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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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봉독

창세기 16:7-14, 로마서 8:24-28, 누가복음 7:11-16

애굽(이집트) 여인 하갈은 서러운 마음에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쳤습니다. 정작 하갈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건 사래의 학대보다 아브람의 태도였습니다. 그의 아기를 임신한 하갈이 아닙니까. 그리고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주인 사래가 스스로 아브람의 첩이 되라고 주선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아브람이 하갈을 좀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하갈은, 성서가 기록한 대로, 자기가 임신함을 알고 여주인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사래는 자기 여종에게 모욕을 받았다고 느끼고 아브람에게 누구 편을 들 건지 태도를 분명히 밝히라 요구했습니다.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며 사래 편을 들었습니다. 결국 하갈은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너무 서럽고 화가 나서 도망쳤습니다.(창세기 16:1-6)

하갈의 분노하고 서러운 심정은 그녀의 발걸음을 브엘세바 남쪽 광야에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거기까지의 여정이 녹녹치 않았으나 점점 고국 땅에 가까이 갈수록 그동안 아브람과 사래의 집에서 이방인으로 겪은 아픔이 풀리는 것 같아 그 길을 헤쳐 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 시절에 주인집을 뛰쳐나온 노예의 결기도 대단했지만, 그 척박한 광야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생명은 유지하는 능력은 여성으로서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더 이상 여정을 지속하다간 그녀 자신은 물론 태아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옵니다. 광야의 샘물 곁에 지쳐 쓰러져 있는 하갈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에 선 하갈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창 16:8) 마지막 우물을 지나 애굽(이집트)의 국경도시 슈르(Schur)로 향하는 광야 길, 죽음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그녀에게 던져진 질문입니다.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여전히 분노와 서러움과 혈기가 가시지 않은 하갈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

집에서 뛰쳐나와 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행복해야 할 집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도망친 적이 있습니까. 내 한 몸 스스로 건사 못하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박차고 나온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갈 데 없어 밤새 어두운 골목길에서 웅크려 잔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갈의 길을 막았습니다. 주인집을 뛰쳐나온 결기도 대단하고 광야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생존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나 더 이상 여정을 지속하다가는 그녀 자신은 물론 태아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하나님은 하갈의 앞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여정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물론 그 길은 당장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박해가 기다리고 있는 길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길이 지금은 물론 앞으로 미래를 사는 길이기에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했습니다. 지금 굴욕을 참고 견뎌서 생명을 보존하라 하셨습니다.

물론 예상했던 일은 일어났습니다. 사래의 박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하갈은 다시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땐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돌아가라 하지 않으십니다.(창 21:9) 이번에는 아직 때가 아니기에 돌아가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렇게 우리의 앞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빈손으로 하갈을 돌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라고 말한 여호와의 사자는 이어서 하갈에게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축복하며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 16:11) 이야기합니다.

하갈은 감동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고통을 들으셨다"라는 말에 모든 아픔이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아무도 자기 고통을 몰라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자기 신음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통과 신음을 듣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가 낳을 아이의 이름을 '이슈마엘', 곧 '하나님이 들으심'이라 이름 지으라 합니다. 이 세상 아무도, 심지어 자기의 아기를 임신한 아브람도 자기의 아픔과 서러움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개했는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자기 처지를 다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나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살피시고 계셨습니다. 하갈은 생의 가장 절박한 순간에 자신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의 입에서 이런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은 구약성서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엘 로이'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엘 로이는 하갈의 하나님입니다. 하갈이 체험한 하나님입니다. '엘 로이는 영어로 "God who sees me"입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공동번역 성서는 '나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으로, 새번역 성서는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라 하였고, 그리고 개역개정 성경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번역했습니다.

'보다'(see)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지켜보다, 살피다, 낱낱이 세다, 돌보다, 보살피다, 알아주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엘 로이는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나를 살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형편과 처지를 낱낱이 아시고 다 헤아리시며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살피다'라는 말은 '주의하여 잘 둘러보다'라는 뜻이지요. '보살피다'라는 말은 '마음을 기울여 여러모로 돌보아주다'라는 뜻입니다. 하갈의 하나님, 곧 엘 로이는 나를 살피시고, 돌보시고, 알아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던 그 놀라운 샘물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입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이어서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던 시절을 기억하시는지요. 걸음마를 배우는 영아는 평균적으로 2,368 걸음으로 701미터를 걷고 한 시간에 17번 넘어집니다. 걷기는 다른 많은 기술의 습득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시간을 두고 자주 다양하게 반복하여 연습할 때 가장 큰 학습 효과가 일어납니다. 영유아들은 약 1년의 시간 동안에 수천 번을 걷고, 수천 번을 넘어지는 과정을 통해 넘어지는 횟수를 줄입니다. 그리곤 결국 자기의 두 발로 직립해 걷습니다. 이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까마득한 옛날 일이어서 기억조차 없으시겠지만, 내가 그렇게 수천 번 넘어질 때마다 항상 나를 일으켜 세워주던 그 손길을 기억하십니까? 행여 넘어져 코가 깨질까 종종 걸음으로 아기 곁을 지키며 붙들어주던 그 손길을 말입니다.

이 기억이 안 나신다면 걸음마를 배운 한참 후에 배웠을 법한 자전거 타기 때의 기억은 나십니까? 어릴 적 두발자전거를 처음 탈 때 뒤에서 잡아주던 그 손길을 말입니다. 뒤에 있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잡아주던 그 손길 말입니다. '절대 손 놓으면 안 돼'라고 내가 외칠 때 '꼭 잡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라고 했지만, 사실은 안장 밑에 손을 대고 있다가 넘어지려 하면 붙잡고 잘 나갈 땐 잡는 시늉만 하고 있던 그 섬세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기억하십니까?

하갈의 하나님 엘 로이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은 정말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라 물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나의 처지와 형편을 다 헤아리고 계시는 하나님, 나의 과거와 현재를 낱낱이 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나의 미래까지 보고 계시기에 때론 무모한 내 의지를 가로막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엘 로이 하나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하갈의 하나님입니다. 하갈은 죽음을 앞둔 그 광야 길에서 "이런 데서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뵙다니!"라고 감격하며 자기를 그렇게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나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 급합니다. 마음이 급하고 성질이 급해서 당장 무언가를 해내야 직성이 풀립니다. 유난히 성격이 급한 사람들도 있지요. 그로 인해 실수도 많이 하고, 큰 손해를 경험하면서도 쉽게 고치지 못합니다. 급한 성격 때문에 곤란한 일을 자주 겪는 어떤 사람이 어느 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발 제 급한 성격을 고쳐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성격 급한 한국인을 고문(?)하는 방법은 이렇게 쉬운 게 있다고 합니다. 1. 라면을 먹을 때 김치를 안준다. 2. 인터넷 속도를 모뎀시절(128kb)로 줄인다. 3. 식후에 커피를 못 마시게 한다. 4. 버스가 완전히 정차한 후에 일어나 내리게 한다. 5. 요구르트 먹을 때 뚜껑을 핥지 못하게 한다. 6. 엘리베이터 닫기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한다.

오늘 씨를 심고 내일 열매를 거두는 일은 없지요. 어둠 속 인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까지는 추위도 이겨야 하고, 어둠도 참아야 합니다. 그 시간 끝에 파란 싹이 기적처럼 눈을 뜨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위엔 다양한 자판기가 있어서 돈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내가 원하는 물건을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판기가 아닙니다. '기계장치의 하나님'(Deus ex Machina)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4-28)

바울은 우리의 하나님이 '마음을 살피시는 이'라 했습니다. 하갈의 하나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내 마음을 다 살피시는 하나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게 하신다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나 좋습니다.

'예수 사랑'의 정신을 말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다간 '남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를 보셨는지요. 이 영화 2부로 개봉한 <부활>이란 영화도 보셨는지요. 이 두 번째 영화는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 그의 어린 제자들이 어떻게 성장하며 어떤 기적을 일구고 있는지 조명한 영화입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이 두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가톨릭 신자도 아니고 개신교 신자도 아닌 불교 신자라는 사실입니다. 구수환 감독, 그는 불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한 가톨릭 사제의 삶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은퇴 자금을 털어서 이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두 번째 영화 <부활>을 만들 때, 구 감독은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 작은 학교를 짓고 가르쳤던 어린 제자들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찾아갔더니 의사이거나 의대생이 된 제자가 무려 57명에 달했습니다. 그 시골 작은 마을 허름한 학교에서 그 짧은 시간 안에 국립대 의대생이 57명이나 나왔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아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의사가 된 게 아니라 신부님 때문에 의사가 되고, 신부님처럼 살아가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구 감독은 제자들이 의사가 되어 병원에서 진료하는 모습을 찍을 때 특별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보통 의사는 환자를 만나 우선 '어디가 아프세요?'라고 묻는 게 상식인데, 이태석 신부의 제자 의사들은 우선 환자들의 손부터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아픈 사람들의 손을 먼저 덥석 잡고 한동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후에 진료를 했습니다. 왜 그러는지 궁금해진 감독이 이유를 묻자 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해오던 진료 방법입니다.'

손을 잡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살피는 행위입니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하여 잘 듣고 마음을 기울여 돌보는 것입니다. 환자의 형편과 처지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치료와 치유의 시작이었습니다. 감독은 환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의사가 당신 손을 잡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환자들은 답했습니다. '꼭 이태석 신부님이 저희 곁에 돌아온 것 같았어요.' 제자들도 말했습니다. '신부님이 우리 옆에 계신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신부님 일을 대신해서 너무 기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구수환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을 <부활>로 바꾸었답니다. 원래 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이태석입니다>였는데, 이태석 신부의 예수 사랑 정신이 제자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가는 것을 보고 영화 제목을 <부활>로 고친 것입니다. 불교 신자인 감독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입니다. 이태석 신부의 위대함은 단순히 그의 봉사가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방식'이라는 걸.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의 리더십, 경청하고 공감하며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디가 아프냐'라고 다짜고짜 묻기 전에 환자의 손부터 따뜻하게 잡고 그 마음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 방식이 우리 세상을 살릴 수 있는 힘이라는 걸 말하고 싶어 감독은 자신의 은퇴 자금을 탈탈 털어 우리 앞에 이 영화를 내놓은 것입니다.

시편 138편 기자는 하나님이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시[는]"(시 138:6)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시편 33편 기자는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신다]"(시 33:12-15)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편 113편 기자의 말처럼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는]"(시 113:1-9)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이런 하나님께서 "생명과 은혜주시고 나를 보살핌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 10:12)라고 고백합니다. 고난 중에 있던 욥기 경험한 하나님은 "나의 모든 길을 살피[시는]"(욥 13:27)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8편의 기자는 이런 아름다운 시어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을 아들을 살리셨을 때 모든 사람이 그 치유의 은총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누가복음 7:16) 예수께서는 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셨다]"(누가 7:13-14a) 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슬픔과 절망을 '손을 대어'(touch) 고치시는 분입니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오늘 부른 찬송가 372장의 가사입니다. 흑인영가입니다. 246년의 노예제도(slavery)도 모자라 100년이나 더 인종분리정책(segregation)으로 멸시와 학대를 당하던 흑인들이 부른 찬송가입니다. "나 자주 넘어집니다. 나 자주 실패합니다. 나 슬픈 일 당합니다. 나 심히 괴롭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하늘에 호소하던 흑인들은 죽음의 광야 같던 그 시절 하갈이 만난 하나님, '엘 로이' 하나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높은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시며 나의 처지와 형편을 다 알아주시는 고마운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인생의 광야 한 샘물 곁, 곧 죽음의 사막 앞 마지막 샘 곁에서 생사의 갈 길을 몰라 주저앉은 우리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묻습니다.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여러분은 지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의 눈동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을 늘 지켜보고 계십니다. 매 순간 살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향해 고통을 호소할 때 도우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널 매일 지켜볼게!'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께서 여러분을 "이 세상 풍파 중에도 늘 보호"하시고 "일평생 지나갈 동안도" 여러분을 선한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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