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예레미야 1:4-8, 로마서 8:29-30, 요한복음 1:4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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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2주년이 다가옵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저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종교개혁 사상가들의 글을 다시 꺼내 읽곤 합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불린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8-1384)는 「하나님 주권론」(1375)과 「시민 주권론」(1376)으로 종교개혁의 대장정을 시작했지만, 목사인 제가 더욱 눈여겨보는 것은 그의 세 번째 저술인 「목회직론」(1378)입니다. 여기서 그는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두 가지 기본태도로 '목회자의 거룩성'과 '설교의 건전성'을 제시했습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는 청빈(淸貧)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 교인들은 그에게 물질적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목회자는 십일조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거룩성'입니다. 또한 위클리프는 목회자의 직무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양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목회자는 언제나 "자신의 근원을 청결하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염시키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설교의 건전성'입니다. 이렇게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자신의 인격에서 거룩함의 빛으로 빛나야 하고 양 떼 앞에서 의로운 가르침으로 눈부셔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한 목회자의 삶은 반드시 그의 양 떼가 닮아야 하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저와 이 땅의 많은 목회자가 과연 그런 거울인지, 부끄럽습니다.

위클리프는 신자들의 임무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지 않은 목회자를 교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신자들의 임무'라고 했습니다. 성직자가 목회에 태만할 때 교인들은 헌물과 십일조를 철회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음탕한 사제들의 미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성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삶이 곤궁한 성직자에게만 십일조를 하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세속의 소유를 사제들에게 기증하여 그를 세속적으로 살게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과연 오늘날 교인들이 이런 '신자들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이후 「성경진리론」(1378)를 펴낸 위클리프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국어로 성경을 읽고 알아야 한다며 1382년에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죽은 후에 교황청은 이 '죄'를 물어 무덤에서 그의 주검을 꺼내 칼로 목을 베고 불로 뼈를 태운 뒤 갈아 템스강에 버렸습니다. 성만찬 때 "봉헌 성체(聖體)는 주님의 몸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가리키는 유효한 표지"이며, 따라서 "봉헌된 성체를 예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성만찬론」, 1379)라고 주장했다가 그는 홀로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이는 당시 가장 '과격한' 주장으로서 많은 친구들과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결국, 위클리프는 성례전의 집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를 하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생의 마지막까지는 그는 '청빈의 설교자,' '순회 설교자'로 살았습니다.

위클리프의 뒤를 이은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72-1415)는 '첫 번째 종교개혁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해서는 제가 열심히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소개하고 있지만, 오늘은 언제나 저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의 1413년 저술 「성직매매론」을 보려고 합니다. 후스는 여기서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이단이 있는데 배교, 신성모독, 그리고 성직매매"라고 말합니다. '배교'(背敎)는 하나님의 법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런데 '성직매매'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교환하는 것에 동의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성직매매' 하면 목사직과 같은 성직(聖職)을 사고파는 것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하지만 후스가 말하는 성직매매의 범위는 매우 넓습니다. "성령의 선물을 값없이 주고받지 않을 때,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성직매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주 주라'(마태 10:8)는 말씀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게하시와 신약의 시몬이 그 예입니다. 게하시(Gehazi)는 엘리사의 젊은 시종으로 아람 왕 군사령관 나아만에게서 문둥병을 낫게 해준 대가로 선물을 받았다가 징벌을 받은 사람입니다(열왕기하 5장). 시몬(Simon)은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에게도 안수하여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능력을 달라고 했던 인물입니다(사도행전 8장). 그래서 오늘날까지 영어에서 성직매매는 "simony"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후스는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다양한 조항들로 [교회가] 수입을 노리는 것이 성직매매"라고 했습니다. 또 "성직자가 가난한 이웃에게 사용되어야 할 수입을 자신과 자기의 친구들을 위해 사용하면 [그것이] 성직매매"라고 했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친척들에게 분배하면 [그것이] 성직매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평신도들도 너무나 많은 종류의 성직매매 관행에 찌들어 있다"고 후스는 비판했습니다. "가장 추악한 경우는 성직을 수여하고 돈과 선물 등 비싼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아들이 성직자가 되게 하려고 뇌물을 바치거나 아부하는 것"입니다. 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기꺼이 주교(主敎)가 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가난과 순교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두가 주교가 되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지 않은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성인이 감독직에 임명되기를 거절했음을 기억하라... [그들은] 스스로 엄지를 잘랐고... 스스로 손을 잘랐다. 하나님의 몸을 분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스는 성직매매를 극복하는 방법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제비뽑기'와 '재산몰수'입니다. 먼저 후스는 "성직매매를 통해 얻은 모든 돈을 압수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를 제비뽑기하는 것보다 더 합당한 방법은 없다"고 제안했습니다. 실로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Matthias)를 열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 뽑았는데, 그때 사용한 방법은 제비뽑기였습니다. 오늘날 교단장이 되려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엄청난 돈을 써야 하는 한국의 개신교회는 과연 종교개혁의 후예인지 묻고 싶습니다.

교회의 개혁에 대한 요구는 성직자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종교개혁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는 교회의 미래가 '성서를 아는 평신도'들에게 달려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황이나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을 공격하는 대신 신자들의 각성과 경건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1501년에 「엔키리디온」 ("Enchiridion")이라는 작은 책자를 펴냈는데, 그 뜻은 '안내' 혹은 '지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 간결한 신앙지침서입니다. 여기서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고 생각하진 마십시오. 여전히 세상적인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겉사람이 눈과 같이 흰옷을 입었다면 속사람 역시 눈과 같이 정결해야 합니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육신의 무릎을 꿇을 수는 있지만, 마음속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나무를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십자가의 은혜를 추구하십시오."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고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은 수도사들만의 의무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유함, 관대함, 평안함을 표출해 이웃이 그리스도를 느끼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Nathanael)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요한 1:43-51). 나다나엘은 요한복음에만(1장과 21장) 나오는 이름이지만, 교회 전통에서는 그가 다른 세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 '바돌로매'(Bartholomew)와 같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Philip)을 만나 그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한 1:45). 이 구절은 평소 빌립과 나다나엘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깊이 연구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경건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이라고 하는 이름 없는 곳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미가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라 했습니다(미가 5:2). 더욱이 나사렛 동네가 있는 갈릴리 지역 전체는 정통 유대인들에 의해 "사망의 그늘진 땅"(이사야 9:2)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한 7:52)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Can anything good come out of Nazareth?) 이 말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경건한 소망의 사람이었지만 지독한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친구를 잘 두었습니다. 빌립은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고 단순히 "와서 보라(Come and see)"(1:46)라고 말합니다. 한번 와서 직접 확인해보라고 슬쩍 소맷자락을 이끌었습니다. 이런 현명한 친구가 있다면 그의 인생의 반은 이미 성공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호기심 때문이건 우정 때문이건,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은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한 1:47). 놀라운 찬사(讚辭)입니다. 예수님의 어느 제자도 부르심을 받을 때 이런 찬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먼저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서에 보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로마서 9:6-8)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간사(奸詐)하다'(deceitful)라는 말은 "나쁜 꾀가 있어 남을 잘 속임"이라는 뜻입니다. 남을 속이고, 기만하고, 현혹하는 거짓과 부정직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동방박사로부터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겉으로는 그를 예배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 아기를 찾아 죽이고자 했던 헤롯 왕 같은 사람이 바로 간사한 사람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간사한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적 전통을 물려받았다고 하면서 청빈하지 않은 성직자가 바로 간사한 인간입니다. 의롭고 거룩한 척 설교하면서 양 떼가 닮을 수 있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목회자가 간사한 인간입니다. 값없이 주신 영적 선물을 세속적인 물질과 맞바꾸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간사한 인간입니다. 구약의 스바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스바냐 3:13)다고 했습니다. 이런 '남은 자'가 바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에 대한 칭찬에 놀랐기보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을 헤아리는 그분께 놀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How did you get to know me?) 오늘 설교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단지 내가 누군지 겉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내 생각 가장 깊은 곳까지도 아느냐는 물음입니다. 예수께서 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한 1:48). 유대인들에게 무화과나무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평화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전쟁을 멈춘 다음에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는 것"(미가 4:4)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 그 무성한 가지 아래 앉아 쉬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그렇게 무화과나무 아래서 율법과 선지자를 묵상하며 구원자를 소망 중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나다나엘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그의 심중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원과 바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부르기 전에 이미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그를 보았다 하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입에서는 결국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한 1:49). '아, 나의 꿈을 이해하는 분이 여기 있구나! 나의 기도를 아시는 분이 여기 오셨구나! 내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소망을 통찰하고 계시는 분이 여기 계시구나!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임에 틀림이 없다!' 나다나엘은 이렇게 속으로 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중심을 통찰하시고 이해하시고 만족시켜 주신 분에게 이후 영원히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 말씀은 '너를 부른 것은 빌립이 아니라 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로 선택하여 그를 찾아온 줄 알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기 전부터, 모태부터, 모태에 수정되기 전부터, 아니 영원 전부터 우리를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고, 부르셨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되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요한 10:4). 그래서 그는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요한 2:24-25).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고된 노역을 할 때에도,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출애굽기 3:7) 있다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집니다(To love is to know). 사랑하면 그 사람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싶어집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내 이름만 외워줘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선배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화에서 김옥길 총장님이 학생들의 이름을 잘 외우셨습니다. 언젠가 가까운 분이 그 비결은 여쭤보니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비결이 어디 있어. 밤새 외운 거지.' 과거 어느 목사님은 수많은 교인의 이름은 물론 그 교인들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이름까지 다 외웠습니다. 저는 이런 재능도, 노력도 참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던지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제 상황을 아세요? 제가 지금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 아시냐구요! 아니, 저라는 존재를 알기는 하시나요?' 힘들 때 투정처럼 내뱉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본문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 마음의 고통을 헤아리고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세실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많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만 주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 6:3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그를 먼저 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있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신 분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한낮에 우물물을 길으러 나왔을 때 먼저 말을 걸어주신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줘도 주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면 큰 힘이 됩니다. 내가 어느 곳에,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그가 나를 보고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내게 큰 힘이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에베소서 1:4-5, 새번역). 오늘 읽은 신약서신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정하[시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로마서 8:29-30). 우리를 미리 아시고, 미리 아신 자를 선택하시고, 그 택한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부터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요체입니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이 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의 핵심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기 두 달 전 그는 이 '반란의 표준'을 먼저 제시했는데, 그것은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논쟁」(1517.8)이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은 중세를 대표하는 철학과 신학입니다. 이 철학은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한 깊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진리는 하나이기에 이성(학문)에 의한 진리와 신앙에 의한 진리가 일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이성'과 초자연적 '신앙'의 조화와 종합(Summa Theologia)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이런 스콜라 신학 전체를 '궤변'이라고 불렀습니다. '지적 사이비 구조'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루터가 보기에 중세신학은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은총의 교리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이라도 인간의 공로나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모든 종류의 생각과 철저하게, 비타협적으로, 때론 극단적으로 싸웠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21살의 젊은 나이에 수도사가 되어 평생 기도하고 금식하며 금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려고,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엄격한 고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자신의 내면의 깊은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자신도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렇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실망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처럼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1장 17절에 이르러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때 루터는 자신이 이미 천국의 열린 문을 통과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술회했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고 사랑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루터는 하나님이 먼저 루터를 알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루터를 미리 알고, 그를 택하고, 그를 부르시고, 그를 의롭게 하시고, 또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루터의 영혼은 평안해졌습니다. 그는 이제 확신에 찼고, 담대해졌습니다. 그 결과 수도원 안에서 불안으로 유령처럼 배회하며 끊임없는 내면의 고통에 시달리던 루터는 목숨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당대의 부패하고 타락한 거대한 교회를 개혁하고 서양의 역사를 바꿨던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영원부터 여러분을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칼 바르트의 말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발견하십니다"(We don't discover God, but God discovers us. - Karl Barth).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오늘 부른 찬송가처럼 우리는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라고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찬송가 "Amazing Grace"의 가사처럼, "이전에 내가 길을 잃고 헤맸으나 이제 나는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즉 "너무도 달콤한, 음악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나 같은 죄인을, 즉 나와 같이 비열하고 간사한 인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이것이 종교개혁의 전하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다나엘의 이름 뜻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도 나다나엘처럼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회복시키시는 구원자를 경건히 기다릴 때 선물처럼 다가오시는 메시아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주님의 찬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한 1:48)는 주님의 달콤한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나다나엘처럼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는 감탄이 입에서 터져 나오길 기도합니다. (201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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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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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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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