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8 종교간 관계 분석을 위한 틀(1)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Sep 22, 2015 09:04 AM KST
제 1부
0.  종교간 관계 분석을 위한 틀(1)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앞서 서론의 끝자락에서 말씀드렸듯이 이제 <종교신학>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배경에서 시작된 종교신학은 다른 종교들과 공존하고 혼재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마땅한 길을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개진된 분야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우선 이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살피고 되씹고자 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던 ‘자기라는 인간’에 대한 성찰에 바탕을 두고 비판적으로 읽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할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미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종교신학>의 뼈대인 ‘종교간 관계’의 기본 방식은 배타주의(복음주의)-포괄주의-다원주의의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논리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배타주의와 다원주의입니다. 배타주의는 하나를 붙잡는 것이고, 다원주의는 여럿을 살피는 것이며, 포괄주의는 하나와 여럿 사이를 훑으면서 여럿을 하나로 끌고 갑니다. 하나와 여럿의 관계로 세 가지 유형을 간략하게 비교해 보았지만 서구 그리스도교가 전개한 종교간 관계에 대한 논의를 읽어가는 데에는 이 방법이 적절해 보입니다. 각 유형이 그만한 근거와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인 근거이고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서구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믿음, 문화를 삶이라 했을 때 믿음과 삶의 관계로 말하자면 이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그 동네는 믿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믿는다고까지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가지 않아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이러한 양상도 달라져가고 있지만 최근까지는 그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문화와 종교는 그런 것입니다. 물론 현실은 근세의 탈종교화, 세속화 과정을 거치면서 종교문화와 구별되는 세속문화가 생겨나고 계몽주의 이후에 그것이 가속화되는 이 시대에 교회는 가라앉았지만, 종교는 문화의 형태로 아직도 남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 문화와 그리스도교가 그러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앞서 한 이야기에 견주자면, 믿음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로 자리 잡지 못한 채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종교와 문화가 따로 노는 것은 아닌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서구 그리스도교인들이 믿음과 삶의 바람직한 모습으로 잘 믿으면서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서 보자면 그렇게 연관되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경우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그렇게까지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인들이 추려놓은 유형분류인 배타, 포괄, 다원이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되기에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이야기를 살피더라도 이를 참고삼아 결국 다종교의 공존전통이 유구한 우리문화에서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정체성을 엮어내는 길을 더듬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서구 그리스도교가 개진한 <종교신학>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적절한 분석 유형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살피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부질없는 시행착오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유구한 흐름에서 몇 가지 통찰이라도 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종교간 관계’를 살펴봅시다. 먼저 ‘관계’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봅시다. ‘관계’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반드시 둘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둘은 관계를 구성하는 최소수이며, 모든 관계는 결국 둘로 환원됩니다. 둘이 있고, 그래서 관계가 생긴다고 할 때, 한 쪽이 주도권을 가지고 다른 쪽으로 다가감으로써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고, 쌍방이 서로 다가가면서 만나는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앞의 것을 중심주의적 관계라고 한다면 뒤의 것은 탈중심주의적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고중세시대의 신중심주의나 근세시대의 인간중심주의에서 관계방식은 당연히 중심주의적이었고 따라서 일방적인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현대는 중심주의를 거부하며 쌍방관계에 주목합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관계를 ‘자-타 관계’와 ‘주-객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고중세시대는 아직 이렇다 할 관계구도가 설정되기 이전이라면 근세는 주-객 관계를 기축으로 하였고 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자-타 관계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서구 문화사에서 자-타 관계와 주-객 관계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었습니다. 근대인들은 주-객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 이전 고-중세시대에는 주-객은 있지도 않았습니다(굳이 주-객 구도에서 보자면 ‘객’만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식행위의 주체가 된 것은 근세의 일이고, 여기서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은 객체입니다. 신조차도 객체 중에서 가장 높을지언정 객체입니다. 주-객 구도에서는 객체를 아무리 잘 모시더라도 주체의 처분에 달려있습니다. 객은 주에 달려있습니다. 주-객 구도는 이미 그렇습니다. 그래서 고중세신학에서는 신(神)이 초점이었던 데 비해 근세신학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신앙(信仰)이 기조였습니다.   
이에 비해 현대는 탈중심주의를 표방하는데, 이는 어디에도 중심을 허락하지 않는 상호주의를 내세웁니다. 이에 따라 현대는 자-타 관계에 주목하면서 ‘타자’를 말합니다. ‘객체’라고 말하지 않고 ‘타자’라고 말합니다. 객체와 타자는 어떻게 다를까요? 매우 많이 다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객체’는 주체의 처분에 달려 있다면, ‘타자’는 더 이상 주체의 처분에 맡겨지는, 그래서 결국 주체의 같음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객체’가 아니라, 자기의 처분 바깥에 있는 다름입니다. 그래서 ‘타자’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다름’들의 아우성 때문입니다. ‘같음’의 신화에 숨죽였던 ‘다름’들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한 세기 반전부터 일어났습니다. (관념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던) 물질, (본질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던) 실존, (사변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던) 실증, 모두 ‘같음’에 대한 ‘다름’의 반동입니다. 물질, 실존, 실증, 이 모두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우리 삶을 살핍니다. 아니 바로 우리 삶에서 나왔습니다. 죽음과 얽힌 삶에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신에게서나 신앙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신과 신앙을 보려합니다. 현대신학은 이미 그러합니다. 아직도 그 절실함을 외면하는 부류들이 적지 않지만 이게 바로 그리스도교를 세상과 동떨어지게 하고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그런 부류들만 모르고 있는 상식입니다.  
물론 타자에 주목하는 탈중심주의가 말하는 상호관계라는 것이 사실 그리 좋고 편안한 그림은 아닙니다. 더욱이 있는 자, 가진 자, 큰 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일방의 그림이 훨씬 더 편합니다. 쌍방이라는 것은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고 일방적으로 처리할 수 없으며, 언제나 조종, 타협이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힘 있는 자가 힘없는 많은 다름을 억누르고 자기의 같음을 주체의 이름으로 포장해 왔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 다름들의 절규가 터져 나오면서 정치에서도, 종교에서도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헌데 정치는 무수한 희생을 거치면서 다름들의 세상으로 점차로 나아가고 있는데 비해 종교는 아직도 전근대와 근대에 머물러 이 꿈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앞에서 신을 보기를 앙망하는 종교적 대중들의 욕구에 부합하여 카리스마의 이름으로 시대착오적인 작태들이 소위 정통과 소위 이단을 막론하고 난무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가라앉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을 터인즉, 이 대목에서 살필 일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고중세의 신중심주의는 아직 주-객 관계가 엮어지기 이전 단계이니 거기 그렇게 있는 있음으로서의 신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충족하니 ‘실체’라고 했습니다. 그 자체에서 스스로 존재하고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족성, 이건 자존성이 성립되면 당연히 뒤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신 이미지에서 가장 깊은 뿌리와 향수를 가진 사유방식입니다. 고중세의 실체주의(substantialism)입니다. 여기서 신은 자존적이고 자족적이니 다른 것들과의 관계는 본질적이 아니라 부수적일 뿐입니다. 결국 관계라는 것은 실체에 대해 하부적인 성질일 뿐입니다. 자체에 초점을 맞추니 관계 이전의 실체를 근거로 하는 배타주의의 배경이 됩니다. 이 입장의 핵심적인 주장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입니다. 
그런데 근세로 넘어가면 그림이 꽤 달라집니다. 그렇게 신이 계셨지만 이제 인간이 앎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신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인간이 믿음의 주체가 됩니다. 이러면서 신은 앞서 말한 대로 객체로 모셔집니다. 세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 바 주-객 관계가 성립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에서는 이미 주체에게 주도권이 쥐어져 있습니다. 주체라는 것은 이미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이에 비하자면 고중세의 실체는 객체에 해당하니 굳이 객관주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근세 주관주의는 인간이 신과 세계에 대하여 앎과 믿음의 주체라고 선언합니다. 더 나아가 앎이라는 것도 있음 그대로 알기보다는 앎의 틀과 꼴에 담기는 만큼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데에까지 이르면서 그러한 틀과 꼴이 앞서 짜여 있으니 ‘선험적’이라고까지 합니다. 이른바 자아론적 선험주의(egological transcendentalism)가 선포됩니다. 고중세시대에는 관계 이전의 실체가 ‘신의 이름으로’ 군림했었는데 이제 근세에 이르러 주-객 관계가 설정되고 오히려 주체라는 인간이 앎의 틀과 믿음의 꼴을 앞서 갖고 있다는 식으로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관계가 설정되고 인간이 대상에 대해 주도권을 지닌 주체가 된 것입니다.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체의 선험적 지위를 선포하는 이 구도는 포괄주의의 배경이 됩니다. 당연하게도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이 핵심적인 주장이 됩니다.    
<종교신학>을 말하는데 왜 이리 복잡하게 이야기하느냐고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유형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그 관계유형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대강이라도 훑어야 그 취지와 한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간 관계 유형의 배경에 작동하고 있는 사유방식과 그 원리들을 파악해야만 오늘날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각 유형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이로써 넘어설 길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대목을 우리가 심각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데 이유인즉, 우리의 일상생활은 사실상 꽤 ‘근대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살필 것도 없이 우리는 우리가 중심이 되고 우리를 둘러싼 주변을 사용하여 먹고 싸고 자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의 모든 죽음을 슬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특정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합니다. 어떤 죽음은 찢어지는 아픔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지만, 또 다른 어떤 죽음은 설령 눈앞에서 본다 하더라도 애처롭기는 하지만 그만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망자의 죽음이 나 안에서 죽음으로 읽혀져야만 우리는 슬픔을 느낍니다. 나 안에 그가 어떤 식으로든지 자리 잡고 있지 않다면 나는 슬퍼지지 않습니다. 내 안에 그가 얼마나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 슬픔의 정도는 달라집니다. 나 안에 있는 그의 죽음은, 달리 보면 그 안에 있는 ‘나’의 죽음입니다. 어떻게 보아도 나의 죽음입니다. 내 안에 그가 전부라면 나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나’ 안에 있는 그이지, 그로서의 그가 아닙니다. ‘자기’화된 타자입니다. 결국 자-타 관계가 아니라 주-객 관계입니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주체가 주체 안에 있는 대상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슬픔에서도 주체는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대상화’라고 말하는데 정직하게 본다면 ‘대상의 주체화’입니다. 그래서 ‘대상화’라는 말은 오도이고 기만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이런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사실 이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영역으로 가게 되면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합니다. 엄연히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아니라고 앙탈을 부립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자칫 썩은 동아줄을 붙잡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고중세적 그림, 즉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으로 복귀합니다.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부지런히 넘나드는 것이 그리스도교인인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태입니다. 신은 내가 주물럭거리는 이미지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분이라고, 그 자체로 자존적이고 자족적인 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까요?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을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세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앎과 믿음의 주체로서 나름대로의 틀과 꼴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 시대입니다. 주체이지만 동시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라는 것이 근세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위에서 대상화란 사실 객체의 주체화라고 했습니다. 실상이 폭로된 것이지요. 주도권이 주체에게만 부여되는 일방성 때문에 벌어진 왜곡이라는 점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말한 객체가, 다름이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쌍방 간의 대등한 관계를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으로 우리 시대인 현대가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바로 대상(對象)으로부터 상대(相對)로 전환하는 현대의 지론이 나옵니다. 대상은 ‘마주하여 잡아낸 모양’이니 주체 안에 담기는 꼴이지만, 상대는 ‘서로 마주함’을 뜻한다면 주체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 타자가 다름으로 다가올 가능성에 대해 열어놓고 만나는 것입니다. 타자가 너로 다가오니 나와 만나 주고받는 것입니다. 아여동격적 대화주의(mutual dialogicalism)라고 합니다. 상대들 사이의 긴장을 싸안은 상호관계를 기본구도로 하니 다원주의의 배경이 됩니다. 이제 상대는, 마르틴 부버의 말을 빌리자면, ‘너,’ 즉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너’입니다. 이 상대, 즉, 타자는 나에게 우호적일 수도 있지만, 적대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합니다.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삶의 일상은 이렇게 생겨먹었습니다. 죽음과 얽힌 삶이기에 사실 이렇게 살아갑니다.  
상대에 대한 이러한 통찰, 이른바 타자 담론은 오늘날 신관에도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했습니다. 루돌프 오토에 의하면 신의 거룩함은 양면을 지닙니다. 우리는 이 신의 거룩함을 사모하며, 그래서 이 거룩함으로 이끌려 들어갑니다. 이끌림의 신비, 이끌림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끌림과 동시에 두려움 또한 있습니다. 이끌림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성질이 동시에 엮어져 있는 것이 ‘거룩함’(Das Heilige)입니다. 이게 신의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체험의 양면적인 모습입니다. 살상은 다면적이겠지만 굳이 추린다면 그렇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인류의 문화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이 원초적 체험의 양면성을 길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두려움은 줄이고 이끌림은 늘이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게 ‘대상화’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신의 모습에 대해 인간이 지나친 아전인수를 벌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로 마주하는 것’을 가리키는 ‘상대’가 이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이제 서로 마주하면서 저쪽이 무엇을 할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 ‘나’는 무장해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달리 무장할 수도 없습니다. 다원주의의 핵심적 주장이라 할 ‘신의 절대성’은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열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함을 이끌림 쪽으로만 길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만치 않은 두려움을 외면하고자 수많은 아전인수의 이야기들이 종교를 장식했지만 이제는 모르는 타자의 다름과 마주함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대’의 뜻입니다. ‘절대’라는 것이 ‘마주하기를 끊는다는 것’인데 ‘상대’란 마주할 수 없는 절대가 우리 인간과 마주하는 길입니다. 절대가 상대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의 뜻이겠지요. 그리고 그 은총 덕분에 우리도 마주할 수 없는 절대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상대’는 ‘상대주의’와는 전혀 다릅니다. 아니 심지어 반대이기까지 합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것입니다. 일단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상대주의’라고 마구 치부하는 것이 ‘상대’가 가진 이렇게 깊은 뜻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말하고자 합니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

초점

자체

대상

상대

관계구도

실체주의

자아론적 선험주의

아여동격적 대화주의

관계방식

객관

주관

상호

핵심주장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스도교의 우월성

신의 절대성

이 대목에서 위에서 읊었던 종교간 관계유형의 논리와 배경에 대해 다소 도식적이지만 위와 같이 정리해보았습니다. 물론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더 나아가야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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