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강남교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014년 8월 3일 주일예배 설교자 전병금 목사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6장 1-10절
 
설교문
 
1980년에 코끼리 인간(Elephant Man)이라는 소설이 영화화 되었는데 이 영화는 영국의 실존인물인 죠셉 메릭(Joseph Merrick, 1862-1890)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존 메릭’이라고도 불린 그는 ‘다발성 신경섬유종증’이라는 희귀병 때문에 끔찍한 기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코끼리 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얼굴은 부풀고 비틀어지고 피부는 코끼리 가죽처럼 거칠어졌습니다. 아이들이나 심장이 약한 사람은 그를 보면 기절하였기 때문에 그는 외출도 못하고, 얼굴을 가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커스단에서 그를 납치하여 돈벌이를 위해 구경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는 동물취급을 받으며 인간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아름다운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당시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의 주인공으로 정상을 달리는 여배우 매지 켄들 부인(Madge Kendal, 1848-1935)이었습니다. 어느 날 메릭은 켄들 부인로부터 우편물을 받았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기막힌 사랑의 속삭임이 나와 있었습니다. 켄들 부인은 편지에 자신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는데 동봉한 대본을 철저히 읽고 오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켄들 부인의 호의를 받고, 존 메릭은 비록 그 이야기가 자기 자신과는 너무 먼 이야기였지만, 밤을 새워가며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외우고 열심히 공연을 연습해 보았습니다. 이제 공연하는 날이 되어 존 메릭은 얼굴을 싸매고 극장에 가서 구석 자리에 앉았습니다. 
드디어 켄들 부인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달콤한 러브신이 나오는 제 1막의 막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켄들 부인이 무대를 떠나 관중석으로 내려와 구석으로 가더니 존 메릭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메릭씨, 대본을 읽으셨어요? 이제부터 당신이 로미오입니다.” 라고 속삭였습니다. 당황한 메릭은 “아니오, 나는 로미오가 아닙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켄들 부인은 “아닙니다. 당신은 로미오입니다.”라고 말하더니 코끼리 가죽같은 거친 뺨에 키스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메릭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신들린 사람처럼 전력을 다해 로미오 역을 연기했습니다. 
존 메릭에게 인간애와 연민을 느껴 그를 돌봐주고, 그의 생애를 추적하여 기록하고 있던 프레드릭 트레비스라는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이날부터 죠셉 메릭은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인간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 보좌에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이 세상 관중석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일어나라. 수건을 벗어라. 너는 귀중한 나의 친구다. 나의 속삭임에 반응하며 너도 사랑의 언어로 나에게 말해다오.’
이렇게 나를 찾아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응답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그 은혜를 모르고 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열정적으로 응답한 사람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에도 헌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어엿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였을 때, 바울은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 들려온 소식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많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믿음에서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그들을 헌신적으로 섬겨왔던 바울 사도를 오해하고 비난하며, 교회가 분열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배신한 것 때문에 인간적으로 서운해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할 정도로 신앙상태가 황폐해졌다는 사실에 너무 괴로워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는 바울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듣지 않고 사람의 말로만 들었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한 바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바울의 외모를 두고 판단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바울은 키가 작고, 대머리에 다리도 휘었고, 양쪽의 눈썹이 맞닿은 일자 눈썹이었으며, 코도 매부리코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볼품없는 외모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러한 바울의 외모를 거론하며, 바울을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예수님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요 7:24)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했습니다. 주의 종이 전하는 말씀을 인간의 외모로 판단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극도의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 외모에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도 포함이 됩니다. 만약 사람의 중심을 보지 못하고, 외모, 경제력, 학벌에 치우쳐 사람을 평가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자신의 신분과 지위와 상관없이 진리를 알아보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초청하여 세례를 받았던 가이사랴의 로마군 백부장 고넬료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당시 로마군의 백부장(百夫長, Centurion)으로서, 가이사랴의 주둔군 지휘관이며, 상당히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욥바에 있던 베드로를 초청했는데, 그 당시 베드로는 떠돌이 전도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그러한 외적인 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사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베드로를 초청했던 것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자기 집을 방문하였을 때,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 또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예배도 사람의 말로 듣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한편, 고린도 교인들은 헬라 철학에 정통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지식을 앞세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고도로 발달한 과학지식을 갖춘 현대인들은 ‘믿음’을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지식이 인류를 구원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인간을 더욱 편리하고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고, 예술과 문학이 인간을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준다고 믿고, 여러 학문이 인간을 더욱 지혜롭게 만들어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주과학 기술은 우주여행 시대를 열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의 발달은 과거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편리한 생활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의 생명도 복제할 수 있고, 필요한 장기를 얼마든지 생산하여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과거에는 상상만 하던 것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눈부시기만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믿음’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받기 쉽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은 인간의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발달된 과학기술이 가장 먼저 응용되는 최첨단 대량살상 무기는 날이 갈수록 ‘더욱 간단하게, 더욱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성능’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산업화로 인한 환경파괴, 기후변화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인공위성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개인의 사생활 침해 또한 심각하기만 합니다. 최첨단 의료기기와 신약기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첨단 의학 기술로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병도 ‘돈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과학기술과 지식과 학문은 날이 갈수록 발달하는데, 인간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어떤 과학 기술로도 죽음의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바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나 세상 학문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의 도에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의 공로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리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진리대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저 교회의 멤버쉽만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본문에서 그러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능동적인 신앙인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여기서 ‘지금’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관계하는 시간이요, ‘다음에’는 사단이 관계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받을 만한 때”도 ‘지금’이요, “구원의 날”도 ‘지금’입니다. ‘다음’이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귀한 시간입니다. 천하를 주고라도 붙잡아야 할 시간이 바로 ‘지금’입니다. 이 시간은 그냥 지나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고 했고, 모세는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 90:9)고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또한 ‘지금’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현재입니다. 열정을 다해 주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청년의 때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8)고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지금은 준비하는 때이고, 결혼한 후에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즉, ‘다음에’ 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없으면 ‘다음’도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때는 없습니다. 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에’ 신앙생활을 잘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이에게 ‘다음’ 기회란 없습니다.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때도 ‘지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주의 일을 하는 이에게 미래의 기회를 주십니다. 나이가 든 이들도, 남아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결단해서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됩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때임을 알고, 우리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나섭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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