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변화산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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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출애굽기 24:12-18, 로마서 8:18-25, 마가복음 9:2-8

설교문

요즘 많은 분이 보신다는 TV 드라마 <일타 스캔들>은 전쟁터와 같은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에서 한 반찬가게 열혈 사장과 수학 일타 강사 사이에 펼쳐지는 달콤하고 쌉싸름한 로맨스 이야기입니다. 우리 학교 학생이 중요한 역할로 출연하고 있어 저도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연봉 100억 원을 받는다는 수학 일타 강사는 크게 성공한 사람이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고시생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밥 한 끼도 사 먹을 돈이 없던 그를 인근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따뜻하게 보살펴줍니다. 늘 제일 싼 백반을 시키지만, '생선 굽다 탔다'라며 타지도 않은 생선을 내어주는 식입니다.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라고 했지요. 일타 강사는 진한 눈물에 젖는 밥을 먹으며 그 어려운 시절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성공한 이후 어느 날 다시 아주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다시 일어서게 하는 기억이 있다."

오늘의 복음서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의 마지막 주일이자 예수님의 산상변모주일이기도 합니다. 주현절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한 절기이고, 산상변모주일이란 '산상'(山上), 즉 산 위에서, '변모'(變貌), 즉 예수께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산상변모주일은 이제 곧 시작되는 수난의 사순절(四旬節, Lent)을 연결하는 다리(bridge)와 같은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을 하나로 연결하는 변화산 이야기는 마태(17:1-13)와 마가(9:2-13)와 누가(9:28-36) 세 복음서 기자가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셋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산이 어떤 산인지 복음서 기자들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 산이 다볼 산 혹은 헤르몬 산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산정(山頂)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제자들 앞에서 환하게 변화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17:2) 기록합니다. 마가는 이 광경을 더욱 멋지게 묘사하는데,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어 그의 옷에서 광채가 나는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9:3)라고 기록합니다. 저도 집에서 빨래 담당이라 흰 빨래가 희게되었을 때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압니다. 하지만 누가는 조금 신중합니다. 마태와 마가가 사용한 '변형'(그리스어 '메타모르포세, 영어 transfiguration)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예수님의 영굴이 단순히 '변화'(영어 change)했다고만 표현합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eidos)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9:29) 누가가 이렇게 '변형'이라는 말을 피하고 '변화'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변형이라는 용어가 그리스-로마 신들의 '변신'(metamorphosis)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변형' 혹은 '변모'라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유대인의 최상급 관용어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을 적은 돌판 둘을 손에 들고 내려올 때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출애굽기 34:29)라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보좌를 불꽃"(다니엘 7:9) 같았다 말합니다. 신약성서의 요한은 밧모 섬에 갇혔을 때 환상을 보았는데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은"(요한계시록 1:14)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셨을 때 "문득"(누가 9:30)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누가 9:31)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였다]"(누가 9:31)라고 보도합니다. '별세'(別世)는 '죽음'(공동번역)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누가가 사용한 원어는 '떠나가심'(departure, 새번역)입니다. 이 말은 출애굽(Exodus)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살이하던 이집트를 탈출해 약속의 땅을 향해 미지의 광야로 '떠나가는'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엑소더스' 하실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시고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시는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베드로는 예수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마태 17:4, 마가 9:5, 누가 9:33)라고 외칩니다. 얼마나 감격하였으면 그랬을까요. 그런데 마가는 베드로의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베드로가 "몹시 무서워하므로...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9:6)라고 기록합니다. 누가는 좀 더 명확하게 베드로는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9:33)라고 기록합니다. 단지 무서워서 얼떨결에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이 놀라운 일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강조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퍼뜩 이 변화산 이야기가 며칠 전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며칠 전 예수님 일행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있을 때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니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시 물으셨을 때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 16:13-16 / 마가 8:27-29 / 누가 9:1-20)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이 고백에 얼마나 감동하셨던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 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 16:17-18)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이 고백 후에 갑자기 드러내 놓고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태 16:21 / 마가 8:31 / 누가 9:22)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아니 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났는데 이젠 모든 문제가 단박에 해결된 거 아닌가요?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나까지 수난의 십자가 길을 가야 한단 말씀이신가요?

당연히 베드로는 저항했습니다. 아니,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 16:22 / 마가 8:32) 예수님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전 훌륭한 신앙고백을 한 제자 베드로를 향해 이런 거친 말로 나무라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 16:23 / 마가 8:33) 제자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필사적으로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사실, 이 저항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지가를 지는"(누가 9:23)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때, 본문을 보니,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태 17:5 / 마가 9:7 / 누가 9:34-35)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립니다.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했습니다. 구름은 성서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현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쉐키나'(shekinah), 곧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옛날 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 곧 놀랍도록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성막을 완성했을 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출애굽기 40:34)했다 했습니다. 빛난 구름 속에서 제자들이 들은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입니다. 그 음성이 들리는 중에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마가 9:8 / 마태 17:8 / 누가 9:36)이었습니다. 엎드려 있는 사이에 황홀경은 그쳤습니다. 환상은 갑작스럽게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뿐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남은 것은 그 음성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눈앞에서 일어난 영광의 황홀경에 매료되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그 산 위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평화와 안전이 보장되는 곳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 영광의 광채 안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고 염원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친히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옳다는 걸, 그 수난의 길이 하나님의 길이라는 걸,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그 길을 가야만 한다는 걸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데리고 산 아래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영광'의 절정에서 '고난'의 밑바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뒤로 하고 다시 '땅의 고통'에 집중하셨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본문은 귀신들인 아이에게 치유를 베푸시는 사건입니다.(마가 9:14-29 / 마태 17:14-20, 누가 9:37-43a) 드디어 예수님의 새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수난의 여행, 위험으로 둘러싸인 모험의 여행, 모세가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미지의 광야로 떠났듯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구원과 생명을 향한 새 출애굽(New Exodus)의 여정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변화산은 신령한 산입니다. 그 산이 어느 산인지 모르지만 그 산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산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억 속에 있는 산입니다. 제자들은 이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예수님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다시 일어서게 하는 기억이 있다." 제자들에게 변화산 기억은 죽고 싶을 만큼 힘든 고난의 세상을 용기 있게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 찬란한 기억이, 행복했던 경험이, 그 영광의 순간이 있었기에 끝내 예수님을 따라 그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아이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 기억의 힘으로 이겨낸다고 하지요. 따뜻한 은혜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어떤 시련이 닥쳐도 그것을 이겨낼 것입니다. 변화산은 은총의 산입니다. 변화산은 약속의 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는 길의 끝에 있는 해 같이 빛나는 그 영광을 미리 맛보고 그 영광을 기억하며 용기를 내어 산 아래 삶의 현장으로 힘차게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선물 같은 은혜가 바로 변화산입니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를 만든 이유는 아닙니다. 배는 바다로 나가야 배입니다. 바다도 단순히 아름다운 서정의 바다만이 바다가 아니라, 고기잡이배들이 떠다니는 노동의 바다라야 진정한 바다입니다. 우리도 인생이라는 항해를 시작한 이상 항구에 정박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거친 바다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한 여행객이 영국의 해안지방을 여행하다가 해변에 갈매기가 많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는 청정바다여서 갈매기들이 죽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갈매기를 치우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가 이렇게 답합니다. "이곳에는 해마다 여름철에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그 사람들이 갈매기들에게 과자를 많이 던져 줍니다. 갈매기들은 맛있다고 그걸 자꾸 받아먹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던져 주는 것을 받아서 먹다가 갈매기들은 나중에 자연에서 얻는 먹이에 대한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여행객들이 던져 주는 과자를 기다리다가 그만 저렇게 굶어 죽고 만답니다. 바닷속에 그 좋은 먹이를 그대로 놔두고서 말입니다." (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삶은 무겁습니다. 무겁지 않은 것은 삶이 아닙니다. 인생의 바다는 언제나 거칩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고통은 불행이라는 이름으로 시도 때도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것이 삶의 본질입니다. 죽음이 생명의 일부이듯 고난도 삶의 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것을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도 무겁습니다. 무겁지 않은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무겁지 않은 것은 가벼운 나무둥치에 불과합니다. 사순절에 예수님의 수난극을 관람한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연극을 보며 큰 감동을 그들은 공연이 끝나자 무대 뒤로 가서 예수 역할을 한 배우를 만났습니다.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남편은 극 중에서 배우가 지고 갔던 십자가를 발견하고 아내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흉내를 내 어깨에 그 커다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진을 찍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너무나 무거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속이 텅 빈 것인 줄 알았는데 이게 왜 이렇게 무겁죠?" 그때 배우가 답합니다. "만일 무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그 역을 해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무거움입니다. 그 무거움은 고통의 무게입니다. 무겁지 않은 것은 십자가가 아니듯이 무겁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닙니다. 가벼운 것이 십자가가 아니듯이 가벼운 것은 삶이 아닐 것입니다. (정호승의 새벽편지,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중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입니다. "삶은 / 갈수록 무거운데 / 나는 갈수록 / 가벼운 것만 좋아하니 어쩌나? // 옷도 가벼운 게 좋고 / 책도 가벼운 게 좋고 / 이야기도 가벼운 게 좋고 / 때로는 무거워야 할 기도조차도 / 가벼운 게 좋으니 어떡하지?" (이해인, <가벼운 게 좋아서>.)

베드로는 그 산 위가 너무 좋아서 거기에 초막 셋을 짓고 거기서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시며"(시편 27:5)라고 기도했던 한 시편 기자의 기도가 아마 그의 기도였을 겁니다.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시편 27:4) 삶은 살고 싶어 했던 그 시편 기자의 소원이 바로 베드로의 소원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자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막아보려고 애쓰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서 햇빛보다 더 환하게 변하는 찬란한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신 후에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자 하셨습니다.

변화산은 십자가와 같이 무거운 삶을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과도 같은 은총입니다.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찬송가 487장)이 있음을 확인해주시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매 주일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 곧 놀랍도록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될 때 저는 그 예배가 바로 우리의 변화산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쉐키나, 곧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경험하는 감동과 은혜의 자리가 될 때 그 예배의 기억은 세상을 살다가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나를 다시 일으키는 힘이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 하셨습니다. 삶의 무거운 짐을 벗겨서 우리를 쉬게 하신 그 따뜻한 은총의 기억은, 그 행복한 순간의 기억은 고난의 인생을 살다가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나를 다시 일으키는 용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라고 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그 영광은 수난의 길 그 끝에 있는 영광의 예시입니다. 그 영광의 기억을 간직하는 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그를 따르는 우리는 우리 십자가의 무게에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새 여정을 떠나십니다.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로마서 8:21) 그 '새로운 출애굽'(New Exodus)을 향하여 길을 떠나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이 길이 화려한 길이 아님을 압니다. 이 길은 나를 나를 부인하는 길이고, 내가 낮아지는 길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는 길이고, 병들고 지친 자를 돌보아주는 길임을 잘 압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같이 있으려 하나,"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신 영광의 주님이,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찬송가 442장) 명하십니다.

교회는 세상을 외면하고 등진 방주(方舟)가 되려 하거나 '당신들만의 천국' 혹은 '우리끼리의 게토(ghetto)'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변화산의 영광을 희망으로 간직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터전, 그 신앙과 삶이 진실됨을 증명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씨를 뿌리는 밭이기 때문입니다."(오늘 나눠드리는 사순절 묵상집, <디트리히 본회퍼 40일 묵상> 중에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변화산 그 영광의 기억이, 그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이, 하나님의 영광이 눈앞에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는 이 은총의 체험이 설령 나에게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길 바랍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로마서 8:26)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이는 [여러분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5: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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