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기자수첩] 끝 모를 이-팔 갈등, 해법은 없는가?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되돌아가라

입력 Jul 14, 2014 08:25 AM KST
10대 청소년들의 참혹한 죽음으로 촉발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무력 충돌이 닷새째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고 이로 인해 피해자가 속출하는 중이다. CNN은 13일(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자가 160명에 이르렀다고 가자 지구 보건국의 통계를 인용해 보도했다. 더욱 심각한 점은 사상자 가운데 상당수가 민간인이고 아이들의 피해도 크다는 사실이다. UN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의 70%가 민간인이고 이 가운데 30%가 아이들이라고 한다. 
그간 이-팔 양측의 충돌은 일정한 패턴을 반복해 왔다. 먼저 우발적인 사고나 극단주의자의 테러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다. 그러면 즉각 보복공격이 가해진다. 그러면서 충돌은 전면전 양상으로 번지고,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적극 개입한다. 이후 국제사회의 권고로 갈등은 해소되고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이번 이-팔 무력 충돌 역시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는 양상이다. 벌써부터 미국과 UN 등 국제사회가 자제를 호소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번 충돌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사태의 발단이 10대 청소년의 참혹한 죽음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첫 번째 근거다. 먼저 지난 달 이스라엘 청소년 3명이 납치됐다 20일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러자 뒤이어 팔레스타인 청소년 1명이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희생된 팔레스타인 청소년은 부검 결과 산 채로 불에 태워진 것으로 드러났다. 범행 수법으로 보아 보복 살인극임이 너무나도 명백했다. 
이번 갈등이 지속될 것으로 보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이스라엘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번 기회를 통해 팔레스타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하마스를 무력화시킨다는 계획이다. 
사실 하마스는 줄곧 이스라엘의 표적이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선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아야 한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은 말년에 이스라엘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다. 아라파트의 타협 노선은 강경 세력의 반발을 샀다. 이런 분위기는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투쟁을 표방한 하마스의 세력 확장으로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부상을 못 마땅하게 여겼고, 이에 하마스의 지도부를 궤멸시킬 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 이스라엘은 2004년 하마스의 창시자 아흐메드 야신, 그리고 후계자 압델 아지즈 란티시 등을 차례로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하마스의 세 확장은 멈출 줄 몰랐다. 급기야 하마스는 2006년 2월 치러진 팔레스타인 자치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강경 투쟁노선으로 일관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이후 2006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친 무력 충돌을 비롯해 크고 작은 마찰을 빚어 왔다. 이스라엘이 이번 충돌에서 강경 기조를 굽히지 않는 주된 이유는 하마스와의 악연 때문이다. 
오슬로 협정, 이-팔 갈등 풀 열쇠? 
이-팔 갈등은 상호 국내정치적 요인과 국제정치의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해결의 실마리를 쉽게 찾기 힘들다. 그러나 해묵은 갈등을 해소해 보려는 시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이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시도를 꼽으라면 지난 1993년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 사이에 체결된 오슬로 협정이다. 
오슬로 협정은 이-팔 양측의 정치적 이해타산이 묘하게 맞아 떨어진 데 따른 산물이었다. 이스라엘은 1987년부터 시작된 팔레스타인의 반점령 투쟁, 이른바 인티파다(봉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 봉기로 시작했다가 장기화되자 PLO가 투쟁의 선봉을 자처했다. 그런 와중에 1991년 제1차 걸프전이 발발했다. 쿠웨이트를 무력 점령한 후세인은 국제사회의 압력에 맞서 이스라엘 문제를 쟁점화시켰다. 그는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해야 한다면 이스라엘 역시 점령지구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국제사회에 맞섰다. 그는 대담하게도 이스라엘에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해 국제사회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다행히 걸프전은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의 공조로 쉽게 끝났다. 
종전 이후 국제사회엔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킬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한편 야세르 아라파트는 정치적 위기에 빠졌다. 그는 걸프전 당시 거의 유일하게 이라크 편을 들었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는 물론 아랍권에서조차 따돌림을 당했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협상에서 탈출구를 모색했다. 이에 이-팔 양측은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비밀협상을 시작했고, 그 결과로 오슬로 협정을 탄생시켰다. 
이 협정에선 팔레스타인 자치와 선거, 과도기협정, 이스라엘군의 재배치와 철수, 예루살렘과 점령지의 최종 지위 협상, 유대인정착촌, 경제조항, 난민문제 등 이-팔 사이의 현안이 포괄적으로 다뤄졌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대목은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 합의와 ‘이스라엘-PLO의 상호 인정’이었다. 이 협정에 힘입어 PLO는 27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할 수 있었고 더욱 중요하게는 팔레스타인 자치 국가 건설을 꿈꿀 수도 있게 됐다. 이 협정은 또 이스라엘-요르단, 이스라엘-시리아 간 평화협정으로 발전해 중동평화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그러나 중동평화의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협정 이행을 둘러싸고 파열음이 났다.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출범,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등의 현안에서 이-팔 양측은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둘러싸고 양측 사이에 알력이 빚어졌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은 차츰 우경화로 이행했다. 특히 극우 유대인들 사이에서 ‘영토를 대가로 한 평화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협상의 주역이었던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1995년 극우 유대인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시몬 페레즈 외무장관이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단명했고, 정권은 극우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에게 넘어갔다. 
그러다가 1999년 에후드 바락이 집권하면서 다시 한 번 중동평화에 대한 희망의 생겼다. 바락은 라빈의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런 평가에 걸맞게 팔레스타인과 협상에 돌입했다. 그러나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고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이후 권력은 아리엘 샤론, 에후드 올머트, 베냐민 네타냐후 등 강경파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강경파들로부터 친이스라엘주의로 전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사후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권력의 한 축을 차지했다. 그 자신은 임종하기 직전까지 살해 위협에 시달리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사실 오슬로 협정은 중동평화의 종착점이 아닌 시작점에 불과했다. 이-팔 현안에 대해 상호간 원칙적인 선에서만 합의를 이뤘을 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출범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또 협약 이행을 둘러싸고 이-팔 양측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극단으로 치달았고, 이런 와중에 오슬로 협정은 사문화됐다. 
역사에서 ‘~했다면’하는 식의 가정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가까운 과거일수록 가정은 힘을 얻는다. 만약 오슬로 협정이 이행과정에서 있을지 모를 숱한 난관들을 극복하고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팔 갈등의 수위는 현저하게 낮아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그런 일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중동의 기상도는 여전히 안개속이다. 이-팔 갈등은 더더욱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중이다. 그러나 막힐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또 이-팔 양측은 돌아갈 이정표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오슬로 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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