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74)

동남아 선교




제15장 동남아 선교

1. 버마(미얀마)

동남아에는 일찍이 불교가 오랜 역사를 통해 전파되어 불교국가가 된 나라가 많았는데, 버마도 불교국가였다. 미국의 회중교회가 파송한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과 라이스(Luther Rice)가 인도로 파송받아 배를 타고 캘커타(Calcutta)를 향해 여행하던 중 침례교 선교사 한 사람과 만나 대담하면서 세례문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다가 침례교의 세례교리를 배우고 자기가 받은 세례의식이 신앙의 확신 없이 된 것으로 알고 침례교를 믿기로 작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국의 회중교회 선교부와의 관계를 끊고 미국 침례교 선교사가 되어 버마로 가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라이스는 미국에 되돌아와서 저드슨의 버마 선교 후원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저드슨은 버마어를 배워서 성서를 버마어로 번역하고 많은 문서를 출판하였다. 그는 열심히 선교하여 5년 후에 첫 개종자를 한 명 얻었다. 1824년에 저드슨은 수도 아바(Ava)로 이사했는데 이때 마침 영국과 버마의 전쟁이 일어났다. 버마 정부는 저드슨이 미국인인데도 그를 영국의 스파이로 몰고 21개월간 가두어 두었다. 옥중에서 그는 심한 고초를 당하였다. 그의 부인 앤(Ann H. Judson)이 남편을 면회하는 허가를 받아 감옥을 오가면서 남편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나 저드슨이 풀려나왔으나 그의 아내는 병사하였다. 저드슨의 시련은 가중되었다. 저드슨은 감옥에서 받은 고문으로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여 계속 고통을 받았다. 그는 부동의 구원의 확신과 병약해진 자기 정신 사이의 괴로운 싸움을 죽을 때까지 겪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선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1834년에 신구약성서를 버마어로 완역하였고 영어와 버마어 사전을 저술하기 위하여 막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결국 그 사전이 출판되었다. 저드슨은 버마 선교를 끝내고 귀국하는 도중 배 안에서 사망하여 그의 시체는 바다 속에 수장되었다. 실로 그는 버마의 개척선교사로서 모범적인 선교를 한 순교자였다.

저드슨의 선교를 이어 보아드만(Geroge D. Boardman, 1801~1831)이 버마 타보이(Tavoy)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카렌(Karen)인 최초의 개종자 고다빈(Ko Tha Byn)을 협력자로 삼아 마을을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카렌인은 버마족의 천대를 받던 한 족속이었지만 예수를 믿은 사람이 많아져서 버마 복음화의 길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그 하나님에 대한 성서도 가지고 있다가 선조들의 부주의로 그 책을 잃어버렸는데 이제 그 책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책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수백 명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었다. 1851년경에 버마에는 10,000개 교회가 있었고 교인 수는 30,000명이었다. 그리하여 버마의 그리스도교는 인도나 한국의 교회보다 앞서 왕성하였다. 제2차 대전 종전 후 버마가 독립하여 공산국가가 되었으나 침례교회는 여전히 버마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2. 필리핀

필리핀에는 천주교 선교사가 1565년에 와서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을 따라 선교하여 300년 후 필리핀 전 국민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1873년에 판가시아(Pangasia)어로 누가복음서가 번역되었을 뿐 필리핀의 그 많은 종류의 말 중 어느 한 가지 말로도 성서의 어느 한 부분도 번역된 것이 없었다.

1898년에 미국이 필리핀에서 스페인 세력을 축출하고 통치하기 시작하여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길이 열렸다. 미국의 장로교 선교가 1899년에 필리핀에 들어왔고, 이어서 1900년에 감리교 선교와 침례교 선교가 시작되었고 그 후 다른 교파의 선교도 속속 들어왔다. 필리핀 국민들 중 특히 젊은 세대가 천주교 선교에 불만을 가지고 프로테스탄트의 서양 교육을 받기 원하였다. 그리하여 수년간에 필리핀에 개신교 교회가 전국에 서고 교인 수가 신속하게 늘어났다. 그리고 필리핀 국민은 독립정신이 강력해서 필리핀 교회를 자력으로 키워가기를 바랐다.

1902년 미국의 감독교회 선교사 브렌트(Charles H. Brent, 1862~1928) 목사가 필리핀에 와서 필리핀의 천주교회와 친선관계를 가지려 노력하였다. 브렌트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지도자로서 교파들 사이의 친교와 협력을 모색하고 신앙과 신학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는 아직 전도되지 않은 벽지를 선교지역으로 삼고 산악지대의 주민들에게 접근했다. 그런데 그러한 지역에는 이슬람 신자들이 많아서 선교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3. 뉴질랜드, 피지

폴리네시아(Polynesia) 족속이 살던 뉴질랜드(New Zealand)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 있던 영국성공회 군목 마스덴(S. Marsden)이 뉴질랜드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1814년에 수공업 기술자와 기타 기술자들을 대동하고 크리스마스날 항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영국 성공회선교회 C.M.S.의 파송을 받았다.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설교하여 신자들이 생겼지만 세례주는 것을 신중히 하였다.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들이 선교사들에게서 화포와 같은 무기를 얻어서 타 부족과의 싸움에 사용하려 하였다. 1825년과 1830년에 세례교인을 수 명 얻었다. 

뉴질랜드에 영국의 식민정권을 세울 것인지가 문제가 되어 있었을 때 선교사들은 그것을 반대하였는데, 그들은 이 작은 섬에 백인들이 들어와서 인종 혼합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뉴질랜드가 영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1842년 뉴질랜드의 성공회 감독은 뉴질랜드의 원주민 전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1854년 뉴질랜드 총독의 발표는 뉴질랜드의 마오리(Maori) 부족의 단 1퍼센트만이 개종했다는 것이었다. 1835년에 성공회 선교지 와이마테(Waimate)를 방문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쓴 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5년 전만 해도 풀만 무성했던 곳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인데… 선교회의 교훈이 마법사의 지휘봉이다.”

피지(Fiji) 섬의 선교는 더 힘든 것이었다. 1823년 통가(Tonga)에 처음에 선교사의 접촉이 있었고 1835년 감리교 선교사가 이곳에 왔다. 약 10년 후에 개종자가 처음으로 나왔으나 그 섬 사람들의 야성적인 성격이 변화되지 않았다. 1845년에 부흥운동이 일어나서 회심자가 많아졌고 교회를 반대하던 추장 다콤바우(Thakombau)가 1845년에 회심한 후 회심자가 더 많아졌다. 이렇게 이 섬 사람들이 오랫동안 섬기던 신들을 버린 것은 병이 낫는 것이 그 신들의 치유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치료에 의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뭄이 심할 때 그 신들에게 드린 기도가 효과가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 비가 내린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선교를 통하여 서서히 옛 종교와 습관이 물러갔다.

4. 말라야와 인도네시아 

1819년 영국이 말라야(Malaya)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말라야는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발판처럼 된 요긴한 곳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문화가 개방되었을 때 선교사들과 선교기관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영화대학(英華大學)도 홍콩으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에 말라야에 있던 선교사역은 몰락해갔다.

그러나 좁은 해협 건너에 있던 보르네오(Borneo)의 사정은 달랐다. 제임즈 브루크(James Brooke)가 1847년에 자기 재산으로 선교사 두 사람을 파송하기로 하고 S.P.G. 선교회의 도움을 얻었다. 한 사람은 맥도우갈(Thomas McDougall)로 의사인 동시에 신부였다. 그는 장기간 아주 훌륭한 선교업적을 만들었다. 그는 선교지의 불편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자녀 5명을 다 선교지에서 잃었고 회심자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1851년에 선교사가 증파되어 선교사역이 더 활발해져 그해 9월에 5명의 회심자에게 세례를 주게 되었다. 선교사역이 왕성하게 되어 이곳을 방문했던 윌손(Daniel Wilson) 감독이 말하기를 “이 지상에 보르네오 지역 선교에 비교될 만한 선교지는 없다”고 하였다. 1855년 10월 18일에 맥도우갈은 라부안(Labuan) 감독으로 승진하였고 중국인 주민들에게 선교를 확대해 갔다. 전날에 이곳 주민들은 사람의 목을 치는 식인종 사냥꾼들이었는데 이제 복음을 받아들여 아주 변한 사람들이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아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수많은 섬과 수많은 인종이 이주해 와서 살았다. 19세기 초 네덜란드의 선교단체들이 여기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북쪽 미나하사(Minahasa) 산간지대에 가서 선교하였다. 선교의 성과가 좋아서 19세기 말경에는 그 지역 모든 주민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네덜란드의 식민통치가 확립되었으나 독립운동의 기미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네덜란드 식민통치는 단순하고 온순한 주민들에게 전하는 복음 선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식민정권에 대한 태도는 달랐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름답고 풍요한 자바(Java)에서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1849년에 선교사 젤레마(J. E. Jellema)가 자바 동쪽에 정주하였을 때 그곳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교파가 달랐다. 1811년에는 독일인 신부 엠데(Johanes Emde)가 수라바야(Surabaya)에 와서 선교하였는데 그는 시계공이었다. 그는 여기에 와서 자바 여인과 결혼하고 복음을 설교하고 자바 말로 번역된 성서책을 배포하였다. 그는 1843년에 35명의 무슬림들을 회심시켜서 수라바야에 있던 네덜란드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게 하였다. 엠데 신부는 자바의 전통과 문화를 잘 몰랐고 서양 문화를 모방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을 착실한 신자로 만들었다.

네덜란드 정부의 한 관리였던 쿠울랜(C. L. Coolen)이 자바에서 선교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모친은 자바의 한 귀족의 가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바의 옛 전통을 잘 알고 교회가 자바 문화에 아주 동화하도록 지도하여, 그의 교인들은 자바 문화전통을 잘 지킨 세례교인들이었다.

자바에는 이렇게 서양교회 전통대로 교회생활을 한 신자들과 반대로 자바 문화에 토착된 교회생활을 한 신자들이 있었다. 새 선교사로 온 젤레마(Jellema) 목사는 이 두 가지 형태의 교회 사이에서 중립적인 정책을 썼다. 양측 교회에는 다 어떤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젤레마 목사는 두 다른 형태의 교회의 특징을 종합한 형태의 교회를 만들었고, 그의 시도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동부 자바 교회는 계속해서 독립정신을 가지고 평신도 전도인들을 등용하여 자발적으로 교세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무슬림을 개종시켜서 예수를 믿게 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무슬림들은 이슬람 종교의 근본교리에 철저한 신자들이 아니고 인도네시아의 재래의 정령숭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비교적 쉽게 받아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선교의 노력 없이는 이룩될 수 없는 결실이었다.

19세기 중엽 구미 교회의 부흥운동에 힘입어 각국의 선교단체들이 해외에 선교사를 증파하여 선교지의 교회들에서도 부흥이 일기 시작하였을 때, 홀랜드 교회가 동남아시아 선교를 강화한 가운데 인도네시아의 선교사업을 확장해 갔다. 인도네시아에는 수많은 섬이 있었는데 홀랜드 더치(Dutch) 선교회는 셀레베스(Celebes)와 티모아(Timor)와 할마헤라(Halmahera) 섬에서 교회의 부흥을 이룩하여 교회가 많이 섰다. 그런데 더치 선교회 외에 독일의 렌이쉬(Rhenish) 선교회가 또한 선교사업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독일 선교회는 수마트라(Sumatra)의 바타크(Batak) 지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곳은 100만의 인구를 가진 섬이었고 바타크인들은 용기 있고 활발한 사람들이었다. 100년 전에 이 섬의 더치 식민통치가 산악지대에까지 미치지 못하였고 이슬람 종교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인신을 제물로 바치는 사육제를 지내고 이웃 마을과 부단히 전쟁하며 서로 살생을 일삼는 원시생활을 하고 있었다. 선교사가 들어가기 힘든 곳이었는데 1834년에 미국의 해외선교회가 2명의 선교사를 이곳에 보냈다. 사무엘 문손(Samuel Munson)과 헨리 리만(Henry Lyman)이 바타크인 땅에 들어갔으나 둘 다 잡혀서 먹혀버려 전도를 시작하지도 못했다.

1859년에 보르네오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서 거기서 선교하던 독일의 렌이쉬선교회가 쫓겨나와서 새 선교지로서 수마트라를 정하고 1861년에 정착하였다. 이 선교회에 한 용감한 선교사 루드빅 I. 노멘센(Ludwig I. Nommensen)이 가입하여 동역하게 되었다. 그는 1876년에 처음으로 토바(Toba) 호수 지방에 접근하여 갔다. 그는 그곳에 다녀와서 바타크 족속의 선교에 대한 환상을 보고 예언하는 말을 했는데 “태양이 이제 바타크 땅에 떠오르고 있는데 토바 호수의 호변에까지 비췰 그 태양 빛을 누가 막으리오!”라고 하였다. 그가 이곳에서 선교를 시작했을 때 그 종족의 강력한 저항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누구든지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생활에서 가진 자기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고립되어야만 했다. 회심자들은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동시에 그 제사를 위한 헌금도 거절했다. 그 부족은 선교사들이 자기들 부족사회를 해체시킨다고 비난하였고 개종자들은 떨어져 나와 고립되었으므로 선교사가 그들을 모아 한 동네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노멘센의 용기 있고 담대한 선교사역으로 소수의 추장들이 회심하였고 그의 선교가 힘을 얻게 되었다. 추장들을 따라 부족들이 단체로 개종하고 예수를 믿었다. 1868년에는 52명이었던 신자가 1876년에는 2,056명, 1881년에는 7,500명, 그리고 1911년에는 103,525명이 되었다. 신자들은 개인전도의 방법으로 신자를 늘려 갔고, 이제는 선교회의 교회가 아니고 본토민들의 교회가 되어야 할 단계가 되었다. 이들은 지방에 따라 말과 생활관습이 조금 차이가 있어도 크게는 한 종족이었다. 선교사업이 시작되고 몇 년이 안되어 그들의 모어(母語)로 성서가 번역되어 배포되었다. 이곳에는 아직 천주교 선교가 들어오지 않아서 서양문화와 서양교회의 다양성을 몰랐다. 그리하여 바타크족 교회는 복잡한 교회제도와 교회를 모르는 단순한 교회였다. 홀랜드의 더치 정권은 이 지역의 발전과 교육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선교회를 지원하여 주었다. 선교회는 더치 정부의 돈으로 여러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노멘센 선교사가 처음부터 바타크 교회는 서양의 교회가 아닌 바타크인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더치 식민정권과 더치 선교회는 본토민 목사를 선교회에 종속시켰고 그들은 성찬식과 세례식 때 선교사의 주례의 보조원 노릇밖에 못하였다. 선교사들이 더치 식민정권과 본토민 사이의 중개자가 되어 민간의 모든 생각을 식민정권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선교사가 의사, 교사, 농업지도자, 불화사건의 중개자 등 사회의 모든 요직을 맡았다. 그리하여 노멘센의 바타크 교회에 대한 이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히틀러 군대가 홀랜드를 점령한 후 선교사들이 다 억류되었다. 그리고 제2차 대전의 종전으로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선교하던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사업은 일단 중지되었고, 계속되더라도 이전과 같은 서양교회의 식민 교회 정책은 모두 폐기되었고 본토민 교회가 수립되어 갔다. 종전 후 바타크 교회는 자체적으로 바타크 신앙고백을 만들었다.

5. 뉴기니

뉴기니(New Guinea)는 서양 식민국가들의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와 홀랜드와 독일 등의 나라가 그 섬을 삼분하여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뉴기니는 세계에서 둘째가는 큰 섬나라로 면적이 영국 본토의 무려 네 배가 된다. 이 섬은 산악지대가 많고 19,000피트의 높은 산이 있고 많은 종족들이 있어서 500종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었는데 작은 종족의 인구는 불과 1,000명 내외였다. 이 많은 부족들은 이웃 종족들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전쟁하여 늘 공포 속에 살고 있었다. 이 섬을 점령한 세 서양 식민정권들이 이 섬 깊은 곳까지 침투하여 갈 수 없었고 경비행기를 타고 오지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뉴기니는 대체로 답사가 되지 않은 섬나라였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는 영국 런던선교회(L.M.S.) 소속의 백인들과 뉴기니 본토민이었는데 1870년에 서해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1891년에 영국성공회 선교사가 동북 해안지대에 들어왔다. 이들이 들어왔을 때 주민들이 활을 겨누고 접근해 왔는데 다행히 담배와 물물교환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112파운드에 해당되는 담배와 전투용 도끼와 칼과 파이프와 구슬과 옷가지 등을 주고 정착할 땅을 얻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곳에 교회당을 지었다. 1898년에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네덜란드 선교단도 거의 같은 때에 들어와서 뉴기니 섬 해안지대의 여러 작은 섬들을 점유할 수 있었다.

제임즈 찰머스(James Chalmers)가 1877년에 뉴기니에 왔다. 그는 자기 생애의 4분의 1이 되는 세월을 뉴기니 선교에 바쳤다. 찰머스는 한 젊은 동반자 톰킨스(Tomkins)를 데리고 플리(Fly) 강 하구지역을 답사하러 떠났다. 그곳 주민들은 특별히 사납고 불친절하여 답사단원들이 상륙하기 힘들었는데 겨우 상륙하자마자 주민들이 몰려와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몸을 불에 구워서 먹어버렸다.

홀랜드의 우트레트(Utrecht) 선교회가 1861년에 처음으로 뉴기니의 이리안(Irian)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선교사역이 힘들어서 25년 만에 처음으로 20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이리안에 많은 선교사들이 와서 선교하였는데 그곳의 그리스도인의 무덤보다 선교사의 무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뉴기니 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지 알 수 있다. 독일의 선교단체들도 뉴기니 선교에 가담했다. 독일의 노이엔데텔스아우(Neuendettelsau) 선교회가 1886년에 요하네스 플리엘(Johannes Flierl) 선교사를 파송했고 렌이쉬선교회도 1889년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 두 선교회도 여러 선교사들의 생명을 잃고 실망하면서도 계속 노력하여 13년 만에 한 명의 회심자를 얻었고, 렌이쉬선교회도 그 후 4년이 지나 한 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뉴기니에서 일한 선교사들은 공통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였다. 뉴기니의 회심한 신자들은 그들의 부족에서 이탈하여 자기 부족에 영영 돌아갈 수 없었다. 회심자를 얻기도 어려웠지만 그들 회심자들이 자기 부족민들에게 신앙을 증거하고 전도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개인전도를 넘어서 부족 전체를 개종시키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부족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교로 아주 개종하지 않고 평화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되어 갔다. 그리고 개인별의 세례는 신중하게 실시하면서 본토민 전도사들을 양성해 갔다. 그리하여 이 전도사들의 영웅적이고 열정적인 전도로 신자들이 늘어났다. 독일의 루터교회 선교회가 특히 이 방법으로 효과를 많이 거두었다.

동남아시아 섬나라들에서 선교한 서양 선교사들의 시행착오도 많아서 비판을 받을 것이 많지만, 때로는 서양 식민정권에 편승하고 또 때로는 식민정책에 항거하면서 힘들게 선교한 그들에 대하여 먼 훗날이 되는 오늘날에 와서 우리가 생각할 때, 그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존경과 감사에 인색해서도 안 된다. 동남아 섬나라들의 원시적인 부족들의 공동체를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훼손하고 그들의 고유한 원시문화와 평화를 깨뜨렸다는 비판이 있는데 설혹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그 책임을 진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 섬나라의 원시 상태를 그냥 보존하는 것이 좋았을까 하는 문제는 고려해 볼만한 문제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아니고 서양 식민정권들의 군인이나 상사들이 먼저 그 섬나라 깊이까지 가서 개발하였을 경우 그 원주민들이 입었을 피해와 상처를 가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아예 노예처럼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노예로 팔려갔듯이. 역사에서 과거 지나간 일이나 사건이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질문에는 아무도 바른 대답을 줄 수 없다. 동남아 섬나라들의 그리스도교 선교는 그곳에 현대문명을 심어 주었고 식민정권들은 선교사들을 원조하였고 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의 현대화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6. 태국과 대만

태국은 불교국가로서 언제나 그리스도교 선교에 저항하였고 서양선교사들을 정치적으로 의심하였다. 태국은 늘 독립왕국이어서 영국이나 프랑스의 접근을 경계하였다. 태국에 먼저 들어온 서양선교사는 천주교 선교사들이었는데 그들은 늘 정치적으로 욕을 먹고 있었다.

1849년에 서양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1856년 태국과 프랑스의 조약에 따라 프랑스 선교사들이 아주 자유롭게 되었다. 선교는 저조하여 1880년에 처음으로 태국인 신부가 생겼고 1912년에 천주교 신자는 태국인(샴인)과 중국인을 합하여 36,000명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도 태국에 들어왔는데 미국 장로교 선교회가 태국 북방 라오스족이 사는 지역에서 선교의 큰 성과를 거두었고, 영국성공회 선교회가 1930년에 소규모의 선교대원을 가지고 선교를 시작했고, 같은 해에 영국의 그리스도교파의 선교사들이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태국인들은 다 친절하고 우정적이었으나 개종 문제에 대해서는 반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선교의 성과는 미미하였다.

대만은 일본이 점령하고 통치하기 전에는 중국 땅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선교한 천주교 선교사들이 대만에서 사역하여 일찍부터 천주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선교하던 미국의 장로교회 선교회가 대만에서 선교하였다. 1949년까지 천주교 선교사가 소수였고 장로교 선교회 선교가 활발하였다. 그리고 제2차 대전이 종전된 후 캐나다 장로교선교회가 대만 북쪽 지방에서 선교하고 영국 교회는 남쪽 지방에서 선교하게 되어서 대만의 개신교 선교는 급성장해 갔다. 그런데 대만 그리스도인들은 독립적인 교회를 형성해 가서 선교사 의존도가 낮았다.

제2차 세계대전 조금 전에 대만의 산악지역의 주민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독립교회운동이 일어났었는데 2차 대전 기간에 외국선교사들이 다 대만에서 떠나고 없는 동안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 복음을 강력하게 배격하여 교회가 박해를 받았다. 대전 종전 후 중국의 장개석 장군이 대만으로 망명하여 왔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이 대만에 들어와서 그들 나름대로 교회를 조직하여 세웠고, 외국선교사들이 다시 대만에 많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개신교 교파가 49개가 되어 교계가 혼란스럽게 되었다. 대만 본토민 교회와 중국에서 유입된 교회가 공존하게 되었지만 후자는 중국 본토의 정복과 복귀를 꾀하는 대만 정부의 정치적 및 군사적 운동과 연계되는 정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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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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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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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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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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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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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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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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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