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우상에 대한 짧은 단편(1): 페티쉬(Fetish)

이상철·한신대 외래교수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프롤로그

한국으로 돌아온 지 3주가 지나간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는지 시차적응에 꽤 시간이 걸리더군. 예전에는 열흘 정도면 가뿐했는데, 이번에는 2주가 지나가는데도 적응하는데 만만치 않다. 시차에 적응되지 않은 몽롱한 정신으로 나는,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을 만났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만났다. 역시 몽롱한 정신으로 나는, 내가 다녔던 교회를 방문했고, 많이 파헤쳐 놓긴 했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예전 놀이터들 주변을 배회하며, 지난 10년에 대한 송사를 하나씩 하나씩 바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어리버리 다시 한국사회에 적응해 가는 내게 누군가 물었다. 다시 찾은 서울의 느낌이 어떠냐고? 섬광같이 Fetish 라는 단어가 떠올라, “모두가 fetish에 취해 있는 것 같다”고 말해버렸다. 조금은 과장되긴 했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지난 3주간 내가 둘러본 서울은 그랬다. 교회는 더욱 치열해진 성장이데올로기에, 대학은 공포와 같은 대학평가제에, 개인은 예외 없이 지금 여기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모두 사활을 걸고 치열하게 지금을 버티고 있는 모습이 페티쉬에 취해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건조한 어느 포르노 영화의 주인공들 닮았다.
사전적 정의로 페티쉬는 초자연적 혼령이 머무는 장소 혹은 대상으로, 이것을 소유하거나 점유하는 집단이나 인물은 그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우상 혹은 부적 같은 것이다. 한편, 정신분석학에서 페티쉬란 성적흥분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나 대상, 혹은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는 용어이고, 이런 이유로 각종 성인물 사이트에 페티쉬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나는 21세기 우상이 페티쉬 형태를 띄고 있으며, 그것이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스템과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이 글을 통해 보이려 한다. 
자본의 진화, 소외의 심화 
맑스가 지적했던 고전적 자본주의에서는 일한 만큼 못 받는 것, 즉 착취의 문제가 주된 이슈였다. 하지만 착취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만성화되어 그 체감도가 전보다 못하거나, 혹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간 감이 없지 않아 이전보다는 그 문제점이 강하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지금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착취의 문제보다는 일밖에 모른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다. 재작년인가 어느 정치인이 말했던 “저녁이 있는 삶”은 그런 의미에서 현 자본주의의 문제점을(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아주 훌륭히 풍자한 표현이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소외에 대한 새로운 의견이 등장한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소외를 설명하면서 노동자가 (노동)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있으며, 이는 생산활동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고, 더 확대하여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소외로 갈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면서, 자본주의속에 구조적으로 자리잡은 인간소외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해부하였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자본주의가 최대로 진화한 형태다. 자본주의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의 제도화와 조직화는 일사천리로 선택의 여지 없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사회주의 몰락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견제세력이 없어졌다는 위기감만이 아니라, 인간 본능의 한 축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을 의미한다. 현실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내걸었던 정의와 평등, 그리고 해방이라는 구호는 비록 현실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들이지만, 그런 가련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반추하고 각성케 하며, 그래서 내일을 향한 꿈과 희망을 여전히 신뢰하게 끔 해주었던 사회적 장치, 아니 본능이었다. 왜냐하면, 자본을 향한 맹목적 추구가 Id가 제공하는 쾌락의 원리라면, 그것에 대한 억제로서의 사회주의는 superego가 제공하는 또 다른 쾌락원리이기 때문이다. Id와 superego 모두 우리의 본능이기에, 사회주의의 몰락은 그 두 가지 본능 중 하나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 본능의 억제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소외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맑스가 주장했던 소외가 현실적, 물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소외라면, 신자유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벌어지는 소외는 심리적 차원이 더해진 소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프로이트-라깡-지젝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에 바탕한 담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쾌락, 억압, 실재 
“무한경쟁”, “2등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이상은 신자유주의가 이 땅에서 번져갈 무렵 유행했던 광고 카피들이다. 한마디로 죽도록 일하라는 말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쭉~ 우리는 일터에서 어떻게 하면 성과와 결과를 내고 목적을 달성할 것인지만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가 시간만큼이라도 자기를 찾아야 되는데, 그 시간마저도 체제는 우리에게 그럴 여유를 허락치 않는다. 자기를 못 찾도록, 일터와 비슷한 긴장과 스피드를 유지하게끔 하기 위해 체제는 첨단 테크놀로지와 감각적인 문화로 무장된 온갖 컨텐츠를 이용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쉬지 못하게 한다. 그 단적인 예가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아버린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한국 와서 가장 낯설었던 풍경은 지하철 승객들의 모습이었다. 거의 예외 없이 모두가 고개를 45도로 숙이고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그 진풍경은 가히 해외토픽 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톡을 하는 사람들, 뉴스를 보는 사람들,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무의미하게 스크린을 터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프로이트가 말했던, 인간의 ‘방어기제’ 중 하나인 ‘억압’이 한국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인간은 누구나 안정과 쾌락을 추구한다. 아기 때 엄마품에 안겨 젖을 빨면서 느끼는 쾌락에서부터, 성인이 되어 사회적 인정을 받을 때 느끼는 쾌락까지, 이 쾌락을 향한 추구가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쾌락이란 기본적으로 안정을 희구하는 에너지이다. 그 안정이 위협당할 때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에 대처한다. 그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방어기제’라 말하고, 그 방어기제는 몇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억압, 퇴행, 고착, 투사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억압’은 현실에 존재하는 불쾌의 기재들을 의식에서 지워, 그 불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 대상을 부정하거나 혹은 왜곡함으로써 마치 그 위험과 불쾌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행위하는 것이 ‘억압’이다.
작금의 신자유주의 상황속에서 개인에게 가해지는 불쾌의 강도는 상상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일 없는 것처럼, 아니 그것을 의식에서 지우려고 모두 스마트폰 뒤로 스스로를 감추는 것이 아닐까?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는 마약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은 분명 ‘억압’을 위한 도구이다. 하지만, 모든 억압의 대상은 완전히 진압되지 않은 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반드시 현실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 앞으로 귀환한다. 그것이 ‘실재’(the Real)이고, 이 실재란 기존의 실재처럼 외부 어딘가에 존재하는 흠이 없고 완벽한 사물의 궁극적 질서, 원칙, 모형으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내 안에 어딘가 이름 모를 장소에 짱박혀 있는 티끌, 혹은 얼룩과 같은 것이다. 그 얼룩으로 인해 실재가 구성되고, 그 얼룩이 어느 임계점에서 에너지가 되어 폭발하거나, 제다이가 되어 귀환하여 우리 앞에 등장할 때 드디어 사건은 발생한다.        
페티쉬의 출현…그리고, 그것의 기저에는
그렇다면, 우상의 출현은 위에서 언급한 정신분석학 용어인 ‘억압’의 등장과 연관이 있을 법도 하다. 출애굽 과정에서 등장한 아론의 금송아지와 남북분단이라는 안정이 파괴되는 시점에 등장한 북왕국의 금송아지는 출애굽과 분단이라는 불쾌와 불안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부속물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페티쉬의 출몰과 범람이 21세기형 우상의 진화(혹은 퇴화)라 본다. 페티쉬에서 파생된 페티시즘은 여자스타킹, 속옷에 집착하는 변태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 많이 쓰이는 용어인데, 이는 사실 물신숭배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억압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페티시즘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일터에 가서 무조건 남보다 더 성과를 올려야만 마치 내가 인생에 성공한 것처럼,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 여자속옷에 집착하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지 않나? 여가시간마저도 현실의 자본에 대한 압박을 느끼지 않으려고 스마트폰을 끌어 안고 하루 종일 지내는 우리의 모습이, 여자 스타킹을 뒤집어 쓰고 있는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프로이트는 인간정신을 추동하는 커다란 에네르기 두 개를 에로스와 타나토스, 즉 삶에 대한 충동과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인간은 앞서 말했듯이 안정과 평안을 희구하고, 불필요한 긴장과 불안은 지양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삶의 영위를 위해 작동하는 힘이 에로스이다. 그리고 그 힘은 어느 한 지점을 겨냥한다. 최초에 무의식적 차원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쾌락의 지점,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 즉 아기와 엄마 사이 완벽한 2항 관계가 성립했던 그 지점이다. 그곳은 무중력의 진공상태일 것이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어딘가이며, 최초의 창조가 이루어지기 직전 절대 평형이 이루어졌던 공간일 것이다. 그곳으로 우리는 가고 싶어하고, 그 에너지가 에로스일 텐데,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 말이 꼬이기 시작한다.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그곳은 어디인가? 죽음 아닌가? 물리학에서 긴장과 흥분이 없는 상태란 운동이 없는 상태이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라면, 죽음은 쾌락의 극치이다. 긴장과 흥분이 제로인 상태가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마치 원자로 안에 있는 열이 다 식을 때까지 활활 타는 핵발전소처럼, 쾌락을 위해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다 소진할 때까지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현실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에 대한 억압의 기재로서 우상을 만들어 쾌락의 안전성을 확보하려 하였고… 하지만 그것이 어느 지점을 지나고 나서는 죽음으로 가는 길로 바뀐다. 아마도 그 지점이 에로스에서 타나토스로 변이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마치 어릴 적 보았던 만화영화 마징거Z에 나오는 괴수 아수라백작의 얼굴이 남/녀로 분할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 인간은 삶으로 이어지리라 믿어 떠났던 그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인 줄 깨닫지만, 그 관성을 돌이키기에 인간은 너무 피로하고 역부족이다. 21세기 자본의 지배가 온 땅을 장악한 지금, 돈과 번영을 추구하는 삶의 열망만큼이나, 그것의 실패로 인한 좌절과 죽음과 공포의 지수가 급등하고 있다. 연일 계속되는 자살관련 소식들, 세계 제1의 자살국이라는 오명 등등의 뉴스들이 그것이다. ‘그 죽음으로 가는 쾌락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인간은 페티쉬를 고안하였다’ 라고 말한다면 너무 큰 억측이 될까?<계속>

※본 글은 웹진 <제3시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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