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영성순례기] “부엔 까미노” 그리고 부르게테의 헤밍웨이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 담임

까미노 데 산티아고(22)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790킬로미터 남았음을 알려주는 표지판.
▲론세스바예스에서 부르게테로 가는 깊은 나무숲 터널 까미노

신선한 아침 공기가 가슴 깊숙이 스며들어와, 혈관을 타고 온 몸 구석구석 가득 퍼진다. 해가 뜨긴 한 것 같은데 두꺼운 구름에 가려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 짙은 초록 나무 사이로 평평한 동굴 모양의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길은 말라있다. 순례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서로 인사한다. “올라Hola!” 이 말은 ‘안녕’이란 뜻의 스페인 말인데, 대수롭지 않은 이 인사말이 묘한 감동을 일으키며 가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먼저 지나가면서 “올라Hola!”, 쉬고 있는 나그네에게도 “올라Hola!”, 동네 사람들에게도 “올라Hola!”, 좀 전에 만났던 순례자 또 만나면서 “올라Hola!”를 외친다. 그러다 보니 서로 “올라Hola!” 하면서 웃는다.
 
까미노를 걷는 동안에 또 하나 많이 하고 듣게 되는 인사는 “부엔 까미노Buen Camino”이다. 우리말로 바로 옮겨보면, ‘좋은 길’ 정도 되겠다. 열심히 걷고 있다 보면, 어디선가 “부엔 까미노Buen Camino” 하는 소리가 들린다. 길 곁에서 쉬고 있던 순례자가 우릴 보고 외치는 소리다. 까미노를 지나는 마을에서 만나는 동네 사람들이 우릴 보고도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인사한다. 자전거를 타고 우리 앞을 휙 지나가는 사람들도 “부엔 까미노Buen Camino”한다.
 
우리도 쉴새없이 “올라Hola!”와 “부엔 까미노Buen Camino”를 외친다. 이 두 가지 인사말은, 길 떠나는 순례자에게 더 없이 큰 위로와 격려의 말이다. 어디론가 길을 떠나는 것은 모험이며 도전인데, 이러한 여정에는 진정한 용기와 두터운 의지가 필요하다. 
 
▲조가비와 노란 화살표가 순례자를 안내하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은총도 함께한다.
▲부르게테Burguete 마을 초입의 슈퍼마켓Supermercado

순례자가 걸을 수 있도록 돕는 힘을 공급하는 것이 바로 끊임없는 “올라Hola!”와 “부엔 까미노”였다. 실패와 좌절, 낙심과 절망이 가득한 순간이 찾아올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올라Hola! 부엔 까미노Buen Camino”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21)’ 하시던 주님의 음성처럼 깊고 고요한 내면의 울림으로 안내한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빨간 지붕과 하얀색 벽으로 된 건물들이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부르게테Burguete 마을 초입이다. 상점이나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았을 것을 예상한 주일 아침이었는데, 제법 규모가 큰 슈퍼마켓supermercado 앞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여 배낭에 넣고 있는 순례자를 목격하였다. 우리도 선홍빛, 알 좋은 복숭아 몇 개를 골라 값을 주고 배낭에 넣었다. 이러한 상황은 수시로 변하였는데, 주말이나 주일에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마을도 있었다.
 
까미노는 135번 주도로를 타고 부르게테 마을의 중심을 지나간다. 좌우 배수로 물길이 어깨띠처럼 흘러가는 도로의 양 옆에, 180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늘어서있다. 빨간색이나 짙은 초록색의 목재 덧창, 조그마한 화분을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의 좁은 철제 발코니가 있는 창가, 벽난로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내보낼 굴뚝이 솟은 삼층이나 사층 건물들이다. 그 건물들 중에 기억할 만한 집이 있는데, 부르게테 호스텔Hostal Burguete(Calle de San Nicolás, 71, Auritz)이다.
 
▲부르게테로 들어가는 순례자들, 마을 간의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
▲부르게테 마을 집 벽에 그려져 있는 순례자, 혹시 헤밍웨이일까?

호스텔 앞에는 ‘헤밍웨이 노선’ 안내 표지판이 있고, 표지판은 헤밍웨이를 기억할 만한 부르게테 인근의 장소를 소개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 노벨문학상, 엽총자살, 그리고 스페인의 열정을 간직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의 흔적과 그의 작품의 무대가 된 곳이 바로 부르게테Burguete 마을이다. 아마도 우리가 론세스바예스에서부터 걸어 온 길도 헤밍웨이 또한 걸었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젊은 헤밍웨이는 팜플로나의 투우 축제에 매료되었고, 팜플로나에서 가까운 부르게테에서는 시골의 정취와 살아 펄떡이는 송어를 낚아 올리는 생동감에 사로잡힌 것 같다.
 
헤밍웨이를 일약 유명작가의 반열에 올려 준, 자전적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The Sun Also Rises’의 주된 배경이 부르게테와 팜플로나이다. 1차 세계대전 참전 중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젊은이가 겪게 되는, 여성과의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아픔과 좌절, 동시대 젊은이들의 방황과 무기력함을 통해 강한 생명력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빛줄기 같은 소망을 섬세하게 역설적으로 그려낸 감동적인 문학작품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이다.
 
헤밍웨이는 작품에서 부르게테를 이렇게 묘사한다. ‘오솔길은 통나무로 만든 다리를 지나 개울을 건너게 되어 있었다. 통나무는 표면이 닳아 반질반질했고 난간 대신에 나뭇가지를 구부려 꽂아 놓았다, 개울 옆 평평한 연못 속에서는 올챙이들이 모래 위로 여기저기 보였다. 우리는 경사가 가파른 강둑을 올라가 기복이 있는 들판을 가로질러 건너갔다. 뒤를 돌아보니 부르게테의 흰 집과 붉은 지붕이 보였으며, 트럭이 뽀얗게 먼지를 날리며 달리고 있었다.’ 내가 보았던 그 빨간 지붕과 흰색 벽의 집을 헤밍웨이도 보았던 것이다.
 
▲ 빨간 지붕과 흰색 벽의 집들이 있는 부르게테
▲부르게테 호스텔Burguete Hostel 전경

헤밍웨이는 이곳에 와서 부르게테 호스텔을 자주 이용했고, 작품의 중요한 장소를 부르게테 호스텔로 설정했다. 호스텔의 아래층 식당에 있는 피아노에는 헤밍웨이의 싸인이 적혀 있다고 한다. 이른 아침이라 호스텔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헤밍웨이의 작품을 통해 부르게테 호스텔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천장이 나지막하고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안장과 마구와 흰 목재로 만든 건초용 갈퀴가 있고,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 밧줄로 창을 댄 신발 꾸러미며, 햄과 베이컨 조각이며, 하얀 마늘이며, 길쭉한 소시지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실내는 시원하고 서늘했다. 우리는 기다란 목제 카운터 앞에 서 있었고, 카운터 뒤에서는 여자 둘이 주문을 받고 있었다. 여자들 뒤에는 식료품과 상품을 쌓아 놓은 선반들이 있었다. (...) 나무 테이블 저편으로 한구석에 업라이트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다. 까미노는 우리를 헤밍웨이와도 동행하게 해 주었다.(사진제공= 이대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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