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kimkisuk

[김기석 칼럼] 한계 초월자들Jul 13, 2019 08:21 PM KST

"성경은 경계선을 가로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인종, 피부색, 종교, 빈부귀천을 가르고 차별과 배제를 통해 자기 계급의 이익을 공교히 하려는 이들은 경계선 만들기에 몰두한다. 경계선은 '내 편'과 '네 편'을 가름으로 경계선 저 너머의 세상을 적으로 돌려세운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낯선 세상을 떠돌았다. 그렇게 함으로 복의 매개자가 되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애굽을 떠나 광야로 들어감으로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내면화했다. 예수는 당신의 몸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분리의 장벽을 허무셨다."

kimkisuk

[김기석 칼럼] 희망은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Jun 25, 2019 10:02 AM KST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이런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과연 '교회에 희망이 있는가?' 묻곤 했다. 원론적인 대답은 희망의 뿌리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일렁이는 절망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 오죽하면 이런 말씀을 하실까.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 같다. 그러나 궁벽진 산골에서, 해체되고 있는 농촌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 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애쓰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교회라는 나무의 실뿌리가 아니겠는가? 희망은 중앙이 아닌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

kimkisuk

[김기석 칼럼] 미안합니다, 본회퍼 목사님Jun 17, 2019 06:58 AM KST

"어느 목사의 막말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은 종교인의 책무이기에 뭐라 할 것 없다. 그러나 그것이 몰상식하거나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때, 더 나아가 신앙적이지 않을 때는 문제가 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하여 특정인에게 불온의 찌지를 붙이고, 경멸의 언사를 일삼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jorz

[김기석 칼럼] 조르주 루오의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전쟁'Jun 10, 2019 07:09 AM KST

파리 코뮌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태어난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는 어린 시절 파리 교외의 지하실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의 신산스런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그 경험은 일평생토록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어려운 이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었습니다. 가구 세공사였던 아버지로부터는 평범한 사물이나 일상적인 일도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대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kimkisuk

[김기석 칼럼] 파밀리아 데이Jun 02, 2019 09:28 AM KST

"어머니를 상기할 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느낌은 따스함과 고요함이다. 엔도 슈사쿠가 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는 바로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어머니의 따스함뿐이었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따스함, 안아 주셨을 때의 체온의 따스함, 사랑의 따스함, 형제들에 비해 특히 모자랐던 나를 돌보아 주시던 따스함!" 엔도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따스함의 근원에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말한다."

kimkisuk

[김기석 칼럼] 천둥이 하는 말May 15, 2019 06:54 AM KST

"아낌없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확장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욕망은 독점을 지향하기에 타자를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잠재적 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욕망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손익 계산을 하지 않는다. 기쁘게 자기를 증여한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불모의 땅에 내리는 봄비와 같은 존재이다."

syagal

[김기석 칼럼] 고통을 넘어 기쁨에 이르다May 07, 2019 05:24 PM KST

"'이삭의 희생'(230×235cm)은 그가 거의 80세 가까이 된 1966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겪었을 나이이고, 젊은 날의 열정도 다 사그러들 법도 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세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림의 우측 하단에는 아브라함과 장작단 위에 눕혀진 이삭이 등장합니다. 오른손에 커다란 칼을 든 아브라함은 왼팔로 이삭의 다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얼굴 가득 고통과 비애가 넘칩니다."

tomas

[김기석 칼럼] 의심은 더 깊은 인식으로 인도하는 통로Apr 29, 2019 05:25 PM KST

오늘 우리가 함께 보려는 그림은 (107*146cm, Sanssouci Museum, Potsdam)입니다. 도마는 회의적 신앙의 대명사처럼 소비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그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으로만 등장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캐릭터를 가진 인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충직한 제자로 소개됩니다.

fra

[김기석 칼럼] 조롱당하는 그리스도: 프라 안젤리코Apr 18, 2019 02:46 PM KST

귀도 디 피에트로(Guido di Pietro)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라는 예명으로 더 잘 알려진 화가입니다. 그는 이십 대 초반에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 일평생 수사로 살면서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는 성품이 좋은 수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프라 안젤리코'라고 불렀습니다. '프라'는 '수도사'를 뜻하고 '안젤리코'는 '천사같은'이라는 뜻입니다. '수태고지'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산골 마을에 살고 있던 마리아를 찾아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 결정적 순간을 그는 인상 깊게 표현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와 경외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듣는 마리아의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고요합니다. 일상과 비일상, 안과 밖, 성과 속의 경계가 어느 순간 무너지고 두 세계가 만납니다. 화면의 좌측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은 옛 세계를 상징합니다. 수태고지는 새로운 세계가 열림을 암시합니다. 천사의 두 날개는 안과 밖의 두 공간에 걸쳐 있습니다. 두 경계를 이어주는 것은 좌측 상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발현된 광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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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칼럼] 습관의 폭력에서 벗어나라Apr 03, 2019 07:54 AM KST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벌어진 인종주의자의 증오 범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인간은 누구도 타자의 '있음'을 무화시켜서는 안 된다. 어느 종교를 신봉하든 그들의 있음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의 의지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권력형 성범죄가 벌어지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권력기관들이 공모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배우지 못한 채 인기라는 거품 속에 갇힌 이들이 저지른 성 범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낄낄낄 웃으며 도섭을 부릴 때, 모멸감에 몸서리치며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의 고통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 생각조차 없다. 칸트는 희생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상상력을 가리켜 '확장된 심성'이라 했다. 그런 심성을 잃는 순간 인간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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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칼럼] 당당함과 숭고함으로 걷는 길Mar 20, 2019 04:55 PM KST

"예수는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는 자신을 '인자'라 칭했다. 묵시문학적인 전통 속에서의 '인자'는 메시야를 암시하지만, 예수의 인자 선언은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했고,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영광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알고 살았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존재 이유였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우렁 속 같은 우울과 자기 비하에 빠진 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김기석 칼럼] 외눈박이 왕과 국정교과서Oct 19, 2015 08:00 AM KST

옛날 어느 나라에 난폭한 왕이 있었다. 전쟁 중에 한쪽 눈을 잃어 외눈박이가 된 왕은 성격이 더욱 포악해졌다. 그는 온 나라 백성이 자신을 숭배할 수 있도록 위엄이 넘치는 초상화를 남기고 싶어 했다. 왕은 대신들에게 명하여 자신을 위대한 왕으로 그릴 수 있는 화가를 찾게 했다. 나라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화가가 초상화를 그려 바쳤다. 초상화를 받아 본 그는 분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짐의 애꾸눈을 그려 이렇게 흉한 얼굴로 만들다니 무엄하도다. 당장 저놈의 목을 쳐라!” 그 불쌍한 화가는 왕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김기석 칼럼] 난민, 그들은 누구인가?

[김기석 칼럼] 난민, 그들은 누구인가?Sep 22, 2015 08:39 AM KST

난민의 문제로 세계가 들끓고 있다. 각종 매체들은 연일 난민에 관한 뉴스를 보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파도에 밀려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어린 아기의 시체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시리아 난민인 아기의 아빠는 다섯 살과 세 살짜리 두 아이를 안은 채 뱃전에 매달려야 했다. 두 아이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아빠는 사력을 다해 물 위로 들어 올렸으나 끊임없이 넘실거리는 파도는 결국 작은 아기의 숨을 삼켜버렸다. 이 아기의 이름은 아일린 쿠르디이다. “아빠, 제발 죽지 말아요.” 아기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오래 전 영국유학시절의 일이다. 저녁 TV뉴스의 한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뉴스는 런던 워털루역의 선로에 설치된 CCTV에 녹화된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자 그날 오후 파리에서 도착한 고속열차의 밑바닥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더니

[김기석 칼럼] 마르크스와 예수

[김기석 칼럼] 마르크스와 예수Aug 04, 2015 01:58 PM KST

또 하나의 큰 별이 졌다. ‘어른’이 없다고 한탄하는 이 시대에 또 한분의 어른이 세상을 떠나셨다. 소천하신 김수행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완역한 경제학자이다.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정년퇴임한 후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셨다. 분단의 현실 때문에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데 익숙하다. 물론 이러한 자유(?)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북한 보다야 백배, 천배는 낫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우리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지는 않는다. 점잖게 말해서 보수와 진보이지, 그냥 속되게 말하면 ‘수구꼴통’과 ‘좌빨’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안하면 아마도 보수 쪽에서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김수행 교수를 그저 ‘좌빨의 대두’ 정도로 분류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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