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6 ‘자기’에 대해 한 마디 더!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Aug 06, 2015 07:52 AM KST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자기에 대한 이야기에 미련이 좀 남아 있습니다. 아니 사실 이건 미련이기보다 노파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마디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그리 하겠습니다. 
앞서 타자를 배제한다는 배타주의는 배제하려는 타자가 자기를 이루고 있으니 자기모순이라고 했습니다. 타자를 포함한다는 포괄주의는 타자에 대한 우월을 전제하니 서로 우열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타자와 함께 한다는 다원주의도 자기가 그렇게도 타자와 다르기만 한 별개라는 착각을 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이제 같은 이야기를 반대 방향에서 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려는 것은 이것이 바로 다종교상황에서 겪는 문제의 핵심적인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거기 그 무엇인가가 그렇게 있고 있는 그대로 알려진다고 생각하는 틀에서는 모두가 자기입니다. 여기에 타자는 없습니다. 그대로와 다른 것은 그대로가 아니니 틀린 것입니다. 틀린 다름이 있기는 하지만 틀렸으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잘라내어야 합니다. 다름은 틀림이니 배제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배타주의입니다. 이렇게 배타주의는 거기 그렇게 있음이 자기에게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입장이지요. 남들에게도 그대로 드러나 있으면 자기와 같은 것이니 남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이가?’에 해당하지요. 그렇지만 자기와 같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대로가 무너지면 있음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연결고리의 뿌리는 물론 자기입니다. 그대로나 진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소중합니다. 확고한 신념이 주요한 특성인데 이면에는 독단이 발동할 가능성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배경이 된 서구정신문화사에서 본다면 고대와 중세 시대의 사유방식에 해당합니다. 철학적으로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이고 종교적으로는 신중심주의적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가 아는 대로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틀이 있습니다. 이 틀에서는 타자가 있기는 있는데 자기가 아는 대로 있는 타자입니다. 자기의 앎에 타자를 집어넣고 자기 틀 안에서 새기면서 자기가 아는 대로의 타자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달리 말하니 타자를 포함한다고 해서 포괄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포함된 타자는 자기화된 타자인지라 심지어 ‘변형된 자기’라고도 합니다. 이래서 결국 여기에도 ‘타자로서의 타자’는 없습니다. 서구정신문화사에는 근세의 사유방식에 해당합니다. 철학적으로는 인식론이 지배하고 종교적으로는 인간이 주체가 되고 중심이 되었던 시대입니다.  
위의 둘을 다시 보면 얽히는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앞의 것은 그것 그대로와 자기를 같다고 하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자기와 같음을 그것 그대로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마찬가지의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좀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앞의 것은 그런 줄로 착각한 것이고 뒤의 것은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드러난 틀입니다. 그러니 둘이 같고 결과가 마찬가지라기보다는 원래 자기가 보는 대로 이미 세상을 그려놓고는 그 세상이 거기 그렇게 그대로 있을 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알려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깨닫는데 꽤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현대에 와서의 일이니까요. 결국 이 두 방향은 서로 반대처럼 보였지만 하나였으니 사실 오랫동안 우리가 기만당해 왔던 것입니다. 
헌데 이런 깨달음을 나누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힘센 자기에 의해 잘려져 나갔던 힘없는 타자들이 다시 밀고 들어오게 되었고, 높은 자기 안에 끌려들어갔던 낮은 타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타자들이 자기를 뒤흔들었습니다. 한껏 흔들리는 과정에서 자기가 홀연히 타자와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자기 안에 타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기란 무수한 타자들의 들고나는 ‘흐물거림’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면서 자기-타자의 관계에 일대 혁명적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혁명도 그렇고 전환도 그렇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시대정서가 종래의 틀에 익숙한 대중에게 혼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혼란을 그저 부정적으로만 보고 만다면 자기이지도 않은 자기를 붙잡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혼란은 겪을 수밖에 없고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외면할 수 없는, 실상은 사실 자기동일성의 전통에 비추자면 엄청난 충격이요 본능적으로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엄연한 실상입니다. 아니 모양이 아니라 움직임입니다. 하니 이건 어느 순간에도 말끔하게 정리될 수 없는 열린 곡선이요 점들의 불연속적 연속입니다. 앞의 두 입장에서의 자기가 모두 깔끔하게 닫힌 폐곡선으로 그려질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지요. 이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라는 시대의 정서요 분위기이며 또한 절실한 요청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서구정신문화사에서도 자기-타자 관계에 대한 적절한 길에 대한 진지한 실험의 역사가 전개되어 왔다고 평가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종교 관계구성유형도 그만한 논리적 근거 뿐 아니라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나이테의 궤적을 지니고 있는 나무동아리처럼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고 작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양하고 상충하는 입장들이 여전히 혼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결국 말하고 싶은 핵심은 자기가 타자와 어떤 관계를 엮어내는가가 각 시대정신의 핵심적인 골격을 이루어왔고, 이것이 종교 관계구성에도 그래도 적용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그리고 ‘자기라는 인간’은 결정적으로 깔려있고 튀어나왔으며 휘졌고 다니다가 급기야 날아오르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추락하듯 땅으로, 삶의 현실로 돌아오면서 서로 뒤섞이고 흩뿌려진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그래서 아무리 진하게 되돌아 살펴도 다 살필 수 없습니다. 허나 우리의 다음 이야기를 위해서 자기에 대한 성찰을 이 정도에서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종교에 앞서, 다종교세계에 앞서, ‘자기라는 인간’에 대해 되새기는 일을 좀 더 진하게 나누고자 해서 이 대목에서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저의 책에서 일부를 가져오려고 합니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이미 출간한 책들의 몇 군데에서 다루긴 했습니다만 여기서는 최근에 펴낸 『묻지마 믿음 그리고 물음』이라는 책에서 일부(166-182쪽에서 부분적으로)를 가져오겠습니다. 
앞서 자기 비움을 간단히 언급했지만 이에 대한 예수의 말씀도 ‘자기’에 집중하고 있음을 주목하기를 제안합니다. 수난예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자기’에 주목해 보십시오. 물론 ‘자기’라는 표현은 ‘타자’와 쌍을 이룹니다. 그런데 ‘자기’는 ‘타자’와 대상적이거나 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과 상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글에서는 그저 서로 음절의 위치만 바꾸었지만 한자로 새기면 엄청나게 대조적인 차이를 살필 수 있습니다. 먼저 대상(對象)이란 ‘마주하여 잡아낸 모양’인데, 마주하여 잡아내는 것도 주체가 하는 일이고, 그 모양도 주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 시각행위가 잡아내서 맺힌 상은 우리의 망막 안에 자리 잡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것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결국 대상은 주체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相對)는 ‘서로 마주함’을 가리킵니다. 서로 다른 주체들이 만나서 마주하는 것입니다. 한 주체의 일방적인 손아귀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긴장을 서로 싸안은, 불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다른 주체들 사이의 만남입니다. 이래서 사실 진정한 상대는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다보니 자기는 자동적으로, 본능적으로, 그리고 욕망이 시키는 대로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보는 주체의 방식에 지배됩니다. 그리고 자기란 대체로 이런 모습의 주체입니다. 둘러싼 모든 것을 주체인 자기를 중심으로 대상화합니다. 타자를 타자로 두지 않고 자기화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위에서 말씀드렸던 세 개의 입장들 중 결과적으로 같은 앞의 두 개가 공히 해당합니다. 이게 우리네의 사는 모습이고 믿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아니라고 빠져나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준엄하게 ‘자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온갖 범주와 차원, 종류를 기준으로 하는 분류가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경제적으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회적으로 계층의 구별 등등 무수한 분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분류들에 앞서 가장 먼저 자리 잡고 있는 분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와 타자’라는 분류입니다. 온갖 분류들이라는 것이 그저 하고 마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 마땅한 주장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그 주장의 뿌리에는 ‘자기’가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이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가진 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면 세상을 그러한 관점으로 보고 살아갑니다. ‘못 가진 자’와 동일시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자기를 어느 부류와 동일시하는가에 따라 살아가는 이치와 표방하는 진리는 각양각색입니다. 아니 아예 세계관이 다릅니다. 그러니 결국 ‘자기와 타자’는 모든 분류의 전제일 뿐 아니라 또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기’라는 것이 우리 삶에서 결정적인 기준이고 근거입니다. 
결국 ‘자기와 타자’의 관계는 ‘같음과 다름’의 대립이고 나아가 ‘옳음과 그름’이라는 판단의 기준입니다. ‘자기’와 같으면 ‘옳음’이고 ‘자기’와 다르면 ‘그름’ 또는 ‘틀림’입니다. 타자는 그냥 다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틀림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처럼 우선은 매우 자기중심적입니다.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을 같은 뜻으로 무의식적으로 뒤바꾸어 쓰고 있는 일상용법도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관건입니다. 자기 비움이라는 것이 그래서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수양 좀 한다고, 도 좀 닦는다고 쉬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은총을 값싸게 끌어들인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지요. 예수께서도 바로 이것을 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볼까요?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사랑이라는 것을 살펴보면 이보다 더욱 극적으로 ‘자기중심성’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걸 살펴보면 ‘자기’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게 우리 삶의 뿌리에 깔려 있다는 것을 소스라치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는 경우, 그 부모들은 과연 누구를,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요? 부모에게 자식은 자기의 확장이고 분신입니다. 결국 부모에게 자식은 자기 자신입니다.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은 성자라면 몰라도 범인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의지나 노력으로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세포가 그렇게 시키고 혈관이, 호르몬이 그렇게 시킵니다. 그러니 부모의 자식 사랑에서도 타자는 없습니다. 이걸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겸손하게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연인들의 경우를 봅시다. 이 경우는 타자의 만남이니 좀 다른 모습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연인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경우, 그들은 과연 누구를, 아니 무엇을 사랑하는가요?  선남선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선남과 그 선녀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왜 하필이면, 다른 선남이 아니고 그 선남이며, 다른 선녀가 아니고 그 선녀일까요? 플라톤의 에로스 분석은 좋은 설명을 보여줍니다. 제우스신이 남녀 간의 완전한 사랑을 질투하여 하트모양을 일일이 쪼개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후 찢어진 모든 반쪽은 온전한 하트를 다시 이루고자 나머지 반쪽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불이 반짝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만나 온전한 하트를 다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다른 반쪽은 어떻게 선택하고 선택되는가요? 물론 자기라는 반쪽과 꼭 맞는 다른 반쪽은 이미 자기라는 반쪽의 찢어진 모습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선택됩니다. 무수한 타자들 중에 자기에게 맞는 반쪽이라고 선택하는 기준은 자기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 만남이 다 성공은 아닙니다. 콩깍지가 잘 못 씌워진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여튼 타자 속에서 자기를 발견함으로써 그 타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결국 타자 속에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하필 그 선남에 그 선녀이어야 할, 죽고 못 살 이유가 있을까요? 이래서 타자들의 만남으로 시작하는 연인 사랑에서도 타자는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하는 사랑에도 타자는 없습니다. 자기라는 것이 이토록 뿌리 깊습니다. 아니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자기가 이렇다는 것을 먼저 절실하게 깨닫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칭찬 받았었던 베드로가 바로 그러한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더라도 앞의 고백과 뒤의 부인이라는 정반대의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꿰뚫고 흘러가는 것은 ‘자기’입니다. 자기에게 좋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한 것이고 자기에게 해가 될 것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부인한 것이겠지요. 그를 탓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성서에 여과 없이 기록되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를 돌아보게 해 주는 뜻을 지닌 것으로도 새겨야 하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타자를 타자로 만나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앞서 ‘대상’과 대조적으로 견주었던 ‘상대’에서 그 대답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자를 ‘대상’으로 주무르던 거만한 주체로부터 ‘상대’로 만나는 겸손한 주체로서의 자기로 전환하는 것 말입니다. 이제 근대인들이 꿈꾸었던 중심적인 자기는 타자를 자기의 눈으로 볼 뿐 아니라 나아가 타자를 자기로 둔갑시키는 ‘거만한 주체’였다면, 우리 시대인 현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이미 우리의 자기가 타자와 뒤섞임으로써만 엮여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겸손해져버린 주체’입니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겸손해져버린 줄 모르는 ‘자기라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특히 종교 안에서 진리와 신앙의 이름으로 더욱 그러합니다. 허나 근대 관념론자들이 세상을 자아와 비아로 나누고 절대정신의 분유체로서 인간을 그려내고자 했다면, 현대 실존철학자들이 인간의 삶이 ‘내던져지고’ ‘운명 지워졌으며’ ‘저주 받았다’고 절규한 것은 다 이렇게 ‘겸손해져 버린 주체’에 대한 그림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렇게 타자와 얽힌 자기들이 서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타자 안에서 자기를 발견할 뿐 아니라 이와 꼭 같이 자기 안에서 타자를 발견함으로써 마주하고 나누며 뒤섞이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같아질 수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그걸 허락하지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삶에서 이런 삶으로 믿음이 엮어지는 것이고 깨달음이 얽히는 것이라면 종교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라는 인간들이 마구 같아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종교들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여기서 자기가 속해 있고 그 안에서 밖을 넘나들며 살고 있는 종교라는 것도 그 뿌리에서 자기라는 인간의 꼴과 얼에 얽혀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데에서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의 자리에 대한 자기의 비/인식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여 종교관계 유형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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