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데스크시선] 기독교 소비주의

입력 Feb 02, 2015 08:36 AM KST
피터 코리건은 『소비의 사회학』에서 백화점과 성당의 유사성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백화점은 소비주의(consumerism) 사원에서 예배를 보도록 유혹한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소비욕망의 거대한 분출구인 백화점이 건물구성에서부터 조명에 이르기까지 성당을 연상하게 연출함으로써 소비 자체를 신성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호화판 고급 백화점의 아치 형 출입구나 거대한 샹들리에 그리고 높은 천장의 원형 공간 등은 그곳이 쇼핑장소라기보다는 예배처소로 느껴지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처럼 백화점에서 성당의 분위기가 모방되고 있는 반면, 오늘날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몇몇 대형교회들에서 도리어 백화점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외형적인 유사성은 물론, 백화점이 실제구매력과는 상관없이 소비욕망의 충족이라는 허위의식을 고객들에게 심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성도들에게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써 거룩한 제의의 일부가 된 듯한 허위의식을 갖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화려하고 밝고 거창한 예배당,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교회 건물 각 층의 공간들, 카페와 서점 등의 편의시설들은 교회가 마치 신성함의 욕망을 소비하기 위해 신앙의 ‘상품들’을 구매하기 위한 공간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백화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구입함으로써 소비욕망이 충족되면 마치 신성한 제의에 참여한 듯한 충족감을 가지듯이, 백화점 분위기의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진행하는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의 실천과는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만족감에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준급 성가대와 오케스트라가 곁들여진 예배와 성경공부, 가정사역, 심리치유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 속에서는 ‘은혜’가 소통되어서 그곳에 있으면 온갖 일상적인 번민들을 잊고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것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효과와는 달리 기독교 소비주의의 현장일 뿐이다. 
▲웅장함을 보여주는 서초동 S교회의 예배당 전경. 상기 사진은 이 기사와 무관합니다. ⓒ베리타스 DB

기독교 소비주의라 칭하는 이유는, 소비주의라는 용어가 소비를 통해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세계관을 지칭하듯이(이 글에서는 소비주의를 ‘소비자보호운동’의 개념으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신성하게 보이는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구원의 대열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식의 사고를 만연하게 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예배와 성경공부, 가정사역, 심리치유 등은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과업인 것이 분명하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지침을 제공하기는 한다. 하지만, 백화점에 가서 적절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물품을 구매하는 정도를 넘어 구매행위 자체가 신성함의 허위의식을 조장하게 되면 그 행위가 반복되고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 소비‘주의’(-ism)가 되듯이, 정작 구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매주 교회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신앙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신앙의 소비주의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17-22절에 나오는 한 부자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기독교 소비주의를 우려하고 계신다. 부자는 영생을 어떻게 얻을까 관심을 갖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고백하였으며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다.” 그는 오늘날 하나님의 계명을 일상 속에서 지키며 영적으로 은혜롭다는 프로그램들을 시간을 쪼개가면서 이수하는 신실한 성도를 닮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신실함, 즉 자기 만족적인 신앙의 소비주의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는 예수께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권고하신 데에서 알 수 있다. 그 부자가 “재물이 많은 고로 ...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버린 행위가 자기만족적 신앙의 약점을 그대로 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사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최고 계명인 이웃 사랑이 자신의 것을 온전히 내어주는 삶을 요구하며 그것이 영생을 얻는 길임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영생을 얻는 길은 신앙생활의 자기만족적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재물이 없어도 ... 기뻐하며 평안을 누리는’ 상황을 용납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거대한 성채, 철옹성 같은 교회의 공간 안에서 보호받으며 매주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거룩한 분위기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성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에 해당한다. 그것은 자기만족의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가 거룩한 분위기의 예배당과 수준 높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신앙의 소비주의에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특히, 가난한 자들이 들어갈 수조차 없고, 비판하는 자들을 사법적인 경로를 이용해 겁박하며, 가끔은 상식적인 사회법에도 무지한 채 사회를 계도하려고 시도하는 교회들이 그러지 않은지를. 물론, 이러한 교회들이 자신들의 비성경적인 행태를 가리기 위해 신앙의 소비주의라는 전술을 구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겠지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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