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소금과 빛

2014년 8월 10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2:1-5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두고, 계시로 받은 말씀이다.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아멘. 
에베소서 5:8-14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다 빛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아멘. 
설교문
제가 평소에 우리교회에 나오지 않은 분들로부터 받는 질문이 하나있습니다. 경동교회는 몇 부 예배가 본 예배 입니까라는 질문이에요. 본 예배는 작은 예배가 아닌 큰 예배를 말합니다. 경동교회의 1부, 2부 예배는 둘다 큰 예배이고, 둘다 본 예배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수가 적거나 많거나 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항상 본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그분을 만납니다. 이런 태도가 중요합니다. 임시로 드리는 예배가 있고, 본 예배가 있고, 이런 사고방식은 옳지 않습니다. 시간대나 수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에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구요. 어느 것 하나도 변두리에 두시지 않고 창조의 중심에 두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여기에 앉으신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핵심입니다. 중앙이 있고 변두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중심입니다. 작은 인간이 아닌, 큰 인간입니다. 성경말씀을 읽을 수 록 하나님은 우주의 중심을 관장하시고, 그 중심 속에 우리 인간을 두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을 중심에 놓으셨죠. 중심을 맨 마중에 창조하셨읍니다. 이 중심을 고수 하시고 제일 먼저 빛을 만드셨습니다. 
창조 첫 날 빛이 있으라 하셨더니 빛이 생겼습니다. 이 이야기가 창세기 1장 3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빛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첫 행위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또한 창조주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밝음을 창조하셨습니다. 밝음은 깨끗합니다, 맑습니다, 그리고 청결하며, 투명합니다. 모든 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참 좋으셨다고 하십니다. 이후에 4~5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빛을 기능상 둘로 나누셨습니다. 한 쪽은 빛이라 하고, 또 다른 쪽은 어둠 이라고 하셨으며, 빛이 있는 쪽을 낮이라고 하고, 어둠이 있는 곳을 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후대 사가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아닌 누군가가 어둠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둠을 거둬내시고 빛을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빛만 있지 어둠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어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어둠이 존재하지만 그 어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빛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둠은 무엇입니까? 빛과 어둠, 선과 악, 낮과 밤과 같이 우리는 이렇게 이원론적인 사고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 안에서는 빛만 존재합니다. 단, 빛 속에서 나누시고, 어둠을 따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빛이 있기 전 본래 있었다고 하는 표현 속의 "어둠"과 하나님이 이름하셨다는 밤으로서의 "어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낮은 일하는 시간이고, 밤은 쉬는 시간입니다. 밤은 안식의 한 표현입니다. 시편 말씀(시 127)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둠 속에서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두움 속에서도, 그리고 빛 속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두움은 빛과 어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어둠이 아니라 우리에게 쉬라고 주신 어두어진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어두움이 자기 자신의 독자적 존재를 고집하면, 하나님은 빛을 통해서 이런 어둠을 물리치십니다. 중세기 <코페루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살았던 시기에 교회도 일반 사람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에는 태양이 있으며, 태양 주위에 행성들이 있는데 태양이 큰 행성인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태양만 빛이고, 다른 행성들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계실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으로 말하면 태양이 지구를 돌며, 하나님의 태양 빛이 지구 구석구석을 비추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 세계를 24시간 하루 종일 관리하십니다. 죄악도 멸하시고, 용서도 하시면서 우리의 일상을 모두 관리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고 믿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잘못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마다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학을 인정하고, 그런 절대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런 과학적 사고안에서 천지창조에 관한 신앙적해석을 하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코페루니쿠스를 통해 무너집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스스로 돌아가면서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입니다. 자전하면서 공전합니다. 뭐가 다른지 아십니까? 태양은 빛인데 그 빛을 반사한 지구가 본래 빛을 향해 자기 스스로 변신(자전)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돌며(공전) 빛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24시간씩 자전하면서 1년 동안 공전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자전과 공전을 통해서 밤이 생깁니다. 본래 밤이 지구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을 등지고 돌다 보니 그늘이 생기고, 밤이 생겼습니다. 태양을 바로 볼 때는 일하는 낮이고, 등질 때는 어두운 밤이니 쉬라고 하십니다. 선과 악을 따로 만드신 분이 아니십니다. 선의 빛이 가려진 현상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면서 빛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돌면서 그를 찾아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이런 과학을 무시한채 맹목적으로 신앙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가지고, 재능을 가지고, 주신 모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스스로 돌면서 회개도 하고, 결단도 하며 고치면서 하늘의 빛을 따라서 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립시다. 그것이 역사의 삶이요, 인간의 삶입니다. 이전까지는 인간에게는 자율적 이성이 없었습니다. 아니 있어도 태양이 돌기 때문에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의 능력은 무시되었습니다. 지동설 이후 인간의 고학과 능력, 그리고 신앙의 태도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능력을 주셨음으로 이제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을 찾자는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우리가 스스로 돌면서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용서와 축복의 은혜를 갈구하자는 패러다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과학적 사건뿐만 아니라 신앙의 해석에 있어서도 엄청난 변해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바보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발휘해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이렇게 창조하시면서 "지구의 역사야, 인간아, 그대들이 내 창조의 중심이니 스스로 돌아라. 돌지 않으면 죽음이다. 스스로 돌면서 계속 바꾸고 갱신하고, 변화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돌아야 합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변화해야 합니다. 갱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의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두움을 구분하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은 무엇입니까? 제가 과학이 눈을 뜨고 그 눈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바라보는 과학시대의 이야기 하나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인슈타인(Einstein)의 신앙고백입니다. "어두움은 빛의 반대말이 아니다. 어두움의 실체가 따로 있고, 빛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두움은 빛이 없는 상태이다. 빛의 부재 상태가 어두움일 뿐이다"라고. 빛이 완전히 없으면 그것을 어두움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항상 가변적이고, 태양의 주위를 돌고 지구가 스스로 자전하면서 돌때 테양에 등을 대고 있는 시간이 밤일 뿐입니다. 어두운 밤 말입니다. 빛으로 곧 변할 밤의 어두움 말입니다. 어둠은 바뀌어야 하고,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악이 존재합니다. 악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이 아니고, 선의 부재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의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없는 상태입니다. 인간의 악함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그 형상이 가려진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지면 우리는 탐욕스럽게 되고, 그 가운데 우리는 악해 집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빛이시라는 말이 시편 23편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그 분은 우리가 사는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에베소서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비추는 빛은 그 내용이 "선이며, 공의이며, 진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 가운데 선과 의와 진실이 하나님이 만드신 빛의 현실입니다. 어두움은 선이 아닌 악, 정의가 아닌 불의, 진실이 아닌 거짓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으로 어두움을 없앨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빛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빛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빛은 밝습니다. 빛은 맑습니다. 빛은 환하게 다 볼 수 있습니다. 빛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사야서 본문 말씀에 보면 이 빛이 발현하는 역사의 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 장소는 다른 세상 보다 조금 높이 있고,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곳의 이름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 빛을 비추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각기 자기들 나라의 수도이길 원했습니다. 그곳이 정신적, 정치적, 역사적 고향이길 원했읍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한 동네 이름이 아닙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읍니다. 예루살렘은 이사야서 말씀처럼 "모든 민족사의 분쟁을 조정하는 곳, 갈등을 해소 시키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장소입니다. 나라 사이에 전쟁도 없고, 군사 훈련도 없으며, 행복과 정의와 평화가 있는 빛의 센터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빛의 내용을 담았다는 뜻입니다. 예루는 ‘성읍’이며, 살렘은 ‘평화’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빛이 비추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경말씀 때문에 우리 모두는 우리 사는 곳이 제 2의 예루살렘이기를 원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빛 된 동네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예루살렘은 어떻습니까? 지금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예루살렘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교도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신 세 종교가 모여 예루살렘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웁니다. 분쟁 조정이요? 매일 같이 싸웁니다. 생명이요? 사람이 수없이 죽어갑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루살렘은 꿈같은 이야기 같습니다. 이사야서 60장에 보면, 예루살렘은 군사행동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빛의 동네로 삼은 "예루살렘을 감독하는 자 이름이 ‘평화’이고,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자 이름이 ‘의’이며,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벽의 이름이 ‘구원’이고, 그 성벽 문의 이름이 ‘찬송’이다"라고 합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이 땅의 천국입니다. 이 나라를 누가 갖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다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한 어둠 때문에 우리 모두가 예루살렘을 분노의 센터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디에 있나요? 중동에 있나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리적으로 중동에 있는 예루살렘만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의 공동체의 중심 속에 예루살렘을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한 분 한 분 에게 이것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이 너를 드나드는 문을 찬양이라고 해라. 너를 감싸주는 성벽을 구원이라고 해라. 공의가 너를 다스리고, 평화가 너를 구원하게 해주마. 이런 엄청난 약속을 하시면서 빛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찬양으로 송축되고 감사기도로 구체화 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예루살렘의 시민이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가 새 예루살렘이기 바랍니다. 실제로 그런 곳입니까? 우리 사회에 각종 사건사고가 범람합니다. 군대에서도 폭력과 인권유린으로 난리가 나서 부모들이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며 걱정합니다. 저도 군목을 하면서 군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군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루살렘일 수 있고, 예루살렘 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곳에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질서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아름다운 질서입니다. 그 질서가 중요합니다. 빛은 질서입니다. 그 빛 속에서 모든 것이 투명해야 합니다. 밝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고가 났습니다. 지휘관과 부하들 사이에서 일어난 불의한 사건들이 걱정입니다. 병영 안에 빛이라는 법질서만 있고, 빛의 또 다른 요인이 빠지면 그렇게 됩니다. 빛은 비치면 밝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햇빛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인 ‘햇볕’이 있습니다. 햇빛은 밝게 비칩니다. 허나 햇볕은 따뜻하게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요한을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의 원조시다"라. 동시에 요한일서를 보면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왜 그 말을 하신 줄 아십니까? 빛만 비추면 밝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아무것도 나아지는 게 없습니다. 제 경험 하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끔 강원도 원주에 가서 송어를 대접 받습니다. 맑은 물에 송어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송어를 잡아 회를 해주는데 그 맛이 일품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송어 밖에 없답니다. 맑고 찬 물에는 송어 밖에 살 수 없답니다. 송어는 맑고, 차고 깨끗한 물에서만 자랍니다. 나머지 물고기는 맑지만 따뜻하고 온화한 곳에 살 수 있답니다. 이런 생각이 스쳐갔읍니다. 이곳 물 속에는 맑고 밝은 햇빛은 있는데, 따뜻하고 정겨운 햇볕은 없구나. 맑아서 나쁜 게 아니라, 맑으면 동시에 따뜻함이 있어야 합니다. 햇빛이 비추는 곳에 햇볕도 있어야 합니다. 병영은 명렬과 복종이 밝은 빛의 정신으로 실현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빛의 정신을 머금은 질서의 병영은 동시에 사람인 군인들이 함께 살고 훈련하고 연대하는 따뜯한 햇볕이 발하는 사랑과 인간다움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은 햇빛입니다. 거짓과 어둠이 다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빛은 동시에 햇볕입니다. 인간의 가슴을 뚫고 들어와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펼치게 합니다. 군대에도, 정치계에도, 사업계에도 맑음이 있어야 합니다. 투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선진국입니다. 법이 지배하는 법치가 실천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곳에는 차디찬 빛뿐만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 있어야 합니다. 군대도, 정치도 온 세상은 그 주인이 사람입니다. 사람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이 넘쳐야 합니다. 서로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법치도 잘 되고,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오늘 햇볕 이야기를 예수께서는 소금과 빛의 관계에서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약속하신 "햇빛"과 동시에 "햇볕"을 주시는데, 여기서 그 햇볕이름을 "소금"이라고 명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위에서 빛만 밝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내려오셔서 소금이라는 햇볕이 되셨습니다. 소금은 햇볕이고,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 속에, 역사 속에 들어가서 소금은 녹이고, 짠 맛을 내고, 썩지 않게 하고, 구원을 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빛이요, 가장 낮으신 소금입니다. 이 소금을 이름 하여 사랑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햇빛이시고, 햇볕이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부활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뜨거운 십자가 사랑이고, 밝은 부활의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주님이시고, 십자가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소금되어 스스로 녹고 또 녹입니다. 그 사랑을 배반하지 마십시오, 그 사랑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으십시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서 구원 받으십시오, 그리고 죽음을 삼키는 부활에동참하여 승리의 빛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질서를 지킵시다. 맑게 삽시다. 동시에 사랑하며 살고 따뜻하고 사람답게 삽시다. 그것이 하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빛을 주시면서 "소금은 내가 먼저 되었으니 사람들아 소금에서 다시 태어나 빛을 발휘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동네가 새 예루살렘이 됩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사랑하며 사랑받는 시민이 됩니다. 맑게 삽시다. 따뜻하게 삽시다. 차디찬 이성으로 삽시다. 따뜻한 감성으로 삽시다. 하늘이 주시는 은혜를 먹고 삽시다. 땅에서 우러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사십시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오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주안에서 축복 풍성히 받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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