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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의 길위의신학] 삭개오의 후일담

입력 Jun 17, 2015 01:22 PM KST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예수께서 세리장이며 부자였던 삭개오에게 던진 이 말은 좀 성급한 게 아니었을까. 그가 예수의 집중된 관심에 감읍한 나머지 자기 집에 초청하여 환대 좀 하였다기로서니 그토록 엄중한 '구원'을 그에게 그렇게 냉큼 선포하시다니...그 미래의 행로와 후일담을 좀더 숙고했더라면 아마 판단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그대의 행실을 보니 구원의 길이 멀지 않도다'라고 좀 신중하게 말을 달리 표현하거나 삭개오가 공약한 말이 열매를 맺는지 뜸을 들이면서 살핀 연후에 선포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삭개오가 실제로 자기가 한 말 그대로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타인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을 다 꼼꼼히 기억해내어 네 갑절이나 갚았는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 수 없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달라지며 변덕을 부리는 것이 인간의 생리이다. 특히 부자가 자기 재산을 놓고 선심을 쓸 것처럼 공언한 뒤 이후 흐지부지하게 되는 사례는 얼마나 잦은가. (우리 나라 최근의 사례만 훑어봐도 삼성재벌의 주인이 공약한 수천 억원의 사회 환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산 기부 약속, 박근혜 대통령이 전두환에게 받은 불법자금 7억원 반환 약속 등등)
예수는 삭개오에게 그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다른 이들에게 했을 법한 제자도의 요청을 하지 않았다. 삭개오는 그 뒤로도 세리장으로 살아가면서 여전히 부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를 만나 회개한 그 마음의 진정성을 살려주더라도 1세기 로마의 식민체제에서 세리장으로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체계 내적 족쇄에서 그가 마냥 자유로웠을 리 만무하다. 시스템이 빚어내는 이른바 '구조적 범죄'의 사슬에 착하게 변화된 그의 개인적 성품이나 예수와의 이전 약속이 어떤 대단한 파괴력을 발휘했을지 냉큼 상큼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한 후일담의 구도를 충분히 파악하고도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그처럼 화끈하게 구원을 선포했다면 그와 제자들을 환대한 것에 대한 외교적인 답례의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일까. 아니면 한 술 더 떠 삭개오가 예수와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추가로 큰 손의 후원자로 나서서 거금의 기부를 하도록 유도하는 선제적 미끼였을 거라고 의심한다면 지나치게 불경스러울까.
이런저런 의혹의 안개숲을 지나 예수의 이 선포에 깃든 순정한 의도를 십분 살려낸다면, 그것은 아마도 개인별로, 사안별로 다양한 인간사의 지형 속에서 예수께서 드러낸 담백한 낙관주의의 발로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은 인간의 결핍을 속속들이 파헤쳐 따지고 대들면서 에누리 없이 냉철하게 처단하기보다 미완료의 희망을 걸고 에누리 있게 한 인간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너그러운 여유와 같은 것이었을 게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유한 자가 화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또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게 쉬울 거라고 선포하면서도 부자 삭개오를 대하던 예수의 태도는 좀 유별났다. 자기의 재산을 뚝 잘라 착한 일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여전히 부자였을 삭개오를 향해 아브라함의 너른 품을 들이대며 구원씩이나 선포한 예수의 곡진기정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좀 특이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삭개오의 후일담에 대한 추론과 묵상이 21세기의 맥락에서 적실한 효험을 산출한다면 신학자 본회퍼 같은 회개한 부르조아를 양산하는 메시지로서 긴요할 수 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교훈이 있다면 인간의 내면과 역설적인 삶의 정황들, 나아가 인간 사회의 다층적인 지형에 대한 주름 잡힌 안목을 갖추고 탄력적인 관점으로 현실에 대응하면서 원근법의 조율을 할 줄 아는 자세이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흑과 백, 빛과 어둠이 화끈하게 갈리는 세계, 또 선과 악의 냉엄한 배타적 진영을 포착할 줄 아는 자는 제 생의 에너지를 집중하여 강렬하게 투쟁할 줄 아는 자이다. 반면 그 스펙트럼의 반경을 확장하여 흑과 백의 사이에서 명멸하는 수많은 유채색의 아이러니 공간을 살피고, 선과 악의 틈새로 애매모호한 삶의 실존을 탐지할 줄 아는 자는 그 집중의 에누리를 챙길 줄 아는 자, 곧 그 투쟁의 잔해 위에 부서지는 자신의 몰골을 들여다보며 애통할 줄 아는 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복음서의 예수는 그 언행으로 이 두 가지 현장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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