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35:1-2, 고린도전서 10;27-31, 사도행전 1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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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Cornelius)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대장 정도 되는 고위급 군인입니다. 성서를 보면,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 또는 '돼지' 취급하며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이 문화가 바로 사도행전 10장을 이해하는 관건입니다.

어느 날 고넬료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가 하는 말이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그의 집으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넬료는 하인 두 사람과 병사 하나를 불러 베드로를 데려오게 그들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가 있는 욥바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러 집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는 배가 고파서 무엇을 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에 아마 배고픔으로 베드로가 무아지경에 빠져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환상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사도행전 10장 11-16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는,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속에는 네 발 달린 온갖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들어 있었다. 그 때에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뒤에,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

자기가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몰라 베드로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당도했습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사람들 셋이 와서 너를 찾고 있다. 일어나서 내려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거라." 확신을 가진 베드로는 이들을 따라 가이사랴에 가서 고넬료를 만났습니다. 고넬료는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온다는 소리에 마중 나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 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사도행전 10:28). 고넬료가 왜 베드로를 오게 했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베드로가 이어서 말합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는 분이시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느 민족에 속해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사도행전 10:34-35). 이 말을 마치고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설교하자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들은 성령의 선물이 이방인들에게까지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기독교가 유대인의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장벽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사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인종과 문화와 종교의 장벽을 넘어 온 세상을 품으시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환상은 무엇이었습니까? 음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음식에 대한 터부를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성경의 말씀에 따라 철저하게 되새김질을 하고 발굽이 갈라진 뭍짐승이나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만을 먹습니다. 레위기 11장을 보시면 철저하게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해 놓았습니다. 그런 유대인인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네 발 달린 온갖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충실한 유대인인 베드로는 절대로 따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 "속되고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버틴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감히]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베드로의 음식문화 터부가 강경했든지 하나님은 그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셔야 했습니다. 참 완고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도들이 볼 때 소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입니다. 언젠가 미국에서는 한 인도계 변호사가 '감자튀김에 쇠고기 성분을 사용했다'며 맥도널드 사를 고소한 일이 있었습니다. '100% 식물성 기름 사용'이라는 감자튀김에 힌두교도들이 가장 꺼리는 쇠고기가 들어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결국 맥도널드 사는 '극소량이 첨가됐다'고 인정하고 사과해야 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이 볼 때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입니다. 이슬람교가 돼지고기를 꺼리는 관습은 유명합니다. 오죽하면 이슬람교도 테러리스트들의 자폭테러로 고민하던 이스라엘 정부가 테러리스트들의 시신을 돼지와 함께 묻어주겠다고 주장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돼지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테러범들이 범행을 망설이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개고기를 먹는다고 '야만'이라 불리는 한국인들의 눈에는 프랑스인들과 스위스인 사람들이 '야만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말고기 문화 때문입니다. 특히 프랑스인들의 푸아그라 요리는 악명이 높습니다. 푸아그라는 거위 간 요리인데, 개구리와 달팽이를 잔혹하게 사육하여 즐기는 탓에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을 "Frog"(개구리) 혹은 "Jonny Crapaud"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크라포'는 프랑스 말로 두꺼비라는 뜻이니, '두꺼비 조니'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 '야만적'인 일본음식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즐겨먹는 '돔부리'(덮밥) 중 하나인 '오야코(親子) 돔부리'입니다. 밥 위에 닭고기, 달걀, 버섯 등을 올려놓은 대중적인 음식인데, 왜 이름이 '오야코 돔부리' 즉 '친자 돔부리'인가 하면, 어미인 닭과 새끼인 달걀을 한데 모았기 때문입니다. 독실한 유대교 신자들은 절대로 어떤 고기와 그 동물의 유제품을 같은 냄비에 요리하지 않습니다. 냉장고에 소고기와 우유를 함께 보관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둘을 부모자식 관계, 즉 친자관계로 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유대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음식규정을 지키면서 성결한 삶을 유지하려는 충실한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항의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통을 어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거꾸로 전통을 핑계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고 한탄하십니다. 그들이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고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복음 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 말씀에 직접 부연설명을 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복음 15:16-20).

바울 서신인 고린도전서 8~10장에는 또 다시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번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고린도(Corinth)라는 도시는 당대 번영을 누리던 커다란 항구도시였습니다. 여기에는 제우스 신전, 아폴로 신전 등 그리스의 여러 신을 섬기는 신전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신자들이 제물로 가져오는 짐승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일부는 태워서 제물로 하였지만 대부분은 남았습니다. 신전에는 이것을 시장으로 내보냈고 사람들이 사 먹었습니다. 고린도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시장에서 물건을 사니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지식이 있는 신자들,' 그러니까 믿은 지 오래되고 믿음이 강한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상관치 않고 먹었습니다. 바울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8: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리스의 신들에게 바쳐진 제물의 고기를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인형과 같습니다. 인형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해도 죄가 되지 않듯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죄가 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고린도의 교인들 '모두가' 이러한 지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그들이 먹는 고기가 우상의 것인 줄로 여기면서 먹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약하므로 더럽혀지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8:7). 물론 바울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고린도전서 8:8). 만유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인간의 관습과 편견에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강력히 권고합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Take care that this liberty of yours does not somehow become a stumbling block to the weak - 고린도전서 8:9). 베드로가 문화적 장벽과 편견이 신앙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고 가르쳤다면, 바울은 지금 그러한 신앙의 자유가 양심이 약한 이들에게 또 다른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를 듭니다. 만일 "지식이 있다는 여러분이 우상의 사당에 앉아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는 양심에 꺼리면서도 용기를 얻어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여러분의 그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8:10-11a, 공동번역). 아직 믿음이 약하여 스스로 양심의 문제를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왜 이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신도를 고려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고린도전서 8:11b).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약한 신도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단지 그들에게 죄를 짓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고린도전서 8:12)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자매]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고린도전서 8:13)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서 따왔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everything for the glory of God). 너무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서를 관통하는 대주제입니다. 시편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편 19: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게 하나님의 솜씨와 작품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사야 35:2)이라고 표현했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했습니다(로마서 1:20). 하나님의 영광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성막이 완성됐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출애굽기 40:34)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에서 가장 환하게 빛났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수많은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누가복음 2:14)라고 노래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rk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브리서 1:3)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린도후서 4:4b-6)고 바울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은 성서 전체를 흐르는 대주제입니다. 그래서 서양음악의 아버지라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자신이 작곡한 모든 곡 뒤에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라는 말을 달았고, 종교개혁자 칼뱅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신학 전체를 조직하는 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자나 깨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교우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어떤 맥락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합니까?

바울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고린도전서 10:23-24). 그러면서 다시 음식 이야기를 꺼냅니다.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따지지 말고 무엇이든 다 먹으라고 합니다. 불신자가 차려 놓은 음식도 양심을 따지지 말고 다 먹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라고 말해주면 그것은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0:25-27). 그런데 이 음식을 먹지 말라는 바울의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 하고 여러분에게 말해 주거든,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마십시오. 내가 여기에서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 양심이 아니라, [] 사람의 양심입니다"(고린도전서 10:28-29). 무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이 제사에 올린 음식이 '아직'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이든 다 먹으라 했습니다. 제사음식이라도 내 양심에 문제가 없거든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 양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의 양심을 흔든다면 그 자유에 제약을 가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맥락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영광만을 말하는 교인들에 대해 아픔을 토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는 무지, 무감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입으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망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대체 무엇입니까? 바울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추상적이거나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말은 빈말이나 수사학(rhetoric)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추구해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고 강변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철저히 '자유'(liberty)와 '연대'(solidarity)의 변증법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지식'(knowledge)과 '배려'(care)의 변증법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만 나의 자유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 스스로 제약됩니다. 자발적으로 제한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연대성입니다. 신앙의 책임성입니다. 신앙의 공동체성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9:19). 또 그가 말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9:22).

교우 여러분, 이 세상에는 이미 크고 높은 자들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낮고 약한 자들의 삶의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니 그가 스스로 낮고 약한 자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의 삶이, 그의 얼굴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 가운데 있는 약하고 소외된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의 유익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십시오. '사랑과 배려'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린도전서 8:1b-2). 우리도 바울처럼 '사랑이 깊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한 바울처럼, 따뜻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랑과 배려의 성숙한 삶으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Soli Deo Gloria! (201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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