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선택과 거절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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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21:8-13, 에베소서 2:14-18, 먀태복음 5:43-48

몇 년 전,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한 제주도에 500여 명의 예멘 사람들이 입국하여 난민 신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찬반 여론이 뜨거웠습니다. 그때 절대로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하면 안 된다는 청와대 청원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사람의 대다수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들이 난민이라기보다 취업을 노리고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면의 실제 이유는 그들이 대개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입니다.

서방 언론은 이슬람에 '잠재적 테러리스트' 이미지를 덧붙여 놨습니다.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슬람 자체가 악마적인 종교라고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느 종교든 근본주의는 위험합니다. 이슬람 근본주의든, 힌두교 근본주의든, 기독교 근본주의든 다 위험합니다. '우리'(us)는 선하고, '저들'(them)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분법은 증오와 혐오를 일으키고 폭력과 전쟁을 불러옵니다.

"두 사람 모두 밤낮으로 성경을 읽었는데 당신이 검정이라고 읽은 것을 나는 하양이라 읽었다"라고 윌리엄 블레이크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은, "양편 모두가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각각 상대방을 무찌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라고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은 생명의 '하나님 이름으로' 살인하고, 평화의 '하나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며, 사랑의 '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고, 자비의 '하나님 이름으로' 잔인한 행동을 할까요?

오랫동안 아브라함을 공동의 조상으로 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각각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유일한 언약의 상속자라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충돌해 왔습니다. 하지만 유대교 랍비이자 세계적 종교지도자 조너선 삭스(Jonathan Sacks, 1948-2000)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더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조너선 색스/김준우 옮김, 『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 (Not in God's Name: Confronting Religious Violence)』, 한국기독교연구소, 2022.)

아브라함의 두 아들, 즉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이야기는 이삭은 선택을 받은 반면, 이스마엘은 거절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이 이야기의 껍질을 벗겨내면 그 안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창 21:8-13)을 보니,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엽니다. 나이 100세가 되어 아내 사라를 통해 얻은 아들 이삭이 젖을 떼는 날이니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이 아님을 압니다. 아기를 갖지 못해 애를 태우던 아내 사라는 자기의 여종 이집트 여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 이스마엘을 낳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긍휼히 여기셔 돌보셨고, 사라가 임신하여 99세의 노년에 낳은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잔칫날, 사라가 보니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9절) 했습니다. '놀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메짜헤크'(metzachek)는 문자적으로 '웃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기뻐서 웃는 것부터 경멸해서 비웃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려서 사라의 감정이 상한 것인지, 아니면 이스마엘이 그 잔치에 참여하고 있어서 사라의 기분이 나빴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10절) 말합니다.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때 사라는 한 번도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은 '내 아들' 이삭과 같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이]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다]"(11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이스마엘]도 자기 아들이므로, 이 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새번역)라는 뜻입니다. 안 그랬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이미 노년인 86세였습니다.(창 16:16) 지난 14년 동안 귀하게 키운 아들이니 아브라함이 어찌 이스마엘을 '자기 아들'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깊은 근심에 쌓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이[이스마엘]나 네 여종[하갈]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12절) 네 씨라 부를 것이라는 말은 네 혈통을 이을 것, 혹은 네 후손으로 인정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그 옛날, 아이를 낳지 못하던 사라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으며, 더욱이 자신의 여종이 먼저 낳은 아들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라의 아픔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런데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라 말씀하신 하나님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이스마엘]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절) 하나님은 사라의 편을 들어주셨으나 하갈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번역의 성서가 더 명확히 하나님의 뜻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이스마엘]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새번역)

퍼뜩 우리는 창세기 안에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본문이 많고 특별히 길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이스마엘을 임신한 하갈이 여주인 사라(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처음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 수르(Shur)로 가는 광야 길, 그 죽음의 길 앞에서 주의 천사가 앞길을 가로막으며 집으로 돌아가라 하면서 이스마엘을 축복한 일을 기억하십니까? 주의 천사는,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창세기 16:10)라고 축복하였고, 자기의 고통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한 하갈은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엘 로이)라 찬양했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한 두 번째 축복은 이후 하나님께서 사라에게도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며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직후에 나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으며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하며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생각하고 하는 네 말도 들어주리라. 그에게도 복을 내려 자손이 많이 태어나 수없이 불어나게 하겠다. 그에게서 열두 영도자가 나서 큰 민족이 일어나게 하겠다"(창세기 17:19-20, 공동번역)라고 하십니다.

이스마엘에 대한 세 번째 축복은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 직후에, 그러니까 하갈이 이삭의 잔칫날 이후 쫓겨났을 때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잔치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했다]"(14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참 모자랍니다. 겨우 떡과 물 한 가죽부대라니요. 게다가 나귀 한 마리도 안 내어주고 그걸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었단 말입니까. 결국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하갈이]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울었다]"(16-17절)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뜻이 '하나님께서 들으셨다'인데, 하나님은 다시 그 아이의 신음을 들으셨습니다. 이제 세 번째의 축복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8-19절) 그리고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자 샘물이 보이고, 하갈은 얼른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다 했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다]"(21절)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선택'하셨으나 이스마엘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삭과 언약을 세워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하셨지만,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창 17:20) 하셨습니다. 창세기는 '선택과 거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을 자기 읽고 싶은 대로 읽는 사람은 하나님은 이삭을 사랑하셔서 이스마엘을 버리셨다고 믿고 싶겠지만, 창세기는 이스마엘을 헐뜯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형제자매 사이에 화해와 평화 그리고 번영을 이야기합니다.

살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보고 사는 게 아니라 꼴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게 되고 때론 원수를 지기도 합니다. 사실 좋은 사람은 좋아하고 싫은 사람은 싫어하며 살면 얼마나 속 편하고 솔직하겠습니까. 어느 시인은 "미운 놈은 미워하며 살라" 했습니다. 속이 다 후련해집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참 난감한 요구를 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3-44)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라 하시면서,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마태 5:45)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에게만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도 해를 비추시고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려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 5:46-48, 새번역)

사람들은 각각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강변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누가 6:35b) 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다"(시편 145:8)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경계'를 넓혀야 합니다. '내' 가족, '내' 애인, '우리' 교회, '우리' 학교, '우리' 고향 사람이니까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외면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 1서 4:8) 그런데 이 사랑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오직 나만 사랑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시지 않으신다는 게 과연 말이 됩니까? 그럼에도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 이름으로' 혐오를 부추기고, '하나님 이름으로' 잔인한 행동을 하게 하며, '하나님 이름으로' 살인하고, '하나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십계명의 제3계명을 어기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20:7 / 신명기 5:11)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은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은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誤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 때문에 심지어 성경을 읽다가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네 글자(Tetragrammaton) 'YHWH'가 나와도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이 낱말을 발음하는 대신에 'Adonai'(나의 주님)이라 바꿔 불렀습니다. 본래 히브리어 글자에는 모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 네 글자를 계속 부르지 않자 나중에는 그 이름의 본래 모음까지 잊어버렸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네 자음의 본래 발음이 'YaHWeH'(야훼)이었으리라 추정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옛날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한 거짓 예언자들을 신랄하게 꾸짖으시는 말씀이 예레미야 23장에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보라 거짓 꿈은 예언하여 이르며...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게 사용함이니라."(예레미야 23:16-40)

종교가 폭력으로 변질될 때는 혐오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성한 것으로 만들 때입니다. 종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내 편과 저편, '우리'와 '저들',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으로 나눌 때 폭력이 시작됩니다. 히틀러가 세운 나치즘은 완벽히 병적인 이원론이었습니다. 독일 민족,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아리안족은 빛의 자녀이고 유대인들은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영어로 '종교'(religion)라는 말은 '결합하다' 혹은 '묶는다'를 뜻하는 라틴어 '리가레'(ligare)에서 나왔습니다. 흩어진 것들을 하나로 묶고 결합하는 게 종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나누고, 분열시키고, 흩어버린다면 그것은 참 종교가 아닙니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사랑과 자비, 희생과 자선 같은 숭고한 것들을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숭고한 것들이 자기 울타리 안에만 적용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우리'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심어서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고도 말합니다. 외국인이 들으면 한국은 일처다부제 혹은 일부다처제인 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리'라는 말의 어원 중 하나는 '울타리'입니다. 돼지우리, 가축우리는 각각 돼지와 가축을 가두는 울타리입니다. 울타리는 울타리 안의 사람과 울타리 밖의 사람을 가릅니다. 울타리 안의 사람에게 그것은 보호막이 되지만 울타리 밖 사람에게 그것은 차단막이 됩니다. 그래서 울타리 안에의 지극한 사랑은 울타리 밖에서 지독한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유대인 절멸에 동조하며 환호했던 나치시대 독일의 그리스도인, 원시적 무기를 들고 투치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르완다 후투족, 그리고 오늘날의 무자비한 자살 폭탄 테러범들은 모두 자기 울타리 안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울타리 밖에 '지독한 증오'를 보여준 사람들이었습니다.

평화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종교부터 제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듣고 싶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요리조리 훼손하는 일부터 중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최고의 사람들은 확신이 부족한 반면에 최악의 사람들이 열정으로 가득할 때 종교적 극단주의가 날뜁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선택하셨으나 이스마엘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혐오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갈등과 분열과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빌립보서 2:7, 현대인의 성경) 이 땅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사람 사이를 가르는 [울타리를]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 화해시키[신]"(에베소서 2:14-16) 분입니다. 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평호가 우리에게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마태 5:9)이 되십시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십시오.]"(이사야 2:4) 믿음은 타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보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 악한 자와 선한 자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보라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 133:1) 했습니다. "사랑의 주 평화의 왕 우리 중에 오셔서 모든 싸움 다 그치고 하나 되게" 하시니 "우리에게 하나 되라 분부하신 [이] 주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뤄지게"(찬송가 462장) 함께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빌립보서 4:7)가 여러분 안에 그리고 광복 78주년, 분단 78주년을 맞이하는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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