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팔레스타인의 역사

권영진·정언향교회 담임목사

[편집자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국제정치의 해묵은 주제다. 한국 교회도 이-팔 갈등에 대해 늘 주시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갈구하지만, 정작 갈등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부족한 실정이다. 더구나 미국의 시각으로 강자인 이스라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에 대해 정언향교회 권영진 목사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팔레스타인 역사를 정리해 교회 홈페이지에 올렸다. 권 목사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좁게는 한국교회에 왜곡되어 있는 배타적 선민주의와 친이스라엘 사상에 입각한 성경이해를 바로잡기 위함이고 넓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상식적인’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강자의 논리, 가진 자들의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다면 결국 성경을 오독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권 목사의 동의를 얻어 게시물 전문을 게재한다. 
팔레스타인의 역사
[정언향 세미나 45강 강의안 정리]
Intro : 한국역사왜곡의 문제, 그리고 팔레스타인
▲정언향교회 권영진 목사가 최근 ‘팔레스타인 역사’를 주제로 연속 강의를 진행했다. ⓒ베리타스 DB

▪ 오늘날 한국사회의 첨예한 사회갈등의 원인 중에 하나가 ‘역사왜곡’ 문제다.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갈려 대립하고 있는 역사이해 문제는 특히 근현대사 가운데 친일파 논쟁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한국 보수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대부분 친일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교과서를 중심으로 한 역사교육에 있어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보수 진영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장하는 개혁 진영이 전혀 다른 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지역과 문화권에 위치해 있는 머나먼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사실 우리나라의 현실과 이 지역이 그다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탄압받아왔던 사람들의 역사가 오히려 미국과 이스라엘 같은 강대국의 논리에 함몰되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 정도로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현실은 친일파가 독립운동가 되고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짓밟던 자들이 산업화의 기수가 되어 있고 독립 운동가들과 민주주의 운동가들이 테러리스트와 ‘’빨갱이‘로 매도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 팔레스타인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좁게는 한국교회에 왜곡되어 있는 배타적 선민주의와 친이스라엘 사상에 입각한 성경이해를 바로잡기 위함이고 넓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상식적인’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강자의 논리, 가진 자들의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다면 결국 성경 오독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1. 팔레스타인 개괄
1)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의미
▪ 북으로는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 반도의 아래쪽에 자리 잡은 시리아 남쪽까지, 남으로는 시나이 반도와 네게브 사막의 경계선까지,  동쪽으로는 요르단 강을 경계로 서쪽 지중해 연안까지 이르는 영역을 말한다. 즉, 현대 이스라엘의 영토 개념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자(Gaza)지역과 요단강 서안지역인 웨스트 뱅크(West Bank)지역의 일부가 합쳐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2) 팔레스타인의 문화, 역사적 의미
▪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분명치 않다. 일반적으로 과거에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했던 블레셋 인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는데 주후 1세기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초토화 시키는 과정에서 유다라는 명칭을 지우고자 고대 지명을 다시 복원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역사적으로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의 팔레스타인은 과거의 블레셋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의 절대다수는 이슬람을 믿는 아랍계 사람들이다.
▪ 1948년에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세울 때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백만 명 이상의 거주민들이 있었다. 세계대전 후에 중동지역, 특히 군사적 요충지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영향력을 행세하려던 서방 국가들과 고토를 회복하고자 했던 유대 시오니스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그 결과 성경의 명분을 앞세워 유대인 학살로 인한 부채감을 갖고 있었던 서방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그 이후 이스라엘은 4차례의 중동지역과의 전쟁과 1980년대 이후 수차례 반복된 군사적 충돌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의 거주민들을 축출해 내고 팔레스타인 자체를 이스라엘 국토로 바꿔가고 있다.
▪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팔레스타인의 의미는 단순히 지리적인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아랍 민족의 종교, 정치적 분쟁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이로 인해 현실적으로 분명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 존재하지만 이스라엘-미국의 주도하에 팔레스타인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팔레스타인이 유엔에 의해 옵서버 국가로 승인받게 되어 팔레스타인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2.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팔레스타인
1)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팔레스타인
▪ 주전 15세기까지 이곳은 통칭 [가나안]으로 명명되는 지역이었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7개의 주요 부족들 외에도 여러 소수 민족들이 지역에 흩어져 살던 곳이었는데 이곳에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구약성경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는 가나안 지역 전체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지역을 제대로 차지하지도 못했고 반대로 넘어가서는 안 될 다른 민족의 지역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점령한 것을 알 수 있다.
▪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정착해 가는 동안 주전 13세기 경 에 세력을 확장한 블레셋 인들과의 투쟁이 시작되었고(사사기와 사무엘서에 잘 나타남) 그들의 세력을 일소한 후에 사울-다윗-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주전 10세기 이후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결국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앗수르)에게, 주전 587년에 남유다는 신 바벨론 왕국에 의해 멸망되었고 이후 페르시아-헬라(셀류커스 왕조)-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이 시기에 이스라엘 왕국만이 팔레스타인에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고대로부터 유럽과 이집트, 중동을 잇는 무역과 군사도로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끊임없는 강대국 간의 세력 전쟁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성경(특히 예언서와 역사서)에도 나오듯이 이스라엘 주위에는 수많은 군소 도시 국가들이 있었고 이들 역시 이스라엘과 함께 부침(浮沈)을 거듭하다가 결국 페르시아 시대쯤에는 대부분 식민지화 되었다.
▪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셈족 계열의 사람들이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 역시 같은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는 유대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언어인 가나안 어군(語群)에 속한다는 언어학적 연구를 통해 입증된다. 또한 예수님 당시까지 많이 사용되던 아람어 역시 히브리어와 같은 셈족 계열의 언어이며 이 아람어는 후일 아랍어로 통합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언어체계를 공유하던 비슷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 로마제국이 70년과 135년의 유대반란을 진압하면서 이 지역의 이름을 유다에서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바꾼 이유는 불분명하다. 유대인들의 반란은 주후 325년에 한 번 더 발생하지만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이 가혹하게 진압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의 조직적 반란은 나타나지 않았다.
2) 중세에서 근대까지의 팔레스타인 
▪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특별한 문제없이 존재했다. 그러나 주후 7세기(636년) 정통 칼리프 왕조의 무슬림 세력이 야르무크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의 군대를 크게 격파한 후 레반트 지역(팔레스타인을 포괄하는 지중해 해안 지역)은 이슬람 세력권이 되었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 지배하에 이곳은 완전한 이슬람 지역이 되었고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인들이 공존하는 지역이 되었다.
▪ 이후 주후 11세기 말(1099년)에 시작된 서로마 제국의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이 기독교 세력에 의해 수복되고 예루살렘 왕국이라는 기독교 국가가 성립되었으나 100년 후 살라딘을 중심으로 결집된 이슬람 세력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은 아코 지역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291년 이슬람 왕조인 맘루크 왕국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 16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 지역을 지배해 왔으나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터키를 제외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배를 상실하게 되었다. 천 년이 넘도록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 아랍인들의 세계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프랑스를 주축으로 하는 서방세계의 새로운 세력권으로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3.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팔레스타인
1) 세계대전 이후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변화
▪ 홀로코스트(대학살)를 치루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19세기 말엽부터 나타난 시오니스트들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당시의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고통에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유럽사회의 여론을 등에 업고 1917년에 영국과 맺었던 밸푸어 협정(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는데 영국의 협조를 약속)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아랍 국가들은 역시 영국과 맺었던 맥마흔 협정(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아랍 국가를 독립시켜 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바탕으로 밸푸어 협정의 무효를 주장했다. 
▪ 결국 입장이 난처해진 영국은 이 문제에서 손을 떼고 유엔은 1947년 절충안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양분하여 각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결의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크게 찬성했으나 당연히 천 년 이상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런 반대의견에도 연합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당시 불과 6%정도의 팔레스타인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에게 52%에 달하는 지역을 할당할 만큼 불공평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패전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전혀 발언권이 없었다.
▪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언되자 이에 불복한 팔레스타인 지역 주위의 아랍국들은 동맹을 맺고 제1차 중동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숫자는 적어도 현대화된 무기를 소유한 이스라엘에게 결국 패배했고 그 결과 유엔이 제시한 것보다 훨씬 많은 영토를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4차 중동전쟁에 이르는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1948년부터 74년까지 4번의 중동전쟁 기간 동안 일시적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적 승리는 이스라엘에게 돌아갔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본격적인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대적 침략을 시작했고 점령지에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강제적 추방이 이루어졌다. 이들이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시초가 된 것이다. 또한 승리의 전리품으로 이스라엘은 본래의 지역 이외에도 시리아의 골란고원과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까지 차지하며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2)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투쟁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던 땅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대 이스라엘 무장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화되고 선진국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는 이스라엘과 무기하나 변변하게 갖추지 못한 민병대 수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싸움은 그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1964년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즉 PLO가 조직되면서 양상은 새롭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이끄는 PLO는 게릴라식 전투와 테러를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제를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이를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싸움으로 인해 세계의 여론이 집중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참상이 국제사회에 알려지자 결국 1979년에 미국의 중재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시나이 반도를 다시 이집트에 반환했으나 시리아의 골란 고원은 반환하지 않았다. 1982년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레바논 침공으로 인해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결성되기도 했다.
▪ 이스라엘과 PLO의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1987년, 이스라엘의 크레인 차량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치어 죽이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 장례식 때 그동안 억압당하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의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킨다. 그 유명한 인티파다(항쟁)의 시작이다. [탱크에 돌을 던지는 아이들]로 형상화된 이 1차 인티파다를 통해 가자 지역뿐만 아니라 요르단 서안 지역(웨스트 뱅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까지 가세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군대를 투입해 대부분이 청소년인 시위대를 학살하거나 잔인하게 폭행했다. 비무장에 가까운 시위대를 일방적으로 학살한 이스라엘 군대의 행위에 대해 국제사회는 분노했고 여론은 반(反)이스라엘 상황으로 기울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있기까지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만 1천명이 넘고 부상자는 수만 명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30%는 15세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 이로 인해 1993년 클린턴 정부가 이끄는 미국의 중재로 오슬로 협정이 맺어졌고 오랜 전쟁으로 인해 내부를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던 이스라엘과 PLO는 협정에 응했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인에 불리한 조건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기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얻어낸 이득이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이스라엘이 수용하고 가자 지역에 일부 지역을 준다는 것 정도였다. 이에 반해 그동안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과 가자 지역의 대부분의 자치권과 경찰권을 이스라엘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이는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 결과 PLO를 대체할 조직이 결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무장단체 하마스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내전 상태로 돌입하게 되었고 항쟁의 동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 이는 이스라엘에게도 큰 반향을 가져왔다. 강경우파가 득세하던 이스라엘 사회에 팔레스타인과 협상을 맺었다는 이유로 당시 중동전쟁의 전쟁영웅이었던 라빈 총리가 암살당할 정도였다. 이 협정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철저한 강경 우파들이 득세했고 이는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의 더욱 심한 분쟁의 전기가 되었다.
▪ 2000년 강경파 샤론 총리가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역인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지역으로 통합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에 격분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시위로 맞섰다. 이 시위에 군사적 대응을 한 이스라엘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당시 시위와는 상관없이 길을 가던 팔레스타인 아이와 아버지가 총상을 입었고 아이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라미란 이름의 아이의 죽음은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이 제2차 인티파다 항쟁의 시작이 되었다.
▪ 이 항쟁은 1차에 비해 훨씬 격렬했고 특히 자살폭탄테러가 나타나며 격렬한 투쟁으로 격화되었다. 하마스의 이러한 대응은 이스라엘과 미국 언론들에 의해 재포장되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만드는데 이용되었다. PLO의 상대적으로 온건한 투쟁이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 하마스의 방식은 그 방법이 결코 옳은 것은 아니나 일본 제국의 침략을 폭탄테러로 알리고자 한 우리나라의 독립항쟁과 그 내용과 의미가 유사하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더욱 강경한 진압으로 맞섰고 2006년 하마스가 유엔이 관리한 합법적인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압승하자 2007년 가자지구를 고립시키고 2008년에 하마스와 전쟁을 벌이는 등 결코 물러서지 않는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3) 팔레스타인 지역의 변화
▪ 변하지 않는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반인권적 폭력행위의 태도를 버리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해 결국 국제사회는 서서히 지지를 거둬들였고 미국과 캐나다 등 일부 이스라엘의 맹방(盟邦)들을 제외하고는 제3세계 국가들은 물론 전통의 지지 세력인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국가들마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유엔에 옵서버 국가로 받아들일 것을 결의했고 이는 2012년에 정식 채택되었다. 물론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지만 전통의 동맹국 영국이 이에 대해 기권표를 행사하고 프랑스는 대놓고 이스라엘의 주장에 반대를 할 정도로 국제사회의 여론은 과거와 달라졌다(참고로 한국은 기권표 행사).
▪ 2014년에 있었던 아시안게임에서 팔레스타인은 당당한 주권을 가진 국가로 인정받아 독립된 단체로 선수단을 파견했고 한국정부는 이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선수촌에 입촌시켰다. 이는 한국 역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공존을 지지하는 국제사회 여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외교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그럼에도 여전히 팔레스타인을 봉쇄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군사, 정치적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초강대국 미국의 발언권이 건재한 이상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변함없을 것이고(특히 미국의 군수산업의 최대의 파트너가 이스라엘이다), 중동지방에서 발언권을 강조하고자 하는 미국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병합하려는 이스라엘의 정책 역시 당분간은 큰 변화가 없을 전망이다.
▪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PLO를 계승한 PA와 하마스 사이의 알력이 심각하다. 실제로는 거의 내전 상태 일만큼 오랜 투쟁으로 인해 지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여론도 크게 갈려 있다. 다행히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PA와 하마스도 어느 정도 화해를 한 상태다. 그러나 여전히 팔레스타인 내부 사정 역시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4.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독교적 관점
1) 성경은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 흔히들 디아스포라(Diaspora)란 말을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에게 적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유대인들 모두가 로마에 의해 강제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은 아니다. 물론 주후 70년에 일어난 유대인의 반란으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흩어지기는 했지만 이미 그보다 훨씬 전인 주후 5세기 이후 포로기 귀환 때부터 본토로 귀환하지 않고 이집트, 페르시아. 헬라 제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도 많았다. 특히 주후 1세기 무렵에는 각 지역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고 살아가던 유대인들이 본토 유대인들보다 더 많았다.
▪ 물론 예수님 시대에도 마카비 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무장독립운동 세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옛 이스라엘의 영토를 되찾는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각 지역의 문화와 경제에 완전히 적응한 것도 원인이지만 구약성경, 특히 예언서들이 이스라엘의 영토적 회복보다는 성전 중심의 신앙공동체적 변화를 말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메시아가 도래할 때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은 뒤집어 말하면 메시아가 오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영토회복은 없을 것이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행 1:6 참조).
▪ 그럼 기독교적 관점에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영토적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스라엘 회복 운동가들의 말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이는 주님께서 친히 성전이 되셨기 때문에 다시는 손으로 지은 성전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약성경의 말씀(요 2:19-22 참조)과 제사장과 레위인을 이방인들 중에서 세우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사 66:18-21 참조)으로 인해 더 이상 혈통적 유대인으로 구성된 역사 속 이스라엘은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의 서술 속에서 반박된다. 즉, 국가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성경적 서술의 핵심이다(엡 2:11-3:13 참조).
▪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팔레스타인은 오경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모형으로 주어진 것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히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예표(豫表)요, 에덴의 상징적 명칭이다. 따라서 예언이 성취되고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의 지리적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 성경적으로 의미가 없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시오니스트들이 아닌 정통파 유대인들은 지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거부하는데 기독교에서 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2) 친미, 친이스라엘 사관에서 성경의 사관으로
▪ 현재의 팔레스타인이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약속한 땅이라는 현대 이스라엘의 명분과 이를 지지하는 미국은 결코 성경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과 성경을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현대 이스라엘의 영토가 성경에 나온 것보다 훨씬 방대하며 지금도 계속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는 가볍게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 현재의 유대교와 이스라엘은 경제적 가치와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향을 세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집단에 불과하다. 이들은 비록 같은 구약성경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지향점은 전혀 다른 이교도로 전락한 것이다. 또한 이런 이스라엘에게 군사적, 경제적 협력을 아끼지 않는 미국 역시 실제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배후에서 움직이는 나라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군사적, 경제적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는 집단을 옹호하는 것은 결국 구약의 예언서에서 하나님께서 경고한 약탈자들에 대한 심판을 받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성경에서 벗어난 길을 가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해 분명히 경고해야 한다.
▪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평화의 왕국(하나님 나라)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실 때까지 이 땅의 나라에서는 결코 이상향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그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말하고 여기에서 어긋난 것들과 싸워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약자와 핍박받는 자들의 도피처며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억울하게 빼앗긴 사람들의 친구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관이고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이다. 빼앗는 자의 편이 될지, 뺏기는 자의 편이 될지는 교회의 몫이지만 그 선택의 대가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날 것이다.
▪ 팔레스타인은 2006년 이후 민주적인 투표 절차를 통해 팔레스타인 국가의 정식 수립을 통해 이스라엘과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체제로 여론이 크게 돌아섰다. 두 번의 인티파다(항쟁)를 거치며 소모적인 종교적 투쟁과 대립은 결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간인들의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2007년 이스라엘은 1993년에 맺은 오슬로 협정을 전면적으로 어기고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재점령을 시작했다. 공존에 대한 팔레스타인과 국제사회의 염원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 이것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전쟁광이어서가 아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자체가 시오니즘에 의해 건국된 것이라 7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관점을 돌이켜서는 이스라엘의 국가 정체성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타민족과의 공존이 아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유대인을 제외한 타 민족에 대한 일방적 점령과 축출을 목표로 하는 이스라엘과 시오니스트 유대인들은 결코 하마스로 대변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협상과 공존은 거부할 것이다. 일시적인 협상은 모두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를 위한 일종의 정치적 행위일 뿐이고 이스라엘의 근본적 국가관이 변하지 않는 이상 이스라엘의 대(對) 팔레스타인 정책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 다행스러운 것은 이스라엘도 차츰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세력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2012년에 창당된 야이르 라파드가 이끄는 중도 성향의 [예쉬 아티드(이스라엘의 미래)] 당이 120석의 국회의원 중 19석을 차지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국가의 공존을 주장하고 정통파 유대인들의 병역혜택을 반대하는 중동 지역의 평화를 추구하는 정당이다. 또한 정통파 유대인들 중에서도 시오니즘을 반대하며 이스라엘의 주변국가와의 평화적 공존을 외치는 지성인들이 존재한다. 이런 이들이 이스라엘의 변화의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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