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만능열쇠를 얻는 법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마태복음서 18장 10-20절

설교문

[<랜선 사회>의 등장]

우리 교회는 부서와 신도회, 아가페 모임 이외에도 다양한 소모임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저도 꾸준히 참여하는 청년회 독서 모임이 있는데, 어제 새로운 책을 시작했습니다. 책 제목은 <랜선 사회>이고, 부제목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종종 말씀드렸지만, 현대인은 세 가지 세계를 동시에 살아갑니다. 첫째는 물리적 토대를 지닌 실재 세계입니다. 둘째는 느끼고 생각하는 인간만이 지닌 신념 세계입니다. 셋째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지는 가상 세계입니다. 이 세 가지 세계는 서로 얽혀 있고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우선 우리가 만나는 물리적 시공간에서 몸을 가진 우리가 겪는 모든 실재 세계는 객관적으로 동일한 지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태양계의 아름다운 생명의 별 지구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구는 산과 바다, 평야와 사막, 열대 지역과 한대 지역 등등으로 나뉘면서 저마다의 삶의 환경이 조금씩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여 사는 마을들의 지리적 환경, 정치-문화적 토대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형성합니다. 촌에 사는 사람과 도시에 사는 사람의 신념 체계가 다르고, 해양 문화와 대륙 문화의 가치관도 많이 다르지요. 이렇게 실재 세계는 우리의 신념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반대도 성립합니다. 똑같은 물리적 환경 속에 있어도, 그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고 느끼는 주관적 신념 세계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실재 세계는 달리 보입니다.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이 풍부하고, 변화의 의지가 강한 사람은 자신이 지닌 신념으로 실재 세계를 바꾸기도 합니다.

이 둘 사이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닌데, 인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온라인 공간이라고 하는 가상 세계마저 만들었습니다. 온라인 공간은 실재 세계가 주지 못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지난 코로나를 겪으며 너무나 급작스럽게 겪었지만, 온라인 시공간은 실재 세계의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서 인간이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직장에 가지 않아도, 함께 한 공간에 모이지 않아도, 기존의 학습과 사무와 모임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랜선 사회>라는 책은 이 온라인 공간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온라인 공간에서 공동체를 꾸려갈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거기에서 어떤 지식을 창조하는지, 어떤 협업이 일어나는지 등을 서술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부분에 꽤 신경을 쓰고 있기에 저도 기대를 하며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어제 읽은 부분은 온라인 모임의 공동체성을 평가하고, 온라인에서의 협업이 어떤 결과를 낼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상 세계의 공동체 꾸리기]

오늘 설교에서는 공동체와 관련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책의 내용 중 제가 인상 깊었던 몇 가지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와 연결하면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지, 참 좋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가상 세계의 등장 자체가 놀라운 변화이고, 새로운 현상이기에 이것에 적응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매우 큰 문화적 차이와 삶의 양식의 경계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디지털 원주민으로 태어나는 세대는 가상 세계가 실재 세계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상 세계의 등장은 새로운 계급과 새로운 인류를 만들었습니다. 휴대전화와 같은 단말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각종 컨텐츠(contents)를 얻어 활용할 수 있는 사람과 손 편지를 써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인의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축적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라인상에서 꾸려지는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느슨한 유대"라는 것입니다. 몇 년간 만나지 않은 어린 시절 친구나 전 직장 동료, 한두 번 만나본 친구의 친구 같은 관계로, 어찌 보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지인들, 아니면 몰라도 되는 사이이지만 연결 되어 있는 그런 관계입니다. 기존의 끈끈한 관계를 지향했던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관계는 공동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런데 온라인 상에서 이런 느슨한 유대 관계는 놀라운 힘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느슨한 유대 관계일 때 더 광범위하고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느슨한 유대가 서로 분리된 사회 연결망을 다시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며, 순식간에 많고 다양한 정보나 좋은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혈연이나 지연, 학연 등으로 인한 긴밀한 관계는 밀도 높은 관계 때문에 기존의 관습에 순응해야 하는 상황이 많고, 자유로운 의사소통도 방해하는 반면 온라인 상에서 느슨한 유대 관계는 비슷한 사회적 계급의 테두리를 벗어나 중립적인 지대에서 매우 자유롭고 평등한 정보 공유와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거나, 문제 상황을 해결할 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집단 지성이 발휘되고, 문제 상황에 대한 객관적 진단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을 통해 실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상 세계가 등장하기 전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한 분들은 여전히 온라인 공동체에 소속되고 거기의 구성원들과 매우 느슨한 유대를 맺는 것이 매우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불편함을 없애고, 보다 더 전문적인 고급 정보와 지식을 얻으며, 삶의 외로움과 힘든 시기를 극복하려 할 때도, 온라인 공동체의 느슨한 유대는 매우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여지없이 보여 줍니다.

그런데 제 흥미를 끌었던 지점은 온라인 공동체에서도 역시 대면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소속하는 정도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는 지도자가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는 사람, 구경꾼처럼 주변에 머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역시 온라인 공동체도 마찬가지이고, 공동체의 활력은 역시 적극적 참여자 즉 "고인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도자 또한 공동체의 생존에 있어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온라인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을 격려하며, 선택의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며, 그 선택에서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최종결정권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성원 전체를 잘 돌본다는 측면에서 지도자는 자애로워야 하지만, 최종 결정에 있어서는 반대를 무릅쓰고 독자적인 결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책에서 지도자는 자애로운 독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공동체의 목적에 가장 알맞은 최고의 지식과 능력이 있으며, 구성원들이 제안하는 좋은 아이디어들을 구별할 줄 알고, 마지막으로 대인 관계 기술이 좋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온라인 공동체에서도 잘 듣는 경청의 기술은 여전히 중요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정보와 경험의 노하우를 가진 이들의 자발적 헌신은 그 공동체가 잘 되게 하는 샘물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책의 1, 2장만 읽었지만, 우리가 기존의 끈끈한 공동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느슨한 유대로서의 관계의 장점도 잘 인정한다면 교회 공동체도 얼마든지 유연하게 하나님 나라의 선교 사역과 목회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하고 있는 온라인 사역은 여전히 중요하고 이것을 좀 더 촘촘하게 점검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매주 한 공간에 직접 모이고 함께 한 몸처럼 예배하고 활동하는 실재 세계에서의 만남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온라인 공동체가 과연 실재 모임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을까를 두고 청년들과 함께 서로 여러 의견을 나누었지만, 저는 온라인 공동체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과 인공지능의 놀라운 등장으로 인해서 이전의 모둠살이와 전혀 다른 삶이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빅 데이터 전문가이고, 다음소프트 부사장인 송길영 씨는 지금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를 넘어서 핵 개인의 시대가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혼자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이미 누구든 혼자 살아도 크게 어려움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온라인 공동체에 익숙해지는 것, 가상 세계를 잘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재 세계의 모임 또한 여전히 지속될 것이고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이들로서 하나님의 한 가족을 꾸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들이 어떤 공동체를 꾸려야 하는지 아주 잘 보여줍니다.

[잃은 양의 비유]

오늘 말씀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잃은 양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서에도 똑같이 나오는데, 마태복음서와 강조점이 약간 다릅니다. 누가복음서에서 잃은 양 비유는 잃은 동전과 잃은 아들의 비유와 함께 잃었던 것을 되찾은 이의 기쁨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잃은 양을 죄인으로 곧바로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라는 누가복음의 말씀에 따라서 잃은 양을 죄인으로 치부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누가의 신학이 가미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잃은 양이라고 하셨을 때 잃은 양은 죄인이라기보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 질병이나 사회적 불행, 가난과 약함으로 인해 당시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누가복음서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찾아서 다시 공동체 안으로 되돌렸을 때 아주 흐뭇해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공동체는 이 비유를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또 이 비유를 마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서는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매우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에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혹시나 뒤처지고 소홀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구체적으로 돌보라는 것이 마태의 강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을 내세우는 종교이고, 또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의 그 사랑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입니다만,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누군가를 소외시키기 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모일 때, 누군가는 소외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챙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삶을 살기 때문에 상대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겸손하게 서로를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다 아는 것인 양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말로 담을 수 없이 복잡다단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의견이 분분할 때 흔히 사용하는 것이 다수결입니다. 다수결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언제나 다수에 들지 못하는 소수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어야 합니다. 숙고하는 시간과 서로 충분히 상대의 의견을 듣고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은 채 행하는 다수결에 의한 표결은 공동체에서 잃은 양들을 계속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의견에 따른다 하여도 늘 소수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다수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 소수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할 때도 있고, 창조적 소수가 새 시대를 열어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늘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도 있습니다. 소수가 큰 소리로 너무 강력한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다수가 소외될 수도 있습니다. 독재자가 다스리는 곳이 그렇지요. 그러나 이럴 경우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완고하여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다고 하는데도 그 사람은 불평을 하고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너무 쉽게 "저 사람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치리회를 열어서 출교를 시키기도 하지요.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교회에서는 가능한 소수 의견도 깊이 청취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떤 교인이 한 부분에서는 말썽을 부리고, 온 연못을 흐리는 미꾸라지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완벽한 악인은 없는 법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품겠다는 의지와 노력 속에, 그 사람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와 설득의 과정에서 공동체는 성숙할 수 있습니다. 길을 잃은 양을 온전한 길로 되돌리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방 사람과 세리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람은 피해 당사자]

15절부터 17절에 있는 말씀은 마태 공동체가 한 마리 잃은 양을 어떻게 찾아가는지에 대해 하나의 예가 됩니다. 한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 나오지는 않지만, 이것저것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돈 거래를 하고 갚지 않았다든가, 거짓말을 했다든가, 서로 다투고 싸움이 일어났다든지, 다른 교인에게 험담을 늘어놓았다든지 하는 것들이지요.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두 교인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반드시 거기에는 고통이 따르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생깁니다. 때로 둘 다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세세히 살피면 이런 지점에서는 A가 피해자이고, 저런 지점에서는 B가 피해자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피해를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쓰인 글입니다. 첫번째 해결책은 당사자 간 해결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나 이런 이런 일로 내가 피해를 입었으니 당신이 나에게 사과하고 적절히 보상하고 그 행동을 고치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했을 때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그 가해자는 이제 더 이상 가해자로 남는 것이 아니고 그 피해자와 함께 믿음의 형제자매로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오늘 성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형제로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해자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보통은 핑계를 댑니다. 또는 자기가 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럴 때는 가해 사실을 증언해 줄 한두 명을 데리고 가서 두세 사람의 증인으로 세우고, 그를 설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피해자는 계속해서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 죄를 짓는 형제들이 없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죄짓는 일이 계속 생기면 결국 공동체 전체에 해악이 될 것입니다. 또 레위기 19장 17절은 이웃이 잘못을 하면 반드시 타이르라고 하고, 누가복음 17장 3절도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으라고 합니다. 이 모두가 죄로 인한 고통을 없애기 위한 노력들입니다.

두세 사람이 가서 증언을 해도 듣지 않을 경우는 이제 교회 전체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이제 피해자의 말을 들은 교회는 이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마음을 완고하게 먹고 교회의 이야기도 듣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 우리는 교회가 책벌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법에 따르면 당회를 통하여 치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단의 헌법에는 엄격하게 경고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권계(勸戒)와 스스로 근신하여 회개토록 하는 견책(譴責)이 있고, 이 때 회원권이 유보됩니다. 더 심한 경우는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수찬정지를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일 엄중한 벌은 출교로 교회의 회원권을 박탈하고 성도의 모든 교제도 단절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전체의 재판과 책벌 전에 여러 단계를 거친 노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끝까지 교회의 권면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경우라도, 출교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주어가 빠져 있습니다. 원문에는 있는데 번역하면서 누락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깁니다. 원문을 보면 주어는 교회가 아니고, 바로 피해자입니다. 즉 피해자는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을 믿음의 형제자매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된다고 교회가 허락하는 것이지요. 교회는 여전히 그 가해자를 품고 있습니다. 여전히 한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다른 이들과는 성도의 교제가 일어날 수 있는 화해의 공간을 열어 둡니다. 그 사람의 죄를 그치게 하려는 노력이 공동체로부터 추방해서 그 사람의 삶을 파괴하게 되는 자리에까지는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피해자는 억울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교회 차원에서 더 강한 책벌을 해 주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의 선택은 다릅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 않은가? 당신도 죄를 범할 수 있지 않은가? 이번에는 당신이 피해자이지만 혹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였던 적이 있지 않았는가?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 우리는 용서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태복음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많은 말을 우리에게 합니다.

이번에 성경을 읽으면서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자세로 잘못한 사람, 죄를 지은 사람, 못난 사람, 약하기 때문에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고 쉽게 분노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 모두를 가능하면 끌어안으려는 공동체에게 만능열쇠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어느 누구도 업신여김을 받거나 작아서 망하는 일이 없게 하는 공동체, 끝까지 용서하고 죄를 그치게 하고 올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해 보려는 노력을 하는 공동체에게 바로 땅과 하늘을 풀고 매는 열쇠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하려는 사람들이 두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바로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그런 두세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18절부터 20절의 말씀은 바로 앞 구절과 연결 지어 읽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냥 두세 사람이 모인다고 예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모여서 마음을 모아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반목하고 험담하고 서로 불신하면서 겉으로만 모인다면 어찌 거기에 우리 주님이 계실 수 있겠습니까? 만능열쇠를 얻는 법은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시다. 소중히 생각합시다. 실수하는 존재들이니 작은 실수는 못 본 척 눈감아 줍시다. 너른 아량으로 품어주고, 반듯한 말로 조언해 줍시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가 서로를 잃지 않으려고 할 때, 혹 잃은 양이 있다면 그를 찾아서 온 식구들이 나설 때 주님께서는 땅과 하늘을 매고 푸는 만능열쇠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셨으니, 우리가 그 은혜를 나누는 자가 되게 하소서.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을 보게 하소서.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 주고, 기다리며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제자리를 찾도록 서로 돕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판단과 심판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더욱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려고 애쓰기보다는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게 하시고, 그 들보를 빼내기 위해 매 순간 정진하게 하소서. 작은 자들이 망하지 않게, 그 누구도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 없게 하려는 우리 곁에 주님께서 계심을 압니다.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어 사랑 넘치는 교회, 생명을 살리는 생명사랑교회 가족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맑은 가을 하늘, 선선한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의 전에 불러 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때로 배고픔을 느껴 겸손할 수 있는 마음 또한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주시고, 우리 맘에 진리를 향한 갈망을 주셔서 또한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때때로 참 견디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넘어져도 일어날 힘을 주소서.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고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의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결실의 계절에 우리 믿음의 열매들을 생각하며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는 야훼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오니, 이 예물을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특별히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십시오.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에게도 창조주의 숨결이 담겨 있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 축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지식과 사랑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과 은총과 능력이 고난 가운데에서도 신실한 믿음을 지키며 잃은 양을 찾아 길을 떠나는 목자의 심정으로 모든 이에게 나아가는 생명사랑교우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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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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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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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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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