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내 주여 뜻대로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3:18-21, 히브리서 12:1-2, 누가복음 22:3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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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인간의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 같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간을 지으시고 날마다 새롭게 하시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2019년 새해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십시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5:17)는 성경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새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지난날의 실패나 어두운 과거에 붙들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단점과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장점이 있고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런 밝은 점을 기억하며 자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내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성공의 요인이 됩니다. 어떤 유치원 교사의 교육 수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래와 율동 시간에 하루는 팝콘 노래를 가르쳤답니다. 노래 중에 "pop up"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아이들을 옥수수가 튀겨지듯 깡충깡충 뛰게 시켰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은 오히려 움츠려드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이 아이의 답은 자기는 튀겨지지 않은 옥수수라는 겁니다. 집에서 팝콘을 튀겨보면 몇 알은 꼭 튀겨지지 않고 바닥에 깔려 타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아이는 그 흉내를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하필 이 아이는 튀겨지지 않은 옥수수만 생각했을까요?

이 아이의 문제점을 많은 성인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면을 보는 부정적 시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한 심리학자에 의하면 자신에 대한 존중(self-esteem)이 높은 사람이 오래 살고, 사고율이 낮으며,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 적다고 합니다. 당연히 마약이나 알코올에 의존하는 비율도 적다고 합니다.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예언대로 실패의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고 그 학자는 지적하였습니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연구하는 한 기관에 의하면, 학업성취도는 IQ보다는 자신에 대한 존중감이 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낮은 것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학생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엄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베드로전서 2:9)입니다. 새해에는 그런 자존감을 갖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새해에는 나를 사랑하는 수많은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인식하며 열심히 달려가면 좋겠습니다. 성서는 믿는 사람들을 자주 달리기 경주자로 비유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라는 권고가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은 아무도 보지 않는 뒷골목 밤길을 홀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는 가운데 뛰는 경주와 같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컨트리 뮤직 가수 자니 캐시(Johnny Cash)가 있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마약을 소지한 것이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형기를 다 마치고 나올 때 한 교도관이 그를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내 아내는 당신의 열렬한 팬입니다. TV로 당신을 보고 라디오와 CD로 당신의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당신을 내 손으로 유치장에 수감한 날, 나는 집에 돌아가 아내와 손잡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수많은 눈동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자니는 이 한 마디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피나는 노력 끝에 알코올과 마약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이후 자니는 수많은 찬송과 복음성가를 녹음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를 증거했습니다.

경애하는 여러분, 나를 사랑하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구름같이 둘러선 허다한 증인들과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감사하며 올해 열심히 달려가면 좋겠습니다.

셋째로, 새해에는 더 깊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과나무를 쳐다보고 거기에 달린 사과를 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과 한 알을 놓고 그 속에서 나올 수많은 사과나무를 세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은 가능성과 잠재성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가능성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의 새 삶도 가능성을 보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노아는 대홍수 속에서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야곱은 사막 한가운데서 하늘과 연결된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모세는 바위 속에서 생수를 보았고, 삼손은 사나운 사자의 몸에서 꿀을 발견하였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은 사과 한 알 속에서 수많은 사과나무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새해에는 이런 믿음의 눈을 가지고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살면 좋겠습니다.

넷째로, 새해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 속에서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살다보면 아픔과 시련이 닥쳐옵니다. 하지만 때론 그것들이 우리에게 투지와 용기를 주고, 인내와 노력을 키워줍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빵 대신 벽돌을 던지는데, 어떤 이는 원망으로 그 벽돌을 발로 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고, 어떤 이는 그 벽돌을 가지고 집을 짓는다." 시련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생선을 수송하는 사람들이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대구를 물탱크에 담아 수송하면 이상하게 살이 물렁물렁해져서 맛이 나빠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탱크에 메기도 함께 넣으면 그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대구와 메기는 '자연적 원수'(natural enemy) 사이입니다. 대구는 메기로부터 도망치려고 계속 몸을 꿈틀거리게 되고, 그러는 동안 싱싱한 상태로 보존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심판 날까지 함께 자라게 하시는 것도 이와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은데, 그 사람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지만,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여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었다가,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고 곡식은 곳간에 들이겠다고 합니다(마태 13:24-30). 내 삶에 메기와 같은 존재가 함께 있고 내 밭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온전하게 보존하시고 알곡을 거두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새해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 속에서도 웃음과 긍정을 잃지 않고 담대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섯째로, 새해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의 초청장에 응답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는 초청장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초대장은 돈도 RSVP도 필요 없는 은혜의 초대장입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의 초대는 진실하고 간절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처럼'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가르'(γὰρ) 는 '진실로'라는 뜻입니다. 한 번 떠보는 형식적인 초대가 아닙니다. 우리말로 '밥 한 번 먹자'는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기에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한 교도소에 어떤 사람이 갇혔습니다. 그 사람의 아버지는 매주 토요일에 아들을 면회하러 왔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면회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도 토요일만 되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찾아와 면회를 신청했고, 거절당하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발걸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반년동안 계속된 아버지의 스물다섯 번째 면회에서 아들은 눈물로 아버지를 맞아들였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와 같습니다. 새해에는 이 세상의 목마르고 지친 모든 사람들에게 와 있는 하나님의 초대장, 사랑의 초청장, 그 은혜의 초대와 환대에 응답하시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여섯째로, 새해에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살면 좋겠습니다. 성서는 수없이 '너희 눈을 들라'고 말합니다. 오늘 교독한 시편 121편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눈을 든다는 것은 우리 시야의 지평을 넓힌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지평선 혹은 수평선은 "horiz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 "horos"에서 나왔습니다. 그 뜻은 '한계선'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수평선 혹은 지평선을 인간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어떤 한계선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주를 체험한 비행사들은 세상에 두 개의 지평선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감각할 수 있는 지평선'(sensible horizon)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의 지평선'(celestial horizon)입니다. 우리가 땅에 발을 붙이고 있을 때 보이는 지평선이나 수평선은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아갈 때 사라지고 그 대신 거대한 우주 속의 새로운 지평선, 즉 천상의 지평선이 열린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한계도 없고 제한이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지평선을 경제적 부나 정치적 권력이나 사회적 명예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감각할 수 있는 지평선, 곧 땅의 지평선입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에는 멸망하는 사람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공동번역)이라고도 번역된 이 구절을 영어로 보았더니, "This world is the limit of their horizon," 즉 '이 세계가 그들의 지평선의 한계'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생각의 지평이 이 세상에 국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땅의 것만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시민권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의 지평선 안에 갇히지 말고 천상의 지평, 우주의 지평, 하나님의 지평을 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떤 소년이 길에서 5달러짜리 지폐를 줍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또 이런 행운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 아이는 이후 땅만 보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취미가 되고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인생의 황혼기가 되어 평생 동안 길에서 주워 모은 것들을 한번 세어보았습니다.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 페니 수 천 개, 그리고 그 외 수 없이 자질구레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것들을 줍느라 평생 땅만 보며 살았습니다.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과 들에 핀 꽃들의 미소를 감상할 기회를 잃고 산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의 인생은 그가 무엇을 쳐다보며 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는 땅만 보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땅의 것만을 생각하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를 들어 약속의 미래를 보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천상의 지평에 우리의 눈을 맞춰야 합니다. 미지의 대륙 인도를 향해 복음전파의 큰 꿈을 품고 배에 올랐던 윌리엄 캐리 선교사는 이렇게 외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시도해보라."

일곱째로, 새해에는 함께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시도해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마태 7:7, 누가 11:9)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기에 따로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해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시대는 오늘 우리 시대처럼 개인주의 문명의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실제 뉘앙스는 이렇게 됩니다. '함께 구하여라, 주실 것이요, 함께 찾아라, 찾을 것이요, 함께 문을 두드려라, 열어 주실 것이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겠습니까! 손발이 안 맞아 하늘도 도울 수 없었던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어느 가족이 차를 타고 가는데 경찰이 세웠습니다. 운전하던 아버지가 경찰관에게 묻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경찰이 말합니다. '아닙니다. 선생님이 하도 안전하게 운전하셔서 이 달의 운전사 상을 드리려 합니다. 축하합니다. 여기 상금 1백만 원이 있는데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아버지가 하는 말입니다. '아 그렇다면 당장 운전면허증부터 따고 봐야죠.' 옆에 있는 부인 황급히 말을 막습니다. '아니 경찰관님, 신경 쓰지 마세요. 제 남편 술 먹으면 이렇게 농담을 잘 해요.' 그러자 이번에는 뒷자리에 있던 운전자의 아들이 말합니다. '거봐요, 내 뭐랬어요, 훔친 차는 타지 말자고 했잖아요!' 절도차량으로 무면허 음주운전까지! 한 가족의 범죄가 서로 손발이 안 맞아 들통이 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한 가정도 서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야 어떻겠습니까? 서로 협력하십시오. 교회 일에 협력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구하고, 함께 찾고, 함께 문을 두드리는 한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여덟째로, 새해에는 삶의 규율을 세우고 철저히 준수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혹시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작지만 아주 큰 차이를 아시는지요.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분자 고리가 그려진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것을 알게 됩니다. 둘 다 똑같은 탄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푸석푸석하고 꺼먼 덩어리인 흑연과 빛나고 단단한 투명체인 다이아몬드의 현격한 차이는 단지 구성 분자가 엉클어져 있느냐 아니면 정돈되어 있느냐의 아주 단순한 차이일 뿐입니다. 그토록 엄청난 결과의 차이가 알고 보면 이토록 아주 간단한 내면의 차이일 뿐이라니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분자들이 잘 정돈되어 있느냐 아니면 엉클어져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흑연처럼 검고 푸석푸석한 덩어리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하고 투명한 보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아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8만 6,400초씩의 새로운 시간을 넣어주십니다. 마치 은행에 입금하는 것처럼 매일 공평하게 8만 6,400초의 시간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누구는 그 시간을 속절없이 허비하기도 하고 누구는 그 시간을 통해 빛나는 삶을 성취하기도 합니다. 성공은 습관입니다. 아무리 원대한 꿈을 꾸어도 우리의 일상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지 않고 엉클어지면 모두 공상(空想)에 그치고 말 이야기들입니다.

신앙도 규율입니다. 규율은 영어로 "discipline"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자를 의미하는 "disciple"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 규율이 있어야 합니다. 즉 "discipline"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기도하지 않고 무슨 수로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지 않고 무슨 수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날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나씩 실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의 화단이 아름답게 꾸며질 수 있겠습니까? 아름다운 화단을 쉽게 망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그 꽃밭에 불을 지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힘들여 발로 밟고 파헤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것이 가장 쉽게 화단을 망치는 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믿음을 정성껏 가꾸어가지 않으면서 내 삶에 하나님의 주시는 참 평화와 생명이 가득할 수 없습니다. 새해에는 지킬 수 있는 매일의 신조를 만들고 그것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홉째로, 새해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명 깊게 읽은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저서 『사랑의 힘』(Strength to Love)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봅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악을 몰아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서의 하나님은 그런 식의 전제 군주가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줄 것을 기도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신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권리와 정의를 위해 나서 싸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거저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악과 불의는 결코 스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또 기도만으로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을 인간이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숙박객들의 소소한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하는 호텔 급사처럼, 하나님을 이 우주의 급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머리와 일할 수 있는 몸을 주신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부정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연약한 인간적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기도가 인간의 실천을 대신해 버리면 그것은 미신이 됩니다. 인간은 전쟁을 위해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은 평화를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까? 인간을 억압을 조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은 정의를 위한 행동을 계획하고 실천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열째로, 새해에는 나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구)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의 작사자는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 목사님입니다. 슈몰크 목사님이 어떤 상황에서 이 가사를 지었는지 알면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17세기 말 독일에서 신구교간에 전쟁이 일어나 독일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흑사병까지 돌아 당시 독일인구 1천 6백만 중 무려 1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전쟁 중 구교의 신교 탄압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1704년의 어느 날 루터교회 목사인 슈몰크는 부인과 함께 자신의 교회의 병든 교인을 찾아 멀리 심방하고 돌아왔을 때 처참한 현실에 마주해야 했습니다. 교회와 사택이 전소되고 그 잿더미 속에서 서로 끌어안고 타죽은 아들과 딸의 시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슈몰크 목사는 오랫동안 남매의 시신을 안고 울다가 조용히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항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의 생명을 주께 맡기고 그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새해 이런 복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존 바에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새해 빛나는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십시오.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자, 변화하고자 자신을 과감히 열고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붙드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새해입니다. 사람의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지만, 우리 자신과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1) 새해에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2) 새해에는 수많은 사랑의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감사하며 열심히 달려가면 좋겠습니다. (3) 새해에는 사과 한 알 속에서 수많은 사과나무를 볼 수 있는 깊은 믿음의 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4) 새해에는 나를 힘들게 하는 여건 속에서도 웃음과 긍정을 잃지 않고 밝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5) 새해에는 우리 삶 한 가운데 와 계신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장을 발견하고 기뻐하면 좋겠습니다. (6) 새해에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7) 새해에는 함께 힘을 모아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시도해보면 좋겠습니다. (8) 새해에는 삶과 신앙의 규율을 철저히 세우고 준수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9) 새해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10) 그리고 새해에는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새 힘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20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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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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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5]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보다는 출발이 좀 늦었으나 곧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주축이 되어 착실하게 발전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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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4] 카르타고 학파의 거침없는 변증과 교회론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을 오늘날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들의 신학은 현실적이고 참여적이고 실존적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