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위임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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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1:26-28, 골로새서 1:15-17, 요한복음 20:21

설교문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10월은 오곡백과가 풍성함을 자랑하는 달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연이 또 한 번의 치열한 삶을 마감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이, 만족과 겸손이 공존하는 달이 10월입니다. 무엇보다도 10월은 아쉬움의 달입니다. 올해만은 꼭 잘살아봐야지, 굳게 마음먹었던 계획은 하루하루 버거운 살림살이에 이미 잊었는데, 인생이라는 기차는 어느덧 또 하나의 정거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10월이 내 단풍나무 잎을 황금색으로 물들였네. / 이제 거의 다 떨어지고 여기저기 한 잎씩 매달렸네. / 머잖아 그 잎들도 힘없는 가지로부터 떨어질 것. / 죽어 가는 수전노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동전처럼." (토머스 베일리 올드리치, <10월>) 어느 시인의 '10월'입니다. 마지막 남은 잎새를 바라보며 시인은 사람이 아무리 움켜쥐어도 결국은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갈 것을 깨닫습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합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편 90:2) 했습니다. 그래서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시편 146:10) 선언합니다. 한마디로 성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합니다. 오늘의 교독문처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시편 97:1)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본래 '내꺼'는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지만, 7080세대가 젊었던 시절에 사귀는 애인이 있는지 궁금할 때 '쟤 누구꺼니?'라고 묻곤 했습니다. TV 개그 프로그램에서나 유행가 가사에 '내꺼 니꺼'라는 용어가 흔했습니다. "젊은 여자 개그맨이 TV에서 연애시절 받은 편지를 읽는다 /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니꺼가] / 세 음절의 그 말을 힘주어 읽은 후 어깨를 편다 젊은 남자 가수가 / 노래를 한다 밥을 먹다가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멍해진다 / '내꺼 중에 최고'가 노래 제목이다 내꺼 중에 최고..."(김선우, <내꺼>) TV 앞에서 밥을 먹다 멍해진 시인이 곰곰이 생각한 다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 / 내 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 늘 도 다 만 사 랑 한 다..."

미국 정부가 스쿼미시 인디언들에게 그들의 땅을 매입하고 새로운 보호구역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을 때 인디언 추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하늘, 그리고 땅을 팔고 살 수가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아주 이상한 생각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팔 수 있다는 말입니까?"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더 정확히는 교회개혁주일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유럽에는 다른 종교가 없었으니까요. 저는 이번 학기에 대학원생들과 종교개혁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6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성당에 <면벌부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던 루터의 신학에 대해 꼼꼼하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땅에 개신교회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회자 될 인물입니다. 그런데 루터를 공부하면 할수록 교회개혁의 뿌리가 루터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95개조 반박문> 바로 앞에는 '반란의 기준'을 제시했다는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 앞에는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종교개혁자 에라스뮈스가 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쓴 <엔케리디온>이 있었습니다. '단검'(短劍)이라는 뜻입니다. 루터와 에라스뮈스 앞에는 체코의 후스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 시간에 모든 회중이 맘 놓고 찬송가를 자기 언어로 부를 수 있고, 성만찬 시간에 떡만이 아니라 포도주까지 받게 된 건 후스 덕분입니다. 결국, 산 채로 화형당한 그가 1413년에 쓴 <성직매매론>은 지금 읽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 쓴 글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개혁의 맨 처음은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불리는 영국의 위클리프에 이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에 태어난 존 위클리프는 가톨릭교회의 핵심인 성만찬 신학을 비판하고 성서를 영어로 번역해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죽은 지 30년 후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습니다. 그의 뼈는 난도질당해 불에 태워졌고 가루로 부서져 탬즈강에 버려졌습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깊은 뿌리는 이 위클리프가 1375년에 쓴 논문 , 즉 <하나님 주권론>에 가 닿습니다.

위클리프는 <하나님 주권론>에서 너무도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은 피조세계 모든 주권의 토대이며, 그 반대는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주권을 행사할 잠재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주권은 '일시적 대여'일 뿐입니다. 인간은 지고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 다음에 위클리프는 이듬해 쓴 , 즉 <시민 주권론>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한 것이므로, 교회든 시민사회든 모든 권력과 소유는 그것을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때에만 정당하다!" 무슨 말입니까? 만약 교회든 시민사회든 권력을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지 않으면 그 권력은 박탈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쯤 되면 교회지도자들은 '나랑 싸우자는 말이지?'라고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위클리프의 사상은 '위임' 사상입니다. 종교개혁신학의 가장 깊은 뿌리는 '위임' 사상입니다. 위임(委任)이 무엇입니까? 어떤 권리나 권한 혹은 임무를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위임은 맡김입니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맡겨진 권리나 권한 혹은 임무는 본래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맡겨진 것입니다. '내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 힘(power)을 행사하도록 위임(empower)받았을 뿐입니다.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구별되어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들도 "위임 받은 제사장들"(민수기 3:3)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나에게 행하게 하라"(출애굽기 28:41)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학개도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했다]"(학개 1:13) 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더욱 놀라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당신이 위임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성서는 분명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합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처럼,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로새서 1:15-17) 이렇듯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뭐든 맘대로 하실 수 있는 분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한 6:38)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 4:34) 하셨습니다. 이렇듯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요한 8:42)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심지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하시며 "나는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한 5:30) 하셨습니다. 만물의 주권자 되시는 예수께서는 이렇게 철두철미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시며 자기 뜻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행하려 하므로 당신의 심판이 의롭다 하셨습니다.

여기에 위클리프가 말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은... 그것을 소유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때에만 정당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주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지, 아니면 그 밖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주권이 자기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주신 이의 뜻대로 하려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위클리프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종인 한 주권자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갑자기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요한 13:3-5)하셨습니다. 다 닦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새번역) 보십시오. 만물의 주권자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자기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 10:45)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친히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종교개혁자 영국의 존 위클리프가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종인 한에서만 주권자다"라고 말했을 때의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합니다.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은 다 주께 속하였으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여호와여,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이 주께 있습니다"(역대기상 29:11, 새번역)라고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즉 주기도문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끝납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십니다]."(욥기 25:2)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골로새서 1:15)이신 예수께 위임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다시 이 능력을 우리에게 위임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처음 하신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 20:21)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창세기 1:26) 권세를 위임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위임받은 이 권세는 시몬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뽑아 들었을 때의 그 권세가 아닙니다. 폭력으로 위협해서 얻을 수 있는 권세가 아닙니다.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어야 유지할 수 있는 권세가 아닙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 1: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위임받은 권세(exousia)는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신 그 권세, 제자들의 발을 닦으시며 본을 보여주신 그 권세, 곧 자기를 희생하는 주권적인 사랑과 섬김입니다.

어느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제목은 "이런 교회는 가지 마세요"이고 부제는 "이사 가든, 이민 가든"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기 교회 큰 건물 가졌다고 자랑, 담임목사가 자기 잎으로 자기 유명하다고, 능력 있다고, 교회 헌금 많다고 자랑, 유력한 인물들이 교회에 많다고 자랑, 목사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교회는 가시면 안 됩니다. 왜요? 복음의 반대는 자랑이기 때문,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늘 힘을 과시하는 것. 어린 양을 사모하는 교회로 가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는 교회로 가십시오. 그런 교회, 그런 성도가 되십시오."

산책하다 보면 가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듣는 사람을 봅니다. 조용히 산책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공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훈련받지 못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집에서의 행동 방식과 지하철이나 식당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하는 행동과 다르다는 것을 배웁니다. 인간에게는 사적인 친밀감과 공적인 처신이 함께 필요합니다

신앙에도 공공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죽어서 천국 간다는 말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 고백하기에, 세계 전체를 보는 인식의 근본적 변화를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성숙할수록 하나님과 더욱 사적인 친밀감이 깊어져 갈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공공 의식과 책임감도 더 견고해져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라 했습니다. 에클레시아란 본래 그리스의 '민회'(民會)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모든 시민이 광장에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함께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 의사 결정을 하는 모임을 민회라 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바로 이 민회, 즉 에클레시아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거룩한 공회" 즉 거룩한 공(公)교회입니다.

영어에 "nepot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족벌주의'라는 뜻으로 정치나 경제, 스포츠나 종교 등 각 영역에서 자기의 친족이나 학벌 등 가까운 사람들을 중용하는 행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중세교회의 교황과 주교들이 자신의 "nepos", 즉 조카들을 고위 성직자로 세운 데서 유래했습니다. 공적인 기관인 교회가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온상이 되고, 주님의 교회가 인간의 기관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거룩한 공교회가 '내꺼 니꺼'가 된 것입니다.

실로 중세교회에서 성직자들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성경을 잃고 해석하는 권한을 성직자들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결정은 곧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되어, 아무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내 교회는 성직자들에게 집과 같은 사적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개혁자들은 교회도 성서의 권위 아래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교황도 성서의 권위 아래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교회가 가진 권세가 교회지도자들이 소유한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지도자들의 사적 기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재천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교회의 공공성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교회)개혁(The Reformation)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나의 생명도, 내 가족도, 나의 일터도, 내가 몸 붙여 사는 지구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내 자식도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내꺼'가 아닙니다. 어느 시인이 말했지요.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 그들은 당신을 거쳐 태어났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에게 속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 당신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 / 생각을 줄 수는 없습니다... / 당신은 아이들에게 육체의 집을 줄 수는 있어도 / 영혼의 집을 줄 수는 없습니다... / 당신이 아이들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건 좋지만 / 아이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 하지는 마십시오..."(칼릴 지브란, <당신의 아이들은>)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피조세계 모든 주권의 토대이며, 그 반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때에만",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할 때만 그 주권은 정당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 4:18-19)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 20:21) 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어머니로, 아버지로, 자녀로, 교사로, 또 여러 직분과 직책으로 보내시고 당신의 주권을 위임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위임받은 권세는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처럼 사랑과 섬김의 권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종인 한에서만 주권자"입니다. 이 종교개혁의 정신을 실천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혜와 믿음과 사랑, / 땅과 햇살과 바람은 / 사람의 것이 아니라 /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 영원히 받은 것이 아니라 빌려주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내 것이라 자랑하지 말고 / 탐욕을 가지지 마십시오. / 오직 겸손히 받아 / 감사하게 사용하십시오." (이주연, <빌려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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