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남교회] 우리가 받은 은혜

2014년 9월 28일 설교자 전병금 목사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8장 6-15절
설교문
소설가 정연희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소설을 보면, 맹의순이라는 실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분은 우리 한신대 선배로서,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27세에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의 맹광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월남하여 한신대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남쪽을 피난을 가던 중, 이번에는 미군에게 붙잡혀 인민군 패잔병으로 오해를 받아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늘 찬송을 부르고, 시편 23편을 외우면서 중공군 포로 부상자들의 병간호를 위해 밤낮없이 봉사하며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중환자들을 돌보면서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 주기도 하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들을 붙잡고 기도해주고 위로해 주기도 하면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는 점차 포로수용소의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억울하게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이 미군 당국에 진정한 결과, 석방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로수용소에 계속 남아서 환자들을 돌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예수와 닮은 사람이었던 성 프랜시스의 헌신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 프랜시스의 기도를 인용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 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지옥에 살며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이런 프랜시스의 기도를 실천하려고 했다면서, 담담하게 자기의 심정을 고백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네. 내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어떤 것도 아닐세. 이곳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서로 으르렁 거리는 그 살벌한 포로수용소에 억울하게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사는 고난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과로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주님의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했던 맹의순은 그렇게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돌보았던 중공군 포로들은 통곡하며 다음과 같은 추도의 글을 읽어내려갔습니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포로의 옷을 입은 그가 미국 군인 의사들을 도우며 우리의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하고 무시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그의 행동은 희생정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한결같았습니다. 1952년 8월 11일, 새벽 3시, 그날도 선생님께서는 환자들을 다 씻어준 다음, 언제나처럼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외치시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셨고, 결국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맹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정연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중에서)
이 포로 수용소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잔이 넘쳤습니다.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잔이 포로수용소에 넘쳤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늘에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죄와 허물로 죽어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막 10:45)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써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세상 임금의 아들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고,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생동안 머리 둘 곳도 없는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셨고, 주님을 믿는 자들을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희생적 사랑 때문에 부요케 되었고 풍성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우리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고 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부요는 꼭 물질적인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님의 사람이 되어 그 권세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처럼 부요한 자가 어디있겠습니까?
본문의 고린도 교인들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은혜 받은 자답지 못했습니다. 약 1년 전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돕고자, 헌금을 모금하자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마게도니아 교회 보다도 먼저 말했는데,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은 마게도니야 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하게 헌금을 해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헌금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바울에게 헌금을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정말 적반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열정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도 있었고 은사를 받은 이들도 많았습니다(고전 1:5-7). 실상 이들은 다 문제가 있는 이들이 아니라 좋은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설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 8:7).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것같이 헌금도 풍성하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소유하지도 않은 은혜를 어떻게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 헌금에 동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헌금을 해야 그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표현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헌금이 가장 중요한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헌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헌금이 십일조 헌금입니다. 십일조 헌금은 수입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구약시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 제사장에게 바친 것에서 유래합니다. 이 십일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데, 신약시대의 초대교회에서도 제일 이상적인 헌금제도로 알고 이를 계승하였습니다. 
레위기에 나타난 십일조의 의미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 27:30).
한편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감당하면서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한 십일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 18:20-21)
신명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와함께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 14:22-23).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신약에서는 형식적인 십일조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 십일조의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에 근거한 십일조는 저버리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폐지론까지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 많은 한국 교회가 기복신앙을 접미한, 왜곡된 십일조를 강조해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성경적이고 기복적인 십일조 사상은 결단코 수용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해 나가는데 앞장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을 돕는 헌금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고후 8:13)
성도들은 헌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헌금을 가지고 복음 전도를 위해서, 또한 어려운 성도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되, 투명하게 사용하여 성도들이 교회를 신뢰하고 따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들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들에게 복음을 나누는 선교사역 또한 것,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헌금을 통하여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바친 헌금으로 세계에 복음이 증거되고 굶주린 이들을 먹여 살리고 세계 많은 이들과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친 헌금을 통해서 이러한 선한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큰 은혜이고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보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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