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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영성순례기] 팜플로나의 낭만 까미노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 담임

입력 Jul 12, 2014 07:18 AM KST
까미노 데 산티아고(33)
 
▲팜플로나의 순례자 숙소 ‘헤수스 이 마리아’를 상징하는 조가비 문양 표지판 
▲빨래를 널어놓은 햇빛 가득한 팜플로나 순례자 숙소의 안마당 

탕.’ 요란한 폭죽소리가 아침 공기를 가르고 귀청을 뒤흔든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육중한 철문이 좌우로 열려진다. 리워야단 같은 콧김을 내뿜으며, 강인한 두 뿔을 좌우 날개 벌리듯이 내민 분노한 소들이 뛰어 나온다. 검은 녀석, 짙은 갈색, 얼룩진 것 등 그 기세가 심히 위협적인 황소들 십여 마리가 팜플로나의 골목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뜨거운 여름, 매년 7월 6일, 일주일간의 산 페르민 축제가 시작된다. 하얀 셔츠와 빨간 머플러를 목에 감은 차림으로 축제를 즐기려는 젊음들이 소 떼와 함께 뛴다. 황소들이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황소의 뿔을 피하려는 사람, 그 뿔을 잡아 보려는 사람, 그 괴이한 광경을 지켜보려고 발코니마다 매달린 사람들의 탄성과 환호성이 좁은 골목길 안에 가득하다.
팜플로나, 스페인을 사랑했던 비련의 작가,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 오른다’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발코니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때 갑자기 군중이 길거리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바싹 붙어서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거리를 지나 투우장 쪽으로 뛰어갔고, 그 뒤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빨리 달리고 있었고, 몇몇 뒤처진 사람들은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약간 간격을 두고 황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산토 도밍고 거리를 출발한 희한한 뜀박질은 시청광장 앞을 돌아설 때 절정에 이른다. 사람도 넘어지고 소도 넘어진다. 소에 밟혀 머리를 움켜쥔 젊은이, 소의 뿔에 옷이 걸려 질질 끌려가는 사람, 소뿔에 받히지 않으려고 벽을 올라타는 사람, ‘광란’이다. 광란도 이런 광란이 없다. 목숨을 내건 거친 달리기가 카스티요 광장 옆, 에스테페타 골목길을 빠져나가 헤밍웨이 거리를 끝으로 투우광장으로 진입하면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이 함성소리는 일주일간 매일 아침 반복된다. 그 길을 다 뛰어간 황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잔인한 죽음이다. 팜플로나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던 페르민 주교가 황소에 묶여 끌려 다니면서 피를 흘리고 마침내 순교하였다는 전설에서 이 축제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팜플로나의 산타마리아교회 
▲팜플로나의 시청사

이 여정을 나설 때부터 세빈이는 투우를 관람할 수 있는지 관심이 많았다. 스페인뿐만 아니라 세계 동물보호운동가들의 반대로 투우는 동물학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스페인 곳곳에서 투우가 폐지되고 있지만, 주요 도시에서는 아직도 투우를 계속하고 있다. 까미노 여정의 여러 곳에서 주말마다 펼쳐지는 투우에 대한 알림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 투우장은 죽음의 공간이다. 붉은 피가 낭자하고, 솟구치는 피와 무릎 꿇고 죽어가는 황소들을 바라보며 스페인 사람들은 열광한다.
학고재에서 펴낸 김혜순 시인의 스페인 기행기 ‘들끓는 사랑(1996)’은 ‘로르까’의 글을 인용하며 이 광란의 현장을 묘사한다. ‘어느 나라에서건 죽음은 궁극적인 것이다. 죽음이 다가오고 휘장이 쳐진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그렇지 않다. 스페인에서는 휘장이 벗겨진다. 스페인 사람들은 벽과 벽 속에 갇혀 살다가 죽음의 순간 햇빛 아래로 나오게 된다. 어느 나라보다도 스페인 사람들의 죽음은 생생하다. 죽음의 생생함과 상처의 치료를 로르까는 ‘두엔데’라고 부른다. 그것은 수많은 관중을 앞에 놓고 죽음을 연출하고, 그 죽음의 생생함에 박수를 보내는, 방울방울 흙 위에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고 열광하는 투우’의 공간인 것이다.
▲팜플로나를 사랑한 작가 헤밍웨이를 기억하는 조각 
▲산 페르민 축제 때 골목길을 질주한 소들이 마침내 들어가는 팜플로나 투우장 

선한 인도하심을 따라 알베르게 헤수스 이 마리아 순례자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라라소아냐에서부터 1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다섯 시간 정도 소요한 것이다. 집을 만난 기쁨 가득한 채로, 접수처에서 35, 36, 37번의 침대 세 개를 배정받았다. 침대는 피난처, 안식처, 요새다. 1782년 신학교로 지어진, 규모가 상당히 큰 3층 건물 내부를 새롭게 단장한 집이다. 1층은 자전거 거치공간과 편의 시설이 있고, 2층, 3층이 개방된 형태로 100여개 이상의 침대들이 도열되어 나그네를 맞이한다. 깨끗하고 시설이 참 좋은 편이다. 침대 하나 하룻밤 6유로. 잘 갖춰진 주방이 있어 사용하기 편리하다.
하룻길의 고단함을 샤워실에서 씻어내고, 아내의 헌신적 사랑이 담긴 하얀 쌀밥의 고소함으로 허기진 배에 감격을 채운다. 건물 안 쪽은 옆의 건물과 ㅁ자를 이루어서 하늘을 모아 담은 것 같은 모양으로 햇빛이 모이는 마당이 있다. 햇볕도 쪼이고 빨래도 말리고 세빈이의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한 날의 괴로움도 흘려보낸다. 마음속에 팜플로나 광란의 함성과 황소들의 씩씩거리는 숨결이 솟구쳐 오른다.(사진제공= 이대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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