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낯선 이들을 위해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낯선 이들을 위해 

                                                                                                                                 도리앤 로 (Dorianne Laux)

슬픔이 어떤 것이든, 얼마나 무겁든

우리는 그것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겨우 일어나 둔한 힘까지 그러모아서

사람들 속으로 밀려 끼어든다.

그때 한 어린아이가 내게 길을 가르쳐준다

아주 열심히. 어떤 여자는 유리문을 잡아주며

진 빠진 내 몸이 지나가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하루 종일 계속해서 이 친절이

저 친절로 이어진다 - 어떤 낯선 이는

내가 지나갈 때 모두가 들으라는 듯 노래한다, 나무들은

꽃들을 바치며, 아이는

아몬드 같은 눈을 크게 뜨고 미소짓는다.

어떻게든 그들은 늘 나를 찾아내어, 심지어 기다리기조차

한 듯한데, 결연히 나를 막아선다.

내 마음대로 못하도록, 한번은 그들도 마음먹었던 적 있었던

지금 내가 마음먹은 그 일을 못하도록 -

벼랑 끝으로 발을 내디뎌

세상 밖으로 거침없이 떨어져버리고 싶은 이 유혹을.

시인(1952- )은 친절이 생명을 구한다고 알린다. 도덕적 교훈처럼 들리나 그녀는 그 진부함을 생명의 긴장감으로 치환했다. 그 교훈은 생명의 외경과도 맞닿아 있다. 세상을 슬프게만 보면 그 끝에는 절명(絕命)이 기다리고 있기 쉬우나 일상 속의 친절한 행위는 생명의 힘을 전한다. 비록 사소하여 고상한 목적이 없어 보이더라도 그 행위는 누군가에게 생명의 가치를 일깨운다. "낯선 이들을 위해" 베푼 친절은 생명을 회복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한편, 친절을 베푼 사람들도 상대에게는 낯설므로 시제(詩題)는 염세적인 사람에게 생명의 기회를 알리고, 생명적 친절을 베푼 이에게는 상찬(賞讚)을 보내고 있다.

시의 첫 행에 따르면, 시인의 인생관은 슬픔에 경도되어 있다. 누구에겐들 기쁨의 나날만 연속되랴마는 그녀는 슬픔을 먼저 떠올리며 그 짐을 무겁게 느끼고 있다. "슬픔이 어떤 것이든, 얼마나 무겁든/ 우리는 그것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우리는 기쁨보다 슬픔에 더 쉽게 공감하기는 한다. 슬픔의 짐이 감당하기 더 힘들다는 데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슬픔을 마치 중력처럼 인간의 삶에서 불가피한 실존적 조건인 듯 여기게 되면, 인간을 생래적으로 슬픈 존재로 보게 되어 염세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세상에서 생을 이어나갈 이유나 명분을 찾지 못하고서 세상으로부터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녀는 사실상 절명과 망각의 유혹을 느끼기도 했다.

슬픔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데다 불시에 닥치기 때문에 마치 강도처럼 우리의 생활세계에 침입한다. 불시에 침입한 강도를 막을 방도는 없으니까 그 피해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슬픔의 불가피성을 이다지도 운명적으로 보게 되면 생에의 의지를 찾을 수 없다. 자발적 활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겨우 일어나 둔한 힘까지 그러모아서/ 사람들 속으로 밀려 끼어든다." 억지로 힘을 내서 밖으로 나간 셈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지 못한 업무가 있기 때문일까? 만일 그런 책임감이 있었다면, 그는 실존적 의지를 발휘할 가능성이 전무하지는 않다. 그러나 떠밀려서 사람들의 생활세계에 끼어들게 되었으므로 그 가능성에 대해 낙관하기란 힘들다.

어쨌든, 슬픔의 짐에 짓눌려 칩거하지 않고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 것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가능성에로 문을 연 셈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 작용했다. 우연은 인간의 논리를 초월한 영역에서 작용하므로 뜻밖에 새로운 기회를 주기도 한다. 우연히도 "한 어린아이가 내게 길을 가르쳐준다." 시인이 보기에 슬픔의 짐에 눌려 있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어린아이는 자기가 아는 길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다. 그는 삶의 길을 알고 있는 듯하다. 어린아이가 비탄에 젖어 생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물론, 인생의 슬픔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해서, 다시 말해서, 미숙해서 그러지 않는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인생을 슬픔의 눈으로만 보면서 그 길을 잃어버린 '성숙한' 어른보다는 그가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아주 열심히" 그 길을 알려준다는 것은 무지한 사람의 반응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에 대해 왜곡된 시각의 지식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갖는 확신의 반응이다.

왜 어떤 여자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유리문을 잡아주는가? 그것도 "진 빠진 내 몸이 지나가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 빠진 내 몸"으로부터 그녀가 감사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길을 가르쳐준 어린아이나 유리문을 잡아준 여자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행을 베풀었다. 그 선행을 시인은 "친절"이라 칭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계속해서 이 친절이/ 저 친절로 이어진다." 친절이란 내면의 선한 의식이 외부로 표명되어 드러난 행위이다. 그 행위는 생명의 힘을 싣고 있다. 길을 잃어버린 듯 진이 빠진 채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다니던 시인이 그 순간만큼은 슬픔의 짐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슬프게만 보는 사람은 친절을 감지하거나 베풀지 못한다. 그러나 의외로 시인은 친절이 이어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어떤 낯선 이는/ 내가 지나갈 때 모두가 들으라는 듯 노래한다, 나무들은/ 꽃들을 바치며, 아이는/ 아몬드 같은 눈을 크게 뜨고 미소짓는다." 마치 길 위의 가수는 자기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고 나무들은 꽃들을 헌정하는 듯 환하게 웃으며 그 곁에 있던 청순한 아이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바라보며 반갑게 맞이하는 듯하다.

혼자서 격리된 채 슬픔의 짐에 눌려 있다면 느끼거나 확인할 수도 없는 친절이 길거리에 가득한 것이다. 생명의 힘은 슬픔의 짐에 짓눌려 있지 않으면 누구든 느낄 수 있도록 편재한다. 그 힘은 마치 시인이 어떤 마음을 품고 집을 나섰는지를 아는 듯이 "어떻게든 그들은 늘 나를 찾아내어, 심지어 기다리기조차/ 한 듯한데, 결연히 나를 막아선다." 생명은 "결연히" 죽음을 막아선다. 그 생명의 힘을 친절이 품고 있다. 낯선 사람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푼 친절은 비록 그가 슬픔의 짐에 눌려 생의 의욕조차 없다고 하더라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적시에 생명의 힘을 공급한다. 그 힘이 "내 마음대로 못하도록, 한번은 그들도 마음먹었던 적 있었던/ 지금 내가 마음먹은 그 일을 못하도록" 막아선다. 친절이 없었다면, 다른 모든 사람도 자기처럼 죽음을 시도할 것이라고 오해한 채 "벼랑 끝으로 발을 내디뎌/ 세상 밖으로 거침없이 떨어져버리고 싶은 이 유혹을" 따랐을 것이다. 그녀는 "거침없이"(weightless) 슬픔의 짐(weight)을 벗고자 했으나, 친절은 그 "거침없[는]" 유혹을 막고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와 같이 "낯선 이들을 위해" 베푼 친절이 생명을 살린 사례로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릴 수 있다(누가복음 10:30-35). 길을 가다가 강도당한 사람은 불시에 닥친 존재적 위기의 상태를 대변한다. 슬픔의 짐에 짓눌려 갑자기 죽음으로 내몰린 존재이다. 현재 그에게는 강도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나 원망보다는 생명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모든 것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처지이기도 해서 그는 오로지 순수한 생명의 힘이 우연히 베풀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강도라는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부조리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대로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부조리를 용납하는 일이다. 어쨌든, 그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사마리아인의 친절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한 행위였고, 그것으로 인해 낯선 이가 새롭게 생명을 얻게 되었다. 한편, 강도당한 자에게는 사마리아인이 낯선 사람이므로 그 "낯선 이들을 위해" 하늘은 선한 이웃이라는 상찬을 성경에 영원히 기록해 두었다. 한 어린아이, 어떤 여자, 길 위의 가수, 나무들, 눈이 큰 아이가 모두 선한 이웃이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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