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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영성순례기] 까미노에서 노란 화살표를 잃어버렸을 때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 담임

까미노 데 산티아고(32)

▲팜플로나의 젖줄 아르가 강을 건너는 막달레나 다리Puente de la Magdalena 
▲막달레나 다리에서 바라본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팜플로나 아르가 강 

북쪽 멀리로는 산악지대, 남쪽으로는 비옥한 곡창지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위쪽에는 구불구불한 아르가 강이 생명수를 공급하는 동시에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해자’가 되어주는 도시가 팜플로나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BC 75년 율리우스 케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가 로마에 대항한 반란군을 정벌하기 위해 세운 도시로 소개되고 있다. 무어인과 샤를마뉴의 격돌, 스페인과 프랑스 간 전쟁 등의 소용돌이가 이 도시에서 계속되었다. 예수회의 설립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1521년 프랑스군을 맞아 팜플로나 요새를 방어하던 중에 포탄을 맞고 다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후, 로욜라 성에서 요양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는 영적인 각성의 시기를 맞이한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삶을 순례로 비유하면서 그의 자서전을 통해 “명성을 얻으려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군사훈련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며 허영에 빠진 사람” 이었다고 고백하고, 내면으로 신비한 순례의 여정을 떠난다.
까미노는 막달레나 다리를 지나 아르가 강을 건너 팜플로나로 인도한다. 먼저 강을 건넌 아내와 세빈이는 다리 지나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나를 기다린다. 지치기도 했지만, 갈림길이 나온 까닭이다. 까미노에서는 갈림길이라고 해서 크게 당황할 일이 없다.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목적지에 이르러 알베르게를 찾는 경우에 방황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알베르게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대부분 까미노 선상에 위치한다.
막달레나 다리 건너 노란 화살표가 안내하는 까미노는 오른쪽으로 표시되어 있고, 우리가 가려는 알베르게-헤수스 이 마리아는 왼쪽으로 이정표가 있다. 잠간 망설인 후에 알베르게 방향의 이정표를 따르기로 하고 공원의 왼쪽 수풀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 때부터 어떤 표지도 없다. 길에 대한 확신이 점점 사라진다. 몸은 지쳐 있고, 되돌아가야 할 생각도 나지 않는다. 간혹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보아도 말이 통하지 않고, 모른다는 말만 할 뿐이다. 순간 당혹감에 공황이다. 이제는 무조건 물어봐야 한다. 일단 공원을 빠져 나가야 했다.
공원 끝에 이르렀을 때, 벤치에 앉아 있는 어떤 아저씨에게 물으니 아주 자신 있게 설명해 준다. 그 분이 정확하게 스페인 말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듣기는 했어도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방향은 잡았지만 확신 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우리 앞질러 간다. 그가 뒤를 흘깃흘깃 쳐다 본다. 그러더니 ‘따라 오라’는 것이다. 그를 따라 공원을 나섰다. 도시 순환로 같은 큰 도로가 나오고 오래된 고대의 성벽이 주변에 둘러 서 있다. 어디를 봐도 노란 화살표는 나오지 않고, 알베르게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도로를 건너 큰 건물 오른쪽으로 돌았는데, 갑자기 복잡한 도시의 골목길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그가 조금 앞서 가면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반가운 집, 팜플로나의 알베르게 헤수스 이 마리아Jesus y Maria
▲고대 로마 건축 양식의 아치 형태가 독특한 막달레나 다리

뒤에서 따라오던 아내가 묻는다. “이 인도함이 맞아요?” 또 묻는다. “이 길이 맞아요?” 아내의 질문에는 낯선 도시의 뒷골목으로 끌려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묻어 있었다. 사실 나는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약간의 의심도 있으면서, 무조건 ‘맞습니다 맞고요’, ‘정확하거든요’ 하고 대답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두 블록쯤 걸었을까? 길 왼쪽에 조그만 동네 놀이터가 있는 곳에서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그리곤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눈에는 알베르게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던 세빈이가 ‘아, 저기 있네요’ 한다. 아내와 나는 서로 쳐다보면서 슬그머니 웃었다. 아내도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함께였지만, 내 생각에 ‘다행인 것은 그가 우리의 고마운 마음만 받아 주었으리라’ 여기고 있다. 우리가 공원에서 길에 대한 설명을 듣고도 자신 없어 하는 것을 그가 보고, 직접 우리의 길을 안내해 준 것이다. 고마운 인사를 거듭하였다. 우리가 준비한 새끼손가락 크기의 태극 문양이 새겨진 아주 조그마한 모형 고무신을 배낭에서 내어 선물했다. 아저씨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환하게 번진다.
서로 인사하며 헤어지는데, 그 분이 바로 옆에 있는 집 대문으로 들어가려 한다. “여기가 아저씨 집이예요?” 물었다. “그래, 우리 집 맞아.” 하면서 껄껄 웃는다. 아내와 나는 쳐다보며 한 번 더 웃었다. 참 고마운 만남이었다. 막달레나 다리 건너 공원길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알베르게 앞집에 사는 분의 인도함을 받아, 우리도 우리의 ‘집’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중에 확인하였는데, 우리가 들어 선 공원길은 까미노 길도 아니고, 알베르게로 가는 길도 아닌 일반 공원 산책로였다. 노란 화살표가 가르쳐 주는 까미노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알베르게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끝까지 노란 화살표를 따라갔어야 했다. 내 생각을 따라 허튼 길로 들어섰지만, 옳은 길로 인도하신 그 분의 선한 사랑과 자비가 함께했음을 감사할 수밖에 없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의 선하신 영으로 나를 이끄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시편143:10)’
길 끄트머리 건물 벽, 머리보다 높은 곳에 짙은 고동색 철제 조가비가 손짓하며, 피곤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여기, 이 집으로 어서 오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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