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주님의 세계를 온 땅에

2014년 7월 27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신명기 7:7-12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에 벌을 내려서 그를 멸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늦추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야 합니다." "당신들이 이 법도를 듣고 잘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 아멘. 
로마서 6:6-11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28:16-20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아멘. 
설교문
오늘 성가대가 십자가의 죽음을 내용으로 찬양했습니다. 오늘 상을 당한 3가정에 위로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확신을 가졌습니다. 사람이 함께 살다가 헤어지는 것은 무척이나 서운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시 만난다는 기약 없이 헤어지는 것은 더욱 슬프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는 먼저 돌아가신 분에 대한 슬픔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죽음은 슬픔을 만듭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여러 사건사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몸은 온전하고, 잘못한 일도 없는데 까닭도 없이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이 바다에 수장되어 죽었습니다. 이것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해 어린 아이를 포함한 천 명 이상이 가자지구에서 총탄과 폭탄에 맞아 쓸어져 갑니다. 이것은 분노를 넘어선 좌절입니다. 어떻게 죽는 것이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받아 드릴 수 죽음이고 삶인가요? 어떻게 죽으면 우리가 그 죽음을 받아 드리지 못하고 분노 합니까? 비행기가 미사일에 맞아 떨어집니다. 무슨 죄를 조종사가 지었나요? 종교전쟁으로 아프리카에서, 중동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갑니다. 그리고 살육을 당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슬픔입니까? 분노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런 죽음의 문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합니니다. 내용을 보면 대충 이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죽고나면 육이 치루어야 했던 모든 죗값을 일단 탕감 받습니다. 세월호의 악한 주인인 유병언도 죽었더니 모든 법적조치가 무효가 됩니다. 악한 자도, 선한 자도 일단 죽으면 모든 죄가 무효가 됩니다.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똑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죽이고,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고 앞장서 나갔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중지명령을 받고 나가 떨어져 새롭게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이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끝나는 죽음이 아니고,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 이후의 생명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죽으면 다시 사는지 아십니까? 어느 누구나 죽으면 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습니다. 죽어서 자유하면 무엇하나요? 살았을 때 매여 살다가 죽어서 자유하면 무슨 소용 입니까?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죽어서 죽음이 자유를 얻는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것은 언어 일 뿐이지 현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실로 자유 한 것은 살아서 누려야 합니다. 죽기 이전의 생명이든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생명이든, 그 생명이 부여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참 자유일 것입니다. 죽어서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자유입니까? 일단 죽기 전에 주어졌던 죄악과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죽음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 몸의 죽음으로 자유는 무효가 됩니다. 다만, 죽음 이후에 생명으로 부활되어야만 그 약속된 자유가 유효합니다. 
죽음의 방법에 대한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죽되 죽는 방법을 잘 선택하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분과 함께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납니다라고. 바울의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은 다 죽습니다라는 말이죠. 또 하나는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십시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우리들이 더불어 살아납니다. 죽음으로 얻은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주어졌습니다라. 영원한 생명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니다라는 거지요. 이것이 오늘 사도바울이 회심 한 후에 모든 사람들에게 내어 놓은 메시지의 요약입니다. 
로마서 6장 1절부터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죽겠다고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부부 간에도 결혼하고 서약을 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서약해야 되지 않습니까? 서약의 표시는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우리가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겠습니다 하는 각서입니다. 이 각서는 동시에 그리스도 때문에 부활 할 것도 믿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겠다는 각서입니다. 이 각서를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세례받아야 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받고 서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좋아하십니다. 그러면, 한 번 각서를 쓰고, 세례를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거듭나고도 또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올 때 까지는 사람이 받은 구원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세례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를 계속해서 지음으로 계속해서 세례에 속한 서명을 무효화 시킵니다. 예수님도, 사도바울도 하신 말씀이 물로 세례 받는 것은 확실한 서약이지만 그게 계속해서 유효 하려면 또 다른 세례 증명서가 필요한데 그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 말은 사람이 결단하고, 하나님의 영이 계속 도와 주셔야 세례 받은 자로서 끝까지 살아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결혼 할 때 서약하시지요? 서약이 유효하려면 서약한 것처럼 사랑하고, 믿고, 의지한다는 약속과 선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깊은 곳이 있는 마음의 영으로 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합니다. 세례도 똑같습니다. 물의 세례로 증명하고, 성령의 세례로 매일매일 보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게 됩니다. 유가족 여러분 그렇게 믿고, 슬프지만 기쁨을 기대하며 사십시오. 
올해는 왜 이렇게 많은 죽음이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이 올해 들어 너무 어둡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고 못 박히면 그 분과 함께 살 수 있습을 우리는 믿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아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자!.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자!. 이 말씀이 만 백성에 전해졌던 들, 그 말을 믿고 의지했던 들, 왜 미사일로 비행기를 떨어뜨립니까. 왜 바다에 수장시킨 잘못을 이실직고하지 않고, 거짓말하고, 속이며 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로 전해져서 모든 백성에게 이 복음의 진실이 전해졌더라면, 아마도 이처럼 참혹한 죽음, 억장이 무너지는 비극은 많이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나와 함께 죽기로 결단한 사람은, 죽음 때문에 나 때문에 살길로 기쁨을 얻겠다고 확신한 사람은 이제 할 일이 있다. 나가라. 나가서 모든 백성에게 세례를 베풀라. 나 그리스도와의 약속을 지키게 하라. 그 다음에 또 한가지 하나님 아버지가 명하신 뜻을 잘 받들고 일상생황 속에서 실천하게 하여라"!. 요약하면 예수와 함께 죽고살기로 결단하여 새 사람이 되었으면, 성경 말씀에 쓰여 있는 대로 하나, 하나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러면 이 땅이 하나님 나라처럼 바꿔진다. 오늘 마태복음 28장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덫붙이십니다. "나와함께 이 길을 가자.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 끝날 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그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오늘 주셨습니다. 사실 이 약속을 우리에게만 주신 게 아닙니다. 사실 이 약속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똑같이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살 때였읍니다. 우리는 다 죽었구나. 우리 역사는 다 끝났구나. 생명의 역사가 끝났구나. 하나님의 축복도 끝났구나 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나 하나님은 현재 남아 있는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이유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의 복음이 너희들을 통해서 미치게 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돌아가면 혼자 잘났다고 살지 말고, 혼자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민족의 빛으로 살아라". 이미 이렇게 이사야서를 통해서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 명령과 똑같은 등식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이 명령대로 잘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읍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실 백성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닙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고 먼저 믿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그들에게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주변에 있던 수많은 이방 백성들과 적대국들에게 가서 전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복음을 전파했더라면 저는 예수님이 별도로 오실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왜 축복을 받았느냐? 오늘 신명기서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은 수로 보면 아주 작은 백성이며, 땅도 좁은 땅이다. 그런데 내가 왜 너희들을 선민으로 뽑았냐하면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여러분 왜 같이 공동체로 사십니까? 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갑니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사랑하니까! 그 이유를 왜냐고 꼬치꼬치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허나 자식이 사랑을 배반하면 사랑 하기에 부모 가슴이 찢어집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해서 선택했는데, 그 백성이 자신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긴다면 하나님 마음이 어떨까요? 그래서 구약 말씀에 그 관계가 깨어지면 벌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벌을 통해 회개시켜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너희 선조인 아브라함을 통해 이미 약속을 했다. 온 백성의 구원을 위해 만민의 조상이 되어라. 이와 함께 하나님 말씀을 지키도록 만 백성 앞에서 솔선수범하라"고 명하시며 그 댓가로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어기면 벌을 받고, 지키면 수천 대 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축복 받은 백성이 된다고 하셨읍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때 융성하고, 번창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을 때는 다름나라의 속국이 되고,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선민으로서 모든 민족에게 비출 빛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백성의 장점은 선민이며, 열심히 노력하고 하나님을 믿고 사는 백성이라는 점입니다. 단점은 뭇 백성의 빛이 되는 사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본인들의 혈통이 아니면 같은 선민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어느 유명한 유대교 신학자(Ben Chorim)의 정직한 고백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 유대사람들은 상당히 잘 했다고 생각하는데,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혈연 공동체라는 폐쇠적 속박 때문에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잘못입니다"라고. 그들은 세계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읍니다. 그럴 때에도 자기들끼리만 모여 하나님을 믿고 살았읍니다. 자기들과 같은 신앙을 지니지 못한 백성에게는 복음 전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도 일이 되지 않기에 결국에는 예수까지 직접 보내 만 백성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의 복음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나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자. 이 세상도 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걸머지고, 함께 구원 받도록 하자. 대한민국만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온 백성이 구원 받도록 복음을 전하자. 바로 그곳입니다. 교회는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선교하려고 살아갑니다. 교회의 존재의 이유는 바로 복음선교에 있읍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 자체가 홀로 사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 전체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창조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의 호홉을 담아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면서 "혼자 갖지 말고, 나누라"고 하셨읍니다. 나누는 생명이 참된 생명입니다. 그래서 가족도 있고, 나라도 있고, 세계도 있지요. 홀로 있는 생명은 가치 없는 생명입니다. 하늘과 함께 하는 생명, 이웃과 함께 하는 생명, 가족과 함께 하는 생명, 질병에서 치유받고 함께 하는 생명입니다. 이런 생명의 공동체로 부름 받은 것이 우리 교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인 교회생명의 일원이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시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질시와 비판과 욕을 들어 저는 교인됨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상황을 이야기 하기 전에 미국의 경우를 먼져 살펴보겠읍니다. 종교인들 끼리 보는 다른 종교의 위상이나 신뢰에 관련 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무종교인들이 보는 미국의 종교에 대해 "온도차"가 어찌되는지를 알아보려고 앙케이트 조사를 했답니다. 본래 표기된 화씨(F)를 섭씨(C)로 바꿔 표기하겠읍니다. 무종교인들이 볼 때 불교, 유대교, 힌두교, 천주교, 개신교의 온도는 어떻게 될까요? 불교는 20도, 유대교는 16도, 힌두교는 14도, 천주교는 15도 정도 됩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영하(-) 2.2라고 합니다. 개신교 온도는 무종교인들이 느끼기에 무척이나 찹니다. 그래서 개신교 특별히 주류 개신교가 계속 하락하고 있는 이유를 알만합니다. 미국 기독교의 장래도 큰일 났습니다. 
무대를 우리나라로 옮겨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도 종교인들 간의 평가는 빼겠습니다. 무종교인들이 바라보는 ‘종교 신뢰도’에 대한 것입니다. 불교는 37.4이고, 천주교는 30.8 입니다. 여기에 비해 개신교는 5.5입니다, 물론 이 통계는 불교의 고산문화재단이 낸 통계입니다. 다른 단체에서 조사를 하더라도 개신교는 제일 낮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는 봉은사 사찰에 기독교 청년들이 들어가 회개하라 외쳐된 "땅 밟기" 사건으로 사회적으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7월 5일에는 인도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 경내 대탑 입구에서 한국의 기독 청년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며, 일명 ‘땅 밟기’를 했습니다. 스님이 오셔서 왜 찬송을 부르느냐고 물었더니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려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신뢰도 5.5를 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동정표를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기독교도 미국의 경우 처럼 당연히 마이너를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교황이 8월에 오신다고 개신교에서 난리가 생기는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교황이 다녀가면 개신교의 교세가 감소할 거라는 위기감입니다. 이미 몇년전에 교황 바오로 2세가 다녀간 이후에 그런 경험을 한 바가 있읍니다. 그런데 더 큰 이유는 카톨릭은 진짜 교회가 아니며, 교황은 진짜 종교지도자가 아니라는 허황된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이 공론화되고 낯뜨거운 무지의 논란이 개신교 일각에서 제기되는 한, 교황이 다녀가고 나면 우리가 무어라 하던, 아마 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평가하기에 교황 방문 후 개신교의 신뢰도는 아마 5.5도 유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서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를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온 백성에게 찬아가고 불러들여 세례를 베풀고 좋은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해야 합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 그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진실하게 살게해야 합니다. 그 핵심에 교회가 서있읍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성경말씀은 모두가 관심있게 열심히 읽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이 살아 있는 생명과 구원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귀한 일종의 종교서적 같이 취급당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제가 작지만 공감되는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덴마크에 있는 청년들이 이 세상이 너무 타락하고, 사람다운 사람이 적은 것 같고, 인정이 메말라 있다는 문제의식에 기초를 두고 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덴마크를 포함해 모든 나라가 도서관은 각 동네 마다 있습니다. 좋은 책을 선택해 읽고, 감명도 받고, 은혜도 받습니다. 도서관이 많이 확장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도서관에서 좋은 책을 빼서 영의 양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책은 있는데, 책을 쓴 사람은 없습니다. 책은 있는데, 정작 책같이 귀한 사람은 없답니다. 책이라는 글과 정보의 매체는 있는데. 그것을 다스리는 주인되어 살아갈 사람은 책처럼 쉽게 찾아지지 못합니다. 덴마크 청년들이 벌린 운동이 바로 ‘사람 도서관’(Human Library) 만들기 운동입니다. 
자살을 앞둔 사람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일어서고 싶은데, 그런 "인간 도서관"에 가면 나를 상담해 줄 사람이 있다면, 인간의 막 다른 길에서 고민이 있는데 이것을 해결 해 줄 상담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고 생각한 것이죠. 작지만 전문가가 모인 사람들이 책의 역할을 하는 공동체를 만들자. 누구나 와서 마음대로 사람책을 골라서 서로 나누며 교류하게 하자. 그래서 시작된 도서관의 이름이 Human Library 입니다. 이 도서관은 사람이 사는, 공동체가 없는 세상에 사람들이 모여사는 만남의 공간입니다. 따뜻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죠. 그런데 저는 그러한 도서관이 바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그런 훌륭한 도서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 교회를 가면 믿는사람이 살아 있는 성서의 본보기가 되어,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 움직이기에, 만나고 대화하면 서로가 기쁘고 좋습니다. 가족중 누군가가 죽으면 서로 위로해 주고, 좋은 일로 잘살면 기뻐해주는 곳 말입니다. 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이렇지 않겠읍니까. "가서 모든 백성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 도서관을 만들어라"고 말입니다. "그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말씀을 가르쳐 주어서 말씀에 쓰여 있는 대로 살게 하여라. 책 도서관을 만들라"고요. 
오늘 우리 개신교는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합니다. 아니요, 그건 잘못 된 말입니다. 교회는 전도해야 할 세상을 버리고, 자기끼리만 뭉쳐서 자기들만 아는 교리로 삽니다. 반대로 말하면 세상은 기독교를 차 버렸습니다. 가치가 없다고요, 신뢰할 수 없다고요. 그래서 기독교가 버림받은 "잃은 양"이 되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오시면 세상을 구원하기에 앞서서 잃은 교회를 먼저 구원하셔야 합니다. 잃은 양이거든요. 잃은 양된 교회를 어께에 메고 와서 세상 한복판에 내려놓고 기뻐히면서, "이제는 내 구원의 영역이 온 세상이니 이곳에서 구원을 전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학교를 오가는 길이 멀어서 지각생이 많았습니다. 저는 지각 한 일이 없고 또 모든 학생이 모여 있는데 왜 지각들 하느냐고 난리를 치셨습니다. 저와 모두는 지각 안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 제대로 신앙인으로 살려 노력하시는 여러분 앞에서 우리 자화상을 말하니 송구스럽습니다만, 지각 안한 분들이 들으신다고 생각하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잘했던 못했던, 사회를 향한 우리들 모두가 한배를 타고있는 성도요 또 함께 우리나라 교회를 함께 이끌어 가야 하기에 안타까워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한국교회가 망하면, 우리 교회도 망합니다. 교회가 망하면, 하나님 나라가 망합니다. 예수가 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나눌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되새깁시다. "나와 함께 죽자. 나와 함께 살자.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함께 만들자.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의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항상 배반하지 않고 함께 있고 싶다. 나 하나님의 아들의 말이니라"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두가 믿으시지요? 이 분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이번 2017년이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옛 개혁을 되새김도 중요하지만, 이번에는 이미 개혁했지만, 여전히 더욱 개혁하고 회개해야 할 잃은 양된 우리 한국 개신교가 스스로 먼저 개혁하십시다. 그 개혁을 지금부터 시작하십시다. 새로운 교회로, 새로운 믿는 사람으로 거듭납시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항상, 언제 어디까지나 항상 함께 있겠다"고요. 눈물도, 기쁨도 항상 함께 흘리며 웃겠다구요. 주님의 약속입니다. 신실하신 우리 주님의 약속이 여러분 모두에게 귀한 축복의 말씀으로 다가오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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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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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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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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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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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