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2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나님의 관계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May 26, 2015 09:44 AM KST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서로 다른 여러 종교들이 함께 있는 오늘날의 모습을 ‘다종교상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해 살피기에 앞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뼈대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핵심들을 추려본다면 교회, 그리스도교, 성서, 하나님, 이렇게 열거해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더 많은 핵심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들이 서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뼈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동의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넷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넷이 모두 같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미 차원이 다르니 액면 그대로 무조건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적어도 소유 또는 귀속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고 보는 가장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서 그 수용과 해석의 권한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교에 속하며 그러한 그리스도교는 현실에서 교회로 결집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 넷은 등호(=)를 써서 ‘교회=그리스도교=성경=하나님’이라고 정리됩니다. 순서를 정반대로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를 구성하는 요체로서 전부이며 그리스도교는 성경을 경전으로 채택하고 전수하는 권한과 의무를 지닌 독자적 종교이고 성경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알려주는 유일한 계시 또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돈독한 신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선 교회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부터 살펴봅시다. 과연 교회와 그리스도교가 같은 것인가요? 교회는 종교공동체이지만 종교가 공동체에만 귀속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신앙을 따르는 소위 ‘가나안’ 신자들이 점차로 늘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종교는 공동체보다는 훨씬 더 큰 범위로 신념체계를 포함하여 사고방식에서 생활양식에 이르는 문화적 차원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종교의 본질에 대한 변질이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구현체로서의 종교가 인간의 일상적 차원에 이르지 못하고 고유성을 빌미로 무슨 특수한 집단이념이나 밀의적인 결집체로 머무른다면 이것이야말로 종교의 본뜻은 아닐 것입니다. 본질도 아닌 것에 대한 본질주의적 고수가 오히려 종교의 쇠퇴를 더욱 부추겨왔다면 이제는 스스로의 자폐적 본질주의라는 자가당착의 엄청난 착각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자기만의 신’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것처럼, 오늘날 근대적인 의미와 형태의 종교는 쇠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히려 개인 단위에서 종교성 고취에 대한 수요가 점증한다는 진단은 교회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결국 관건은 종교적 차원에서도 개인주의가 부각됨으로써 공동체성이 도전받고 있는 상황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공동체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할 일이지 그리스도교를 교회와 그저 동일시하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교와 성경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물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전수와 해석, 적용의 권한과 의무를 내세워 성경을 그리스도교의 전유물로 주장한다면 이는 오히려 성경을 그리스도교에 가두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오류일까요? 바로 대답하기보다도 거꾸로 묻겠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향한 것이라면 어떻게 성경이 온 세상의 일부에 불과한 그리스도교만의 것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는 온 세상, 아니 백번 양보해서 적어도 이 지구를 위한, 그리고 지구를 향한 것으로 새겨야 합니다. 그 범위를 지구로 한정하는 것은 다소 조심스럽지만 지구 바깥 세계에 혹 있을 수도 있는 생명체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성서에 근거해서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지구버전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셨지만 물론 전부를 알려주신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전부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는 채로 남아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도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부로 우주로 나갈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이 지구 위에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부분이 엄청 큰 상황에서 성서를 그리스도교권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적어도 지구를 향해 계시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가 지구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일부일 따름이니 따라서 성서는 그리스도교보다는 훨씬 큰 것으로 새겨야 합니다. 성서를 그리스도교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선물로서의 마땅한 위상을 정립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선 성경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간주하는 근본주의적 문자주의가 있습니다. 성경을 정말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성경에 가두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 입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성경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자기가 읽고 있는 성경 구절을 기준으로 재단하게 될 소지가 너무도 큽니다. 물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가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축자영감설은 에누리 없이 신성모독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조금은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 말조차도 문자 그대로 새겨서는 오히려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그런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말씀 또는 계시라고 할 때 그 뜻은 무엇인가요? 성서가 스스로 우리에게 그 뜻을 드러내줍니다.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성서가 직접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는 말입니다. 예를 좀 들어보겠습니다. 성서를 펴면 제일 처음 나오는 창세기를 봅시다. 1장과 2장에 서로 매우 다른 두 가지 창조기사가 나옵니다. 굳이 문서설을 들먹이지 않고 그냥 한글성서를 읽어도 충분합니다. 앞장에서는 하늘과 땅, 빛, 물과 뭍 등의 순서로 창조가 시작되어 인간창조에 이릅니다. 물도 넘치도록 풍성한 옥토가 배경입니다. 뒷장은 정반대로 사람이 제일 먼저 창조되고 그 배경도 건조한 사막으로 추정됩니다. 만일 성서의 전승자료들을 전문가들이 모여 깔끔하게 체계적으로 편집했다면 둘 중 하나만 수록했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돌하는 두 개의 창조기사가 제일 앞에 한 데 묶여 경전으로 수록되었습니다. 편집기술로 보면 어설퍼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축자영감설의 입장에서 보면 아예 시작부터 읽을 수도 없으니 더욱 난감합니다. 한 장은 찢어버려야 합니다. 결국 어떤 것이 맞는 것인가라는 문제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신화이니 따질 일이 아니라고 하는 또 다른 입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왜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는가요? 그런데 바로 이것이 엄청난 길잡이라고 봅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말씀 또는 계시라는 것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내리쏟아붇고 받는 쪽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상호관계 안에서의 대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 충돌하는 기사들의 동시수록이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계시라는 것이 일방적 주입이 아니라 서로 만나 주고받는 상호적 대화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서는 그러한 사건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과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의 고백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직접적 보도라기보다는 인간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고백록이며 이를 뼈대로 체험한 사건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러니 창조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처한 배경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고 고백되며 성찰될 수밖에 없으니 여러 자료들이 나오게 됩니다. 서로 충돌하는 내용을 담은 창조기사들이 창세기의 제일 앞부분을 구성하고 있으니 성서는 시작부터 어떻게 엮여졌는가에 대해 성서가 스스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게 오히려 성서의 위대함입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과 교통하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다만 성서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과의 만남 사건에서 듣고 고백하며 체험한 것들에 대한 인간적 진술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성서의 원천이시지만 성서에 모두 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서에 갇힐 수는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성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신 분입니다. 이 말은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크신 분’이라고 했지만 크기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우주의 크기를 감 잡고 있는가요? 우주는 고사하고 지구의 크기에 대해 어떤 느낌이라도 가질 수 있는가요? 물론 물리적 차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이 지구를 향해 보여주신 모습이요 지구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이 만나는 사건에 대한 기록이니 지구버전일 뿐인 성서에 지금도 우주를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제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성경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면서 하나님을 성경 안에 가두는 신성모독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인정하기 어렵다면 한 말씀 더 드립니다. 바로 앞서도 말했지만 이 대목에서 반복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주셨지만 물론 전부를 알려주신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전부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는 채로 남아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도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단계적으로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아주 작은 앎일 뿐입니다. 모름이 더욱 크고 많지만 그래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른 바 ‘무지(無知)의 지(智)’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는 얼마나 모르는지를 모릅니다. ‘무지(無知)의 무지(無智)’입니다. 결국 우리의 앎은 이런 차원 안에서의 아주 조그마한 앎입니다. 성서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앎은 이런 무지의 무지 안에서, 무지의 지 위에 얹혀 있는, 아주 조그마한 앎과 믿음일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면 산을 옮긴다’고 하셨는데 산이 이리저리 옮겨지는 일이 흔치 않은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하물며 그 믿음보다 작을 앎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앎으로 하나님을 마구 가늠합니다. 이런 가늠이 어디까지 가는지 살피려고 멀리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가관입니다.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사례를 살피면서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결국 관계는 ‘교회<기독교<성경<-∞-하나님’으로 정리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못마땅하게 여겨진다면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 또는 기독교, 또는 성경을 붙들고 늘어지는 환원주의에 사로 잡혀 있다고 스스로를 진단해야 합니다. 교회주의가 그렇고 기독교주의가 그러하며 성경주의가 그러합니다. 교회사가 증명하는 바이니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자기에게서 역사가 시작되는 줄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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