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남교회] 너희는 나오라

2014년 8월 17일 주일예배 설교자 전병금 목사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6장 14-18절
 
설교문
 
제가 일본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일본의 종교는 다신론적 경향이 강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전을 가리켜 ‘신사’라고 하는데, 한 마을에 하나씩 서 있는 신사에는 조상신을 비롯한 잡다한 신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신은 약 800만 개 정도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도 수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800만 잡신 가운데 하나로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도 믿고 다른 조상신도 믿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혼합주의적 종교 의식 탓에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선교 활동하던 로마 제국 시대의 도시들에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종교는 다신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에 있는 지역들은 그 어디나 다양한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역시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번성한 항구도시였던 고린도는 우상숭배와 함께 온갖 퇴폐풍조가 극에 달하여 “고린도식으로 산다”는 속어가 나올 정도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풍조에 젖어 살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신앙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서도 다른 신을 겸하여 섬겨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범신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스토아 철학 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것을 엄히 경계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6:14-16)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했는데, “믿지 않는 자”는 단순히 교회 다니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자 곧 믿음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사실상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 즉,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자” 즉, 우상숭배자와 함께 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순결을 요구하는 본문은 신명기 22:10의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와 레위기 19:19의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라는 구약의 말씀과 연관된 말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의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공존할 수 없는, 대조적인 것을 계속 열거합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의와 불법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의’는 신자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불법’은 불신자와 적그리스도의 특징입니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빛과 어둠은 서로 사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빛으로 나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자는 어둠에 머물고 맙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서로 조화될 수 없습니다. ‘벨리알’은 성경에서 ‘사단’이나 ‘악마’를 의미하는데,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 ‘거짓 증언’ ‘음모를 꾸미는 자’, ‘악한 의도를 품은 거짓 선전’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서로 상관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때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방인이라는 의미보다, 복음을 접하고도 거부한 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자는 근본적으로 병립할 수 없으며,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여기서 성전을 가리키는 헬라어 ‘나오스’는 성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임재하시는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또한 ‘일치한다’는 말은 ‘찬성투표를 해서 승인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이방신을 섬기기 위해 만든 우상을 결코 승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도 함께 섬겼다가 심판을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므낫세 임금이 하나님의 전에 풍요의 신인 바알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을 죄짓게 하였다가 무서운 재앙을 맞이한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21:1-15).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로 모습을 바꾸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우리는 결코 여기에 젖어 살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조적인 언급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신자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서, 특별한 장소에서 모여 살거나,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비기독교인들이나 타종교인들을 적대시하라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복음전파’를 빌미로 불신자들이나 타종교인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바울의 의도는 그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거룩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라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 신자들이 불신자 혹은 타종교인들과 대면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직장 동료나 가까운 이웃 중에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많고, 불교 신자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선한 일을 위해서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고, 사업도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도의 거룩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자가 석공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 회사가 이교 신전을 건축하는 일에 그 신자를 참여시키려고 한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양복점을 하는데, 그 양복점에 이교 제사장 예복을 수백벌 해 달라는 주문이 들어온다면 어떻겠습니까? 또 그리스도인 배우에게 다른 종교를 홍보하거나 반(反)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나 드라마의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F.W 차링톤(?)의 부모님이 양조업으로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차링톤은 상속자로서 부모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게 되어 사업을 돕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술집 앞을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여인이 술집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곧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더니 술집으로 들어가려니까 그 아내가 못들어가게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자기 아내를 때려 눕히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차링톤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때 그는 그 술집 간판에 자기 이름이 써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훗날 차링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남자는 주먹으로 자기 아내를 때려 눕혔을 뿐만 아니라 나를 내 직업으로부터 영원히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간부터 그 양조업 상속자의 위치를 포기해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하는 일이 그리스도에게 합당한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만일 그 일이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떠나야 합니다. 비록 당장에는 손해가 나고, 힘든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일로부터 떠날 결단을 해야 합니다. 물론 직업도 중요합니다. 사회적 명성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주시기 위해, 지금 있는 부적당한 자리에서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이 명령에 순종할 때 하늘의 신령한 복이 임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의 예가 바로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입니다. 
원래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번역 성경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나와 있는데, “옛날에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새번역, 여호수아 24:2) 라고 하면서 아브라함 또한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을 특별히 택하셔서, 우상을 섬기던 삶, 믿음이 없던 삶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창 12:1)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던 롯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그의 가족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 :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창 19: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이나 불신자와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단에 사로잡힌 자로 살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고후 6:17)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죄악된 자리, 불의한 자리, 속이는 자리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성결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 우상 숭배의 자리에서 떠난 아브라함과, 죄악된 곳을 떠난 롯은 각각 민족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떠나라”,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바울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빛’이요, ‘거룩한 성전’인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 세상의 악한 것과 함께 하면 안됩니다. 속히 그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물질주의, 이기주의, 퇴폐풍조의 늪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는 신앙인은 참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세속적인 어두움에 빠져 있으면, 하나님의 빛 된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세속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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