특수한 시간과 공간의 점입니다. 즉 나사렛 예수는 특수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특수한 사건이 특수한 공간과 시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초시공적인 보편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특수성을 자리매김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보편성에 이를까요?  
‘유일’은 문자 그대로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맥그래스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인 것이 그리스도에만 국한됩니까? 싯다르타도 오직 하나고, 공자도 오직 하나이며, 소크라테스도 오직 하나고, 모두가 다 오직 하나입니다. 여러분도 오직 하나이며, 쌍둥이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오직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유일성은 어떻게 궁극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다양한 유일성 중 하나인 자신의 입장이 궁극적으로, 즉 최종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옹호하거나 선포하는 데 아무런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결정적이고 확실한 지식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토대를 근거로 ‘특수성의 문제’(scandal of particularity)에 대해 불평하는 이들도 있다. (30, 이하 책의 쪽수만 표기)  
여기에서도 ‘보편’과 ‘특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음의 문장은 더욱 압축적인 선언입니다: “복음주의는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는 특별 계시라는 개념을 오랫동안 고수해 왔다”(30). 이러한 표현은 다음 쪽에서도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교 계시의 특수성을 고백함으로써 복음주의는 이제 보편타당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념을 유지하면서도 토대주의의 인식론적 곤경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31). 이처럼 복음주의는 특수성에서 시작하여 보편성으로 나아갑니다. 특수성을 전제하고 시작하지만 보편성으로 확장합니다. 유일성이라는 이름의 특수성이 모든 것을 평정하는 궁극성을 지닌다고 함으로써 보편성을 확보합니다. 특수에서 보편으로의 이동은 개별을 전체로 확장함으로써 시도됩니다. 고전형이상학은 신과 우주를 포함하는 ‘전체’를 설정하고 신을 그 정점에 모시면서 세계를 설명하고 인간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리고 복음주의는 바로 이런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려내는 가장 탁월한 방식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의 존재는 인간의 사유와는 별도로 독립적인 실재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성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동어반복적으로 이해합니다. 애써 사람이 되신 까닭을 곱씹기보다는 그 분이 신이라는 데에로 초점을 집중합니다. 그러니 특수이긴 하지만 특수가 아닙니다. 모양만 특수이지 정체는 특수가 아니니 사실 특수에 머물러 그 뜻을 새길 겨를도 없습니다. 특수는 바로 보편입니다. 껍데기인 특수를 벗겨내면 알맹이인 보편이 이내 드러난다는 식이지요. 그러니 다른 특수들, 즉 개별적이기만 한 특수들은 끼어들 수 없습니다. 결국 보편으로 드러날 특수와 달리 개별적이기만 한 특수한 것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는 배제되는 것이지요. [포괄주의는 반대로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갑니다. 다원주의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가는 이 두 방향을 모두 깨뜨립니다. 두 방향 모두 다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원주의는 일방의 구도가 아니라 쌍방의 구도로 그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렇다면 다원주의는 어떻게 특수와 보편, 개별과 보편의 관계를 가질 것인가요? 일단은 물음으로 남겨둡시다.]  
그런데 이렇게 이미 보편인 특수로서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복음주의에 대한 일차적인 시비는 근세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것도 근세정신의 대중화라고 할 계몽주의에서 그 시비는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계몽주의는 18세기 사상입니다. 16-17세기는 근세 전기, 18-19세기는 근세 후기입니다. 같은 근세지만 이 둘 사이에는 사고방식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습니다. 근세 전기는 인간이 인식 주체로 등장하고 고전형이상학이 옹립하던 실재를 대상으로 설정하면서 이 관계를 살피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를 인식론이라고 하지요. 인간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관심합니다. 그런데 근세후기에는 인식 주체인 인간이 토대가 되고 실재와 방법이 엮입니다. 가히 인간중심주의가 완성된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런 구도 안에서 실재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시 하기에 형이상학의 복고라고 합니다. 물론 인간을 주체로 놓고 하니 관념론이 지배적입니다. 계몽주의는 이 둘 사이에 위치합니다.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계기이고 동인입니다. 인간이 세계를 보는 토대가 되는 단계의 서주입니다. 계몽주의란 엘리트들만 주고받던 ‘잘난 인간’ 이야기의 찬란한 빛을 아직도 흑암에서 헤매는 대중에게 비춰주겠다는 것입니다. 세속화의 본격적 세계화라고나 할까요. 인류문화사에 지대하게 이바지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도 이를 거쳐서야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교는 인간해방을 향한 이런 도도한 흐름을 외면하고 억제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구체적 종교들의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는 구태여 들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몽주의에 대해 맥그래스는 언급합니다: “[근세인들은] ‘이성,’ ‘경험’ 혹은 ‘문화’와 같은 보편타당하고 접근 가능한 규범 혹은 자료에 기초하여 종교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왔다”(30). 여기서 맥그래스가 언급한 ‘이성,’ ‘경험,’ ‘문화’는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 요소들은 현대신학 방법론에 등장하는 것들입니다. 이에 반해 고전신학 방법론에서 중시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요? 계시, 성서, 전통입니다. 17세기까지는 고전신학의 3요소가 중시되었는데,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면서 ‘이성,’ ‘경험,’ ‘문화’와 같은 요소들이 신학 방법론에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은 맥그래스의 고유한 시선이 아니고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좀 더 상술하자면 근세 후기에는 ‘이성,’ ‘경험’이라는 요소가, 20세기에는 ‘문화’라는 요소가 신학방법의 주요구성요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문화를 포함해서 이런 요소들이 이 때 처음 등장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 삶에서 작동해 왔지만 인간 스스로를 이해하는 범주에 ‘문화’를 염두에 두게 된 것이 현대에 와서의 일입니다. 20세기 현대 신학자들은 앞의 전통적인 세 요소들을 끌고 와 새로이 등장한 세 요소들과 묶습니다. 여섯 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고, 이 중 몇 개를 골라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눈으로 복음주의를 보니 특수에서 보편으로 가는 것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시비를 했습니다.   
어떻게 시비했을까요? 31쪽으로 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라는 작은 제목이 붙은 글이 나옵니다.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 근세인들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열거합니다. 일단 칸트가 먼저 나옵니다: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 이성은 그리스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주장한다”(32). 칸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이해와 인정을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두지 않고, 도덕적 이성이라는 인간의 기준에 맞추어서 본다는 것입니다. 즉 도덕과 이성이라는 인간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에 들이대고 그 틀에서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인정합니다. 레싱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하게, 18세기 독일의 합리주의자인 레싱(G. E. Lessing)의 기독론 저서들에서도, 이성의 일차적 권위를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32). 허나 복음주의에서는 이러한 시도들을 보면서 근세 사상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보편이성을 믿고 있다고 간주했습니다. 이들은 계몽주의가 표방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충족시키면 합당한 것이고, 충족시키지 못하면 합당하지 못하다는 판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평가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상가들을 맥그래스는 “문화의 노예가 된 사상가”(33)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문화라고 통칭하는 것은 이성, 도덕 등인데 이것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시대정신입니다. 맥그래스가 보기에 칸트, 레싱은 다 문화의 노예입니다. 이후 <예수전>을 쓴 르낭이나 쉬트라우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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