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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선] ‘선지자’의 회개

입력 Feb 11, 2015 07:51 AM KST
▲SBS가 방영한 거짓 전도사 홍혜선 관련 영상. ⓒ출처=SBS 해당 화면 캡쳐 

2월7일(토) SBS는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의 “노아의 방주를 탄 사람들” 편을 통해 홍혜선 씨에 대한 심층취재 내용을 보도했다. 홍씨는 전도사의 신분으로 ‘12월 한국전쟁설’을 예언하며 유포함으로써 다수의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국외로 ‘피난’을 가게 만들었다. 이 ‘예언’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 여파는 그의 말을 믿고 ‘피난’ 간 사람들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정, 한국교회,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신앙의 지형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한국기독교인의 신앙관 속에 공공성에 대한 인식의 결핍, 불안 조성에 쉽게 동조하는 심리적 취약성, 교회의 무책임성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결국 그들의 신앙이 허위의식일 수 있음을 폭로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선지자’ 홍씨의 해프닝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현주소를 일별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 해프닝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허위의식으로 전락하게 되는 지점을 점검해보자. 우선 성도들의 상황에서 그 지점은, 가족을 위해서조차 자기희생을 결심하지 못함, 이웃과 동고동락하려는 공동체성의 부재,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현실을 도피함 등으로 드러난다. 보도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를 타고 ‘피난’ 간 사람들은 가족과 동반한 경우보다 혼자 떠난 사람들이 많고 한국사회의 안전 및 안보불감증을 비판하면서 전쟁예언이 실현되지 않은 지금조차도 영적 전쟁 운운하며 ‘피난’지로부터 귀국을 미루고 있다. 이런 지점에는 어디에도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면한 고난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시련으로서 감내할 자세를 새롭게 할 것이고, 설혹 전쟁이 났다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먼저 피난을 가도록 도울 것이며,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있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끼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해프닝에서는 ‘피난’ 간 사람들만을 비판할 수는 없다. 누군들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보호 본능을 발동하지 않겠는가? 이 상황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두 번째 대상은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게 되어 있는(이사야53:6) 성도들이 현혹되도록 방치하거나 권유한 교회들이다. 무엇보다 교회가 정확한 복음 이해 위에 기초하지 못하면, 이처럼 위기나 고난이 닥칠 때 성도들의 신앙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게 된다. 복음은 자기십자가를 지고 가는 기쁨을 알려주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화평을 끼치기를 즐겨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복음의 정신을 교회가 가르치고 솔선하여 모범을 보이면서 성도들을 훈련시켜야만 위기가 닥쳤을 때 ‘연습’한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홍씨의 집회를 교회에 초치하여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고자 한 교회로서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결과로 인해 곤욕을 치를 것이다. 아마 성도들의 요청에 의해서 그 집회를 초치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그것은 소위 ‘소비자중심주의’의 관점에 따른 조처이다. 복음은 성도들에게 엄정하게 가르칠 내용이지 성도들의 요구대로 제시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성도들의 요구에 따라 복음의 존립이 결정된다면 그것은 소비자중심주의적 발상이다. 그 뒤에 맘몬의 조종이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노아의 방주”를 타고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나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한 교회는 돌아와도 된다. 전쟁이 났더라면 고통을 받고 있을 가족에게로, 당신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공동체에게로, 두려움과 불안에 떨었을 당신을 따뜻하게 안아주실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왜냐하면 이제 그 ‘선지자’가 양떼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 그 ‘선지자’도 돌아와도 된다. 다만, 그 때는 이런 마음을 갖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저도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인데 이것이 저의 생각이었던 것인지 광명한 천사의 모습을 띤 누군가의 음성이었는지를 분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경솔함으로 혼란을 겪은 분들께 죄송합니다. ‘똥기저귀’ 발언은 제가 져야할 책임을 피해보고자 엉겁결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저를 더 분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회개는 한국기독교의 현주소에 희망의 밀알이 될 수 있다. 회개는 부활의 잠재력을 품고 있으며 그를 따랐던 사람들의 회개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암암리에 퍼트린 왜곡된 하나님의 모습을 교정할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정의로운 심판을 하시기는 하지만 공포를 조장하여 모종의 결단을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바울도 말했듯이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7-8)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는 ‘선지자’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참 선지자(“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며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도 아니고, 오직 복음 때문에 고난을 감내하는 사람이다(마태11:7-9). 교회는 이것을 가르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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