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건전한 믿음과 깨끗한 사람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디도서 1장 5 - 16절

설교문

[종려주일의 두 행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12: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온 순례자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일행을 환영한 것으로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선포하는 것과 동시에 승리를 이끈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승리자로, 진정한 왕으로 묘사하고, 그래서 순례자들이 외칠 때도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그러나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왕이 된 것도 아니고, 온 세상이 그를 따른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일주일도 채 못 되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을 한편으로 고난주일이라고 부르고,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7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근거로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아예 종려나무 가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서는 많은 사람들이 들에서 잎이 많은 생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나무 가지와 관련해서는 어떤 내용도 나오지 않습니다. 4복음서가 모두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증언하고 있는데 그 묘사 내용은 전부 다릅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서는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외치지만, 누가복음서는 제자들만 외칩니다. 외치는 내용도 다릅니다. 이렇게 서로 내용이 다르다면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쳤다고 하지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 일행의 행색은 분명히 초라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이라는 시골 마을 출신인데다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대부분 농민층이고,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의 먼 거리를 걸어온 터라 예수 일행은 지치고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간신히 새끼 나귀를 빌려 탔지만 그 모양은 볼품없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한편 서쪽으로부터 이두매와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제국의 기병대와 보병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이들의 행렬은 제국의 권력을 과시합니다. 유대교의 성전과 그 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안토니아 요새에도 이미 로마 군인들이 상주했지만, 유대교의 중요한 절기들에는 언제나 소요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기에 로마 제국은 질서 유지 명목으로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파병했습니다. 도심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을 때, 엄청난 전투경찰들이 도로에 가득한 것처럼 말이지요.

제국 군대의 위용은 예수님 일행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새끼나귀가 아니라 멋들어진 군마들 행렬이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말에 타고 있는 기병들, 보병들이 들고 있는 높이 솟은 창들, 창끝에 반사되어 빛나는 태양, 가죽 갑옷과 투구들, 병기와 깃발들, 깃대 위에 조각된 황금 독수리, 행군하는 군화 소리들과 울리는 말고삐의 방울들, 둥둥둥 북을 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로마제국의 군대는 당시 로마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강한가를 보여 줍니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한쪽에는 이 세상의 지배자인 로마 황제의 군대가,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 나라를 외치는 갈릴리 나사렛 청년이 서 있습니다. 둘 다 세상을 다스리려 하고, 둘 다 자신의 나라가 인류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준다고 말합니다. 저는 종려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이 두 행렬의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로마 황제의 군대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갈릴리 나사렛 청년의 편에 설 것인가?

오늘날도 2,000년 전 예루살렘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쥐락펴락합니다. 상위 20%의 근로소득이 하위 20%의 근로소득보다 15배나 높고(국회의원 양경숙 의원실 보도자료, 상위 0.1% 연봉도 시별로 3배 차이[원자료 국세청], 2024. 01. 26.), 초중고생들 중 50%가 우리나라가 돈에 따라 사람을 차별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에게 성공한 삶에 대해 물으면, "돈을 잘 버는 것"이라는 대답이 언제나 상위를 차지하고, 그 비율이 해가 갈수록 높아집니다.(한국교육개발원, "2023 교육정책 인식조사" 2023년 12월, 전국초중고 13,864명, 온라인 조사 2023. 07. 05. ~ 07. 19.)

오늘날 세상 많은 사람들은 돈이 전부라고 합니다. 모든 권력 다툼의 한복판을 자세히 살피면 거기에도 분명 돈이 걸려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인 오늘날, 돈은 우리 삶 구석구석 매우 깊숙이 들어와 있고, 마치 하나님처럼 전능한 힘을 마구 뿜어내고 있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안정되고 화려한 삶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교회도, 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교인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돈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돈 많이 벌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 사실은 많은 돈을 소유하는 삶이고, 그래서 하나님 믿고 복 받아서 부자됐다는 간증이 오늘날도 여전히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코로나가 지나고 가장 빠르게 회복하고 탄탄해 지는 곳도 대부분 돈이 많은 대형교회들입니다. 앞으로 출석 교인수가 늘어나서 교회가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는 곳도 놀랍게 대도시일수록, 교회 규모가 클수록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돈을 아울러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누가 16:13)고 말씀하셨지만, 주님의 몸이라고 불리는 교회도 가만 보면 '하나님'과 '돈'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것입니다. 돈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그만큼 중요한 것이 맞지만 섬김의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 돈 사이에서도 돈이 사람의 주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고, 돈의 논리에 따라가게 됩니다. 돈이 많으면 순식간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고개를 쳐들며 교만해지면서 남을 쉽게 무시합니다. 돈이 없으면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가슴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야 맙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다음 세대들마저도 돈의 위용과 위력 앞에서 벌벌 떠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사람들이 돈을 가장 큰 우선 순위로 놓고 추구하면서 생겨나는 결과는 점점 더 심해지는 사회적 양극화이고, 모두가 돈을 잘 벌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돈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주인이 된 세상은 그래서 너무나 삭막하고 사람다움이 점점 사라집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의 두 행렬 중 진실로 나사렛 예수의 편에 서겠다고 다짐하는 저는 오늘날 이렇게 강력한 금권의 유혹과 속임수 앞에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며, 또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지켜내고 보여줄 것인가를 정말로 깊이깊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느끼는 배신감]

그런데 종려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또 하나의 물음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며 왕이라고 했던 그 무리들이 나중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오늘 우리가 읽은 디도서에서는 크레타의 예언자가 크레타 사람을 두고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라고 고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이들도 전부 거짓말쟁이였단 말인가? 물론 요한복음서에서는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를 왕으로 생각했던 이들과 예수 대신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말한 이들이 같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가장 먼저 기록한 마가복음서는 놀랍게 같은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도 무리들이 이렇게 한 것은 제사장들의 선동 때문이라고 이유를 달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전혀 다른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환호한 것은 제자들뿐이고, 못 박으라 외친 이들은 제사장과 율법학자들과 제자들과는 다른 무리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서가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변호한다고 해도, 이들 또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배신하고 도망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간에 종려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저의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것은 바로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배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도저히 신앙인이라고 볼 수 없는, 예수님께 환호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디도서는 신앙인들, 신앙인들 중에서도 지도자가 되는 이들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도를 크레타에 남겨 두고서 각 성읍마다 교회의 지도자를 잘 세우라고 권면하면서 조언합니다. 당시 사회의 문화를 고려하면서 오늘날의 언어로 재해석해 보자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는 우선 최소한 자신의 가정을 신앙으로 이끌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3-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중심의 가정이었고, 가부장이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의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이루어졌지요. 그런 권력을 준 상태에서도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 공동체라는 더 큰 공동체를 이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자리가 주어졌을 때 일을 해내는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로 세워지는 사람은 우선 자신의 감정 조절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쉽게 성내거나 심지어 폭행을 일삼는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술을 즐기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술 자체야 문제될 일 아니지만 술에 취하면 실수가 잦으니까요. 바울 사도는 신앙인으로 리더가 되려면 부정한 이득을 탐하는 일 없이, 무엇보다 손님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며, 의롭고 경건하고 신중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이 사람이 건전한 교훈으로 권면할 때, 설득력이 있고 실제로 효과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서 강조되는 핵심은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매우 엄격한 도덕성입니다.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크레타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잘못된 지도자의 사례를 드는데, 첫째는 거짓말 하는 사람, 둘째는 죄악에 물든 사람, 셋째는 게으르면서도 먹기를 탐하는 사람 즉 불한당(不漢黨)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지도자가 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주장하면서도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비난은 매우 노골적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서 가증스럽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부탁하는 말들,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서 조언하는 말들을 듣다보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민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회에서 좋지 않은 일로 뉴스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날은 지식정보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누구나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기에 비그리스도인들도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사람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또 아는 만큼 교인에게 기대하는 바도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뉴스를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지난 3월 14일 황상무 시민 사회수석이 MBC를 포함한 대통령실에 출입하는 여러 언론사 기자들이 같이 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군대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MBC는 잘 들어"라고 말한 뒤, "내가 정보사 나왔는데 1988년에 경제신문 기자가 압구정 현대 아파트에서 허벅지에 칼 두 방이 찔린 사건이 있었다."고 하면서 "당시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로 기사 쓰고 했던 게 문제가 됐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기자들에게 겁을 준 것인데, 이 일로 시민사회 수석에서 물러나야 했지요. 이 사람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해서도 북한배후설을 언급하는가 하면,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 논란에 대해서도 "좌파가 놓은 덫에 걸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은 KBS 기자 출신이고 KBS에 있을 때는 기독신우회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모 교회 집사이기도 한 이 사람은 2007년 뉴욕특파원 파견 당시 "선교의 소명을 가지고 떠난다."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KBS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고 거기의 기자가 특파원으로 가면서 이것을 선교의 수단처럼 말해서 불교의 원성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힌 사람이 이런 무시무시한 말로 기자들에게 겁을 주려했다는 것이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또 이보다 더한 막말 때문에 국회의원 공천도 취소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장예찬 국민의 힘 청년최고위원입니다. 이 사람과 관련된 사태에 대해서 새물결 플러스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요한 목사님이 쓴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장예찬과 한국 극우 기독교]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고, 또 우리교회가 무엇에 더 힘써야 하는지 고민할 때 들어볼 만한 말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2512424962)

1. 프로 막말러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거나 수많은 구설수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장예찬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하다. ~ 중략 ~ 3. 내가 장예찬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는, 그의 발언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가 한국 극우 개신교가 만들어 낸 괴물(?)이라는 데 있다. 4. 장예찬의 부친은 목사라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된 것은 아니고 중년의 나이에 뒤늦게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는 독실한 개신교 집안 사람이다. 5. 여기서 '장예찬'이란 이름의 뜻이 자연스럽게 파악이 된다. 아마도 '예찬'이란 말은 '예수님을 찬양하라'란 뜻일 게다. 헌데, 예수를 찬양하라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내뱉는 말은 우리 모두의 귀를 의심케 하는 저질 언어가 대부분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발언 외에도, 그가 갖고 있는 역사관, 정치관, 시국관, 호남인에 대한 생각을 하나하나 검증한다면 그는 아마도 일베에 가까울 것이리라. 6. 하지만 나는 장예찬이란 인물이 지닌 극단적 우익 성향의 정치관-역사관-인물관이 순전히 개인적인 일탈에 의해 형성되었다기보다는, 한국 극우 개신교에 의해 만들어진 부산물일 것으로 본다. 즉 그는 한국 극우 개신교가 낳은 '아들'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7. 지난 100여년간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에서 형성된 한국형 극우 개신교를 짧게 정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몇몇 특징은 열거할 수 있다. 첫째, 이승만 때문에 대한민국이 공산화를 면했다고 확신한다. 둘째, 박정희 때문에 대한민국이 잘 살게 되었다고 맹신한다. 셋째, 일본의 식민지 지배 덕분에 대한민국의 근대화 기틀이 갖춰졌다고 믿는다. 넷째,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악의 축은 북한 공산당 집단이라고 믿는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사명은 영적 싸움을 벌려 북한 공산당과 그에 동조하는 사탄의 세력을 멸절시키는 것이라 확신한다. 다섯째,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여성과 소수자에 대해 어떤 제한을 두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여섯째, 예수를 믿는 목적은 현세에서도 복을 누리고, 죽음 이후 내세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기 위함이다. 일곱째, 내세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오로지 현세의 축복에만 전력투구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충실한 시녀노릇을 한다. 8.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등 외형적으로는 교파의 차이가 있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한국 개신교는 거의 다 극우 기독교다. 사실상, 장예찬이 발설한 위험천만한 발언들은, 상당수 한국 개신교의 목사들 모임에서나 심지어 설교단에서까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전광훈이나 장경동 같은 부류가 한국의 상당수 극우 목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목사들이 이를 따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이미 동일한 역사관-사회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이심전심'인 것이다. 9. 장예찬 같은 이는, 그런 한국 극우 개신교가 배출한 일종의 괴물일 뿐이다. 그리고 참으로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 그런 괴물이 제법 많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그들 중 꽤 많은 이가 개인적으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내는 데 반해, 유독 정치-역사-사회적인 문제에 도달하면 괴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교회 안의 열심 있는 신자들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10. 바로 '목사들'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식한 목사들'이다. 성경을 문학-역사-사회 비평의 관점에서 깊이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 거의 없는 자들, 따라서 오로지 문자적으로, 그것도 한글 번역성경의 문맥에 따라 자구적으로 이해하는, 신학적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수준의 성경 이해를 가진 자들. 지난 100년의 한국 역사를 통전적으로, 또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할 능력이 거의 없는 자들. 지적으로 게으르고 무능하면서 그러나 교회 안 마이크 권력을 독점한 채,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무식함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며 결국은 독재를 미화하고 일본의 침탈을 긍정하는 못난이들이 한국교회 요소요소에 포진한 채 '영적 전투'란 미명하에 신도들의 정신 세계를 교란하고 미혹하고 있다. 바로 이들 때문에 한국 개신교의 상당수가 거의 일베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전도와 선교의 문이 닫혀 버린 것, 그것이 지금 현실이다. 따지고 보면, 장예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런 일베 기독교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희생자가 어느새 가해자가 되어 또다시 수많은 이에게 자기 복제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베화된 극우 기독교, 한국 개신교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교회에도 사회에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김요한 목사님은 지금의 한국 개신교가 어떤 청년을 길러내고 있는지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민은 우리도 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건전한 믿음과 깨끗한 사람"입니다.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 즉 깨끗한 사람은 건전한 믿음에서만 길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개신교는 불건전하고 왜곡된 믿음, 한쪽으로 치우치고 편견에 사로잡힌 믿음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앞날은 어둡습니다. 불건전한 믿음에 사로잡힌 교회가 늘어난다면 그것은 더욱 걱정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적절하게 돈과 타협한 큰 교회가 더 성장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올바르게 정직하게 따르고자 하는 작은 교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중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건전한 믿음의 토대 위에 진실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인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희망이라는 말을 개신교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희망의 씨앗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더욱 힘을 냅시다. 자본주의의 허망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말씀을 깊이 있게 배웁시다. 배운 말씀이 우리 삶의 양식이 되고,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으로 작동하도록 우리 모두 실천합시다. 오늘 바울 사도는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깨끗하게 볼 줄 알고,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나아갑시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던 일을 떠올리며 우리가 의인 50명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유황불의 심판에서 건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신 하나님! 오늘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며 구원을 갈망했던 이들의 외침을 기억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오늘날도 고난 한복판에서 많은 이들이 구원자를 기다립니다.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구원자를 자처하며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 현장에서, 산업 현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도 마치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이 이룰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복판에 거짓과 속임수도 많다는 것 또한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가 말씀에 올바로 서서 참과 거짓을 잘 구별하게 하소서.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이하던 이들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렸던 일들 또한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전부 도망갔던 일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건전한 믿음, 단단한 믿음 위에서 깨끗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홀로 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며 기쁨이 되며 위로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받은 축복을 헤아릴 수 있어서 감사드리고, 하루를 마치며 당신의 은혜를 느끼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출근해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주신 것과 일할 수 있는 건강과 힘과 기술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 곁에 함께 해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계획과 약속 안에서 우리에게 선을 향한 영감을 불어 넣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고 생명사랑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주소서. 우리가 주님의 구원 활동에 한몫을 담당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칠 때, 예수가 지신 십자가도 함께 지겠다는 각오를 하십시오. 그 누구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하시고, 신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십시오.

* 축도

여러분 위로 아름다운 성령의 바람이 불기를,

여러분 곁에 약동하는 생명의 영이 계시기를,

여러분 안에 따스한 온기와 치유하는 숨결이 있기를,

여러분 둘레에 활기찬 웃음과 함께 맞잡은 손길들이 있기를 빕니다.

이제는 우리의 지난 세월을 지켜 주시고,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의 앞길을 밝혀 주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이 건전한 믿음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생명사랑 모든 믿음의 지체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는 전국의 모든 성도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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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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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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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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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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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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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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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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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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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