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내가 뽑은 나의 종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18장 16-21절, 시편 20편 6-9절, 마태복음서 12장 9-21절

[설날: 새해를 새롭게 맞이하기]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설을 잘 쇠셨는지요? 어제가 설날이고, 그 전날 즉 금요일은 섣달그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에는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지나가는 한 해를 지킨다는 뜻으로 밤을 새우는, '수세'(守歲)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다락이며 마루, 방이며 부엌, 사람이 거처하는 집안 곳곳에 등불을 켜놓고 밤을 지새웁니다. 속설에 "섣달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굼벵이가 된다."든지, "섣달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라는 말들이 있고, 실제로 새벽닭이 울 때까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가족 모두 모여 잠을 자지 않고, 밤새도록 화롯가에 둘러앉아 옛날이야기를 하거나 윷놀이를 하면서 졸음을 쫓으려 애쓰기도 했습니다. 수세, 즉 해지킴 풍습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중요한 시점에 잠이나 잘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날과 그 전 해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력 새해가 밝아온 지 이제 한 달을 보내고 있고, 음력으로도 설을 지냈으니, 본격적으로 2020년 새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올 한해 여러분 각자의 소망과 각오가 있을 것입니다. 그 바람들이 모두 이루어지시길 빌며, 구상 시인(1919-2004)의 시 한편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새해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워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조율(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意識)은

이성(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충직과 일치하여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는 나의 일과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생애,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구상 시인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 새로워져서 서슴없이 맞는 새해는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새해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복(福)]

경자년(庚子年)을 맞아 저의 집에는 작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작년에 고관절 수술을 하시고, 더 이상 제사음식이나 명절 음식을 만들기 어려워지셨고, 그래서 올 해부터 비그리스도인이신 부모님과 제 동생네 가족들이 전부 설날 아침에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목사인 저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 10년이 넘게 계속 명절 예식서를 만들어 왔지만, 정작 우리집에서는 쓰지 못했는데, 올해 처음 쓰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평생 교회를 다녀보신 적이 없고, 제 막내동생 가족은 어릴 때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지금은 교회에 가지 않기에, 사실 찬송이나 성경말씀도 잘 모릅니다. 가족 예배가 처음인데다가 어른과 아이들이 뒤섞여 있어서, 제가 어떻게 예배를 진행하면 좋을지 살짝 난감했습니다만, 서로 둘러 앉아 예식서를 따라 예배를 진행했습니다. 어른 여섯에 아이들 넷 열명이 참여했는데, 저는 예배를 이끌면서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기도도 함께 하고, 성경도 돌아가면서 읽고, 설교 또한 순서지에 쓰인 대로 읽으면서 차분히 해설을 했습니다.

설교 제목이 "복의 근원"이어서 가족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복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다양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가족 모두가 건강한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시고, 저의 어머니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복이라 하고, 아이들은 지나가다가 길가에 떨어진 돈을 줍는 것 같은 행운을 복이라고 여기더군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복은 무엇입니까?

과연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복(福)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복(福)이란 한자는 보일 '시(示)'와 찰 '복畐'자가 합쳐진 것인데, '시'는 제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天]로부터 사람에게 내리는 신의 뜻(神意)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이고, '복(畐)'은 배가 불러 오른 단지의 상형문자입니다. '복'의 한자를 통해서 복의 뜻을 살피면 '사람의 힘을 넘어서서 하늘로부터 주시는 행운'이라는 뜻과 '오붓하고 넉넉하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런 우리들에게 모든 장애와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힘으로 넉넉하고 오붓한 삶이 허락된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마다 그런 복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복, 특별히 복의 근원이라고 불렸던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은 두 가지 점에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됩니다. 즉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까지도 복을 받게 하는 자리에 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며, 땅 위에 있는 나라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진짜 복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남과 함께 누리는 것이고, 참된 복은 남이 복을 누리도록 내가 그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사귈 때,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도움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내가 상대의 도움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복이요, 자세라는 것!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나로 인해 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누리는 복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주겠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옳고 바른 일, 즉 정의(משפט, mishpat)와 공의(צדקה, tsedaqah)를 하나님에게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살았고, 그것이 바로 옳고 바른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고향에 머물러 거기에서 평안과 복을 누리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야훼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모험을 떠났습니다. 그는 떠돌이로 살면서 땅 한 평 가질 수 없었고, 아내 사라의 무덤을 장만하기 위해 헷 사람으로부터 땅을 사야하는 처지였지만, 그는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위해서 그는 하나님 하고도 따져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다음에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선한 이들을 악한 사람들과 함께 파멸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며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손들에게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게 하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우리 또한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야 합니다. 남들이 요행을 바라고, 불의를 저지르고서라도 복을 간구한다면, 우리들은 정확하게 우리들의 실력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굳게 붙잡고 복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왕은 전차와 기마가 절실합니다. 강한 군사력이야말로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해 줍니다. 그것이 세상의 지혜이고, 상식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승리를 안겨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왕은 다릅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돈과 권력이 우리에게 성공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돈과 권력을 얻는 것이 곧 성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힘이 성공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혹시 돈과 힘을 갖게 되더라도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어야 합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고, 권력 또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들꽃과 같이 허무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얼마든지 돈과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적절한 곳에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 질문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 복이라고 해서 거기에 그냥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옳고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바른 신념이 있습니다. 복의 열매만 따 먹으려는 자와는 다릅니다. 복의 근원, 복의 씨앗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복(福)이시다]

지난 주에 한양희 권사님을 하나님 품으로 보내 드리면서 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과연 그동안 그리스도교는 무엇이었나? 98년의 삶을 사시다가 주님 곁으로 가신 한양희 권사님에게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나?

한양희 권사님께서 좋아하시던 찬송가는 "주님여 이손을 꼭잡고 가소서"였다고 합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러합니다. "1절: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2절: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한양희 권사님은 보도연맹학살사건으로 남편을 잃으시고, 평생을 홀몸으로 사시면서 자신의 삶을 바쳐 가족을 지키고 아들을 키워 오신 이 땅의 어머니의 한 전형이었습니다. 한양희 권사님의 개인사에는 한국의 분단의 역사와 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사실 우리 국민 모두에게는 지난 백년 세월의 흔적과 상처들이 다 있습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때가 있었고,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칼날에 약하디 약한 심장을 던져야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험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했듯이, 우리 한국 사람들도 참으로 어려운 시절들을 지나왔습니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이끌어 주시고, 우리 손을 꼭 잡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는 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울부짖지 않고는 우리는 한 순간도 버텨내기 어려운 때들을 지내 왔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복이 되셨기에, 한국 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성취의 경험들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성공의 경험들을 틈타서 사탄 마귀의 유혹이 스며들어 왔습니다. 덩치가 커지자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돈을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권력을 탐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이 복이었는데, 어느 때인가부터 갑자기 복을 하나님으로 숭배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뒤집힌 것을 다시 뒤집어야 합니다. 복을 하나님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복이라는 사실을 되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라면,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 하나님께서 바르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찾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기 위해 안식일을 지켰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식일이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데, 어느 때부턴가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면서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정면에서 공격하시고, 이 일 때문에 죽음의 위협에 다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고, 끝내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마태복음서 저자는 이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그 분의 선포와 행동을 보고 이사야 예언자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내가 뽑은 나의 종]

원래 이사야 예언자의 이 말은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기대와 흥분 속에서 선포된 것입니다. 어둠에 살던 백성이 새날이 동 터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쁨으로 가득 차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한편으로 자신들의 포로생활을 뒤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하는 한편, 동시에 고향에 가서 어떻게 새로운 나라를 재건할 것인지 고민을 합니다. 이런 고민들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첫째 진정한 메시아, 하나님의 종은 무력으로 남을 지배하는 힘의 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앗시리아가 그랬고, 바벨론이 그러했듯 힘을 가진 자들은 너무 쉽게 하나님을 무시하며 타인들을 지배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고향 땅으로 돌아와서, 누가 그 땅의 진짜 주인인지를 두고 다투거나 싸움 하는 것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은 다투거나, 외치거나, 거리를 돌아다니며 선동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중요한 일은 바로 아브라함이 했던 것, 즉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합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했던 시편 저자처럼 그는 정의가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일, 즉 가장 약하고 소외되고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 곁에서 그들을 회복시키고 다시 살려 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꺾을 힘도 있고, 무엇이든 꺼버릴 능력도 있었습니다. 즉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부나 또 다른 면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과 힘과 전문성이 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성취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자신의 부를 늘리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애를 씁니다.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시합니다. 멸시합니다. 심지어 제거해 버리는 수작까지 씁니다.

바로 이것이 바빌론 제국이나 앗시리아 제국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로마도 그러했고, 오늘날 미국도 그러합니다. 한국에서도 잘 나가는 사람들은 모든 지식과 정보와 학맥과 혈연과 돈과 힘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최강자가 되기 위해 피 터지는 싸움을 하고 냉정해집니다. 공감하는 마음은 전투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배자들의 모습이고, 지배하려는 자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뽑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종은 반대입니다. 그는 꺼져 가는 심지를 살리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미 상해 버린 갈대도 치유하려고 노력합니다. 쉽게 꺾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만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실패는 오로지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한 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우리 생명사랑교회에 희망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전부 교회를 조롱하고 욕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겉모습만 그러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거리에 나가서 외치고 목소리를 높일 때가 아닙니다. 전도한다면서 소통하지 못하는 말로 세상 사람들을 설득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참으로 삶의 의미라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 때까지 우리가 참다운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래서 하나님께 뽑힌 종이라면 정말 우리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새롭지 않으면 새해도 새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에 가족을 이끌고 우리 생명사랑 주일예배에 참석했던 제 후배 부부가 저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리스도교가 이웃 종교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이것만큼은 정말 그리스도교가 내세울 수 있다고 한다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요?" 누군가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우리의 삶이 그 답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삶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2020년 한 해 주님께서 뽑으신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시대를 따라 일군을 부르시는 하나님! 고요히 머리 숙여 생명사랑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생명사랑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 주님의 사랑받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로 하여 희망을 갖도록 올 한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펼치고,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아끼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올 한 해 주님의 뜻을 이뤄갈 것을 다짐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에 굴곡이 있고, 그늘이 있고, 때때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렁이 있더라도 감사를 놓지 않게 하여 주소서. 불평과 불만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헛되게 소비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보이는 것에 취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작은 일에 얽매여 큰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건져 주소서. 늘 우리를 보살피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의 생각과 몸과 마음도 드립니다. 모두 받아주소서. 받으셔서 깨끗하게 하여 주소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 귀한 예물들이 쓰이게 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시고, 빵은 필요하지만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 언제라도 달려 나갈 수 있도록 준비된 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늘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 선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주님의 사랑받는 종으로 정의가 이길 때까지 생명의 길을 걸어가려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 이 설교문은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의 1월 26일 주일설교 원고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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