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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선] 사이비이단규제법과 공공신학의 실천

입력 May 08, 2014 08:15 AM KST
기독교 일각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일명 ‘사이비이단규제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한 정책개발연구원 J 박사가 한 신문의 칼럼에서 발표한 “세월호 침몰사건과 한국교회의 책임과 역할”이라는 글에 그러한 주장의 요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국회와 정부는 가정파괴와 재산 착취, 협박과 폭력을 행사하며 항상 돈과 권력이 결탁한 반사회적 범죄를 일으키는 사이비이단집단을 척결하는 ‘사이비이단규제법’을 급히 제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정법상 명백한 불법행위를 저지른 세칭 구원파의 종교행위에 대해서 “정부와 검찰이 단호한 법집행만 했어도 세월호 같은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 주장은 “더 큰 국민적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한 조처를 시의적절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신앙의 공공성을 천명하고 있으므로 일견 경청할 만한 주장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 기업이 불법을 자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이비이단이기 때문에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것이라는 발상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종교탄압의 논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종교의 문제를 사법적 규제로 해결하고자 함으로써 종교가 사회에 대해 갖는 예언적 기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 법이 국가나 권력단체의 의도에 따라 실제로 종교탄압의 사례를 유발할 수도 있고 교단 내부에서도 자중지란을 불러일으킬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세상의 법을 이용하여 신앙의 공공성을 선양하려고 하다보면 엉뚱한 희생양을 만들 수가 있다. 따라서 교회는 ‘사이비이단규제법’ 제정 등을 통해 공공신학의 개발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국가 기관이 철저하게 조사하며 징책하는 지를 감시하는 한편, 자기성찰에 집중함으로써 신앙의 공공성을 도모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공공신학은 그러한 자기성찰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사실상 J 박사도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 교회가 더 이상 교회영역에만 머물러있지 말고 공공신학을 통해 공적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으며, 교회의 양적 성장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교회가]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지역과 계층, 문화의 장벽을 넘어... 신앙이 삶에서 실천되는 참된 제자화”를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교회가 더 이상 개별교회주의에 고착되어서는 안 되며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균형을 이룬 복음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현재 “공공신학적 관점에서 교회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깊은 성찰과 실천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이며 신앙의 거룩성을 회복할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도 사법적인 조처를 요구하는 것이 공공신학의 본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공공신학의 실천 
 
공공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교회가 가장 거룩하지 못하다고 비판받는 영역은 재정과 관련되어 있다. 현재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하나님께서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말라기2:3)라고 말씀하신 대로인 것을 귀 있는 자들은 다 듣고 있다. 이 말씀으로부터 자신이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공공신학을 실천하는 자세일 수 있을 것이다. 공공신학을 구현하려면 교회의 재정, 특히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창고에 들이되 그것을 당신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는 데에 더 관심을 갖고 계신다. 십일조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될 때 “여호와의 성물” (레위기27:30)이 되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교회 창고에 쌓아두어서 교회 내 분란이 발생했다면 십일조의 본래적 목적에 맞게 사용할 방도를 찾는 것이 그 분란을 잠재우는 공공신학이다. 예를 들어 교회는 역량에 따라 지역사회 내에서 교회 반경 1-2Km 내의 가난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업무를 시작하는 것이다. 일회적으로 필수품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들의 생활과 영적 상태와 좀 더 나아가 문화적 생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원조할 방안을 구체적으로 입안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가난한 자와 가족이 되는 길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교회내의 분쟁거리도 사실상 사라지는 경로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교단은 교회별로 이러한 지역을 적절하게 할당하기 위해 행정과 기술을 지원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교단들끼리, 그리고 교회들끼리 협력하고 대화하는 장도 만들 수 있다. 
 
만일 교회 재정을 이렇게 사용하다가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지면 지역사회 공동체가 이 사실을 알고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 건물이 문제가 되면 인근 학교 건물인들 빌려주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사회적으로 복음을 실천하려는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재정을 채워주신다고 믿고 실행하는 것이 신앙적 결단일 것이다. 장 박사는 본회퍼(D. Bonhoeffer)의 말을 인용하면서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에만 비로소 교회”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경로를 통해 신앙의 공공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거룩한 신앙의 자세를 회복하는 길이 된다. 법률의 제정은 종교의 문제를 사회의 규칙에 종속시킴으로써 스스로의 발목을 잡게 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일에 신앙의 힘을 결집할만한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세월호의 참사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이러한 상상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상상이 현실화될 수 있을는지는 내가 오늘 당장 퇴근길 지하철에서 만나게 될 노숙자나 걸인을 외면하지 않을 다짐을 하느냐에 달려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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