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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진의 횡설수설] 성서의 오역과 목회자들의 전문성

pastor
(Photo : ⓒ베리타스 DB)
▲성서를 읽다보면 오역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오늘은 신약성서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명백한 오역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위 사진은 해당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성서를 읽다보면 오역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오늘은 신약성서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명백한 오역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필자가 오역을 발견한 곳은 마가복음 10장 11절이다. 먼저 개역 한글의 번역을 살펴보자.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막10:11)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곳은 '본처에게'이다. 개역 개정도 본 구절에 대해서 똑같은 번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새번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을 범하는 것이요,(막10:11)

새번역은 개역 한글의 '본처에게'와 의미상 같은 '아내에게'로 번역하고 있다.

반면에 공동번역은 다음과 같이 본 구절을 번역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막10:11)

여기에서 '그 여자와'가 의미할 수 있는 것은 1) 자기 아내, 2) 다른 여자일 것이다. 공동번역은 개역판과 새번역판과는 다르게 이 두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은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NIV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을까?

[He answered,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and marries another woman commits adultery against her]

NIV도 공동번역과 같이 대명사 'her'로 번역함으로써 간음의 대상이 아내로 읽을 수도, 또는 새로 결혼하는 여자로 읽을 수도 있게 번역했다.

그럼 이제 원문과 더 가까운 불가타의 번역을 살펴보자.

[et dicit illis quicumque dimiserit uxorem suam et aliam duxerit adulterium committit super eam]

불가타도 역시 'eam'(여성 단수 대격 인칭대명사)으로 번역함으로써 공동번역, NIV와 같은 번역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

<개역한글, 새번역>과 <공동번역, NIV, 불가타>의 번역 중 어떤 번역이 옳은 번역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원문을 확인해보아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11절의 헬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καὶ λέγει αὐτοῖς Ὃς ἂν ἀπολύσῃ τὴν γυναῖκα αὐτοῦ καὶ γαμήσῃ ἄλλην μοιχᾶται ἐπ᾽ ατήν]

원문에서는 'αὐτήν'이라는 여성 단수 대격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내를 의미하는 'τὴν γυναῖκα αὐτοῦ'을 가리킬 수 있고, 다른 여인을 의미하는 'ἄλλην'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대명사는 가까운 위치의 명사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아내를 버린 남성이 간음하는(μοιχᾶται) 여인은 그의 아내가 아니라 새로 장가드는 다른 여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아내는 이미 버렸는데 그 버린 아내를 간음한다는 것, 아내와 다시 간통한다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다. 따라서 본문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공동번역이 취하고 있듯이 원문의 인칭대명사를 그 자체로 살려서 번역하는 것이며, 개역판과 새번역판과 같이 원문의 대명사를 실명사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번역이다. 더군다나 그 실명사도 잘못 선택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이러한 번역은 우리를 성서 원문의 의미에서 더욱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간략하게 개역판과 새번역판의 오역을 살펴보았다. 성서의 번역에는 이러한 오역이 한 군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100% 정확한 번역이란 가능하지 않으며 어족이 다른 헬라어를 한국어로 말끔히 번역해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들이 히브리어, 헬라어 원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성서 본연의 의미와 뉘앙스를 결코 접할 수 없을 것이다. 성서는 이미 성서의 언어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심지어는 때때로 오역되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은 성서 번역본이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성서는 번역이 매우 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성서 번역에서 실수가 있을 수 있기에, 또는 번역문이 그 원문 자체의 뉘앙스를 충분히 살려주지 못할 수도 있기에 우리는 때로는 답답하다. 하나님 말씀을 생동감 있게 접하고 싶다. 그럴 때 목회자들이 우리 일반 성도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신학교에서 이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우고, 원문 성서를 읽을 수 있는 목회자들이라면 그 많은 설교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 자체가 주는 참맛을 충분히 전달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믿고 있는 순진한 성도들을 나는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요즘에 목사는 아무나 다 될 수 있다. 목사에게 요구되는 전문성이라고 할 것은 사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들뿐이다. 글을 읽을 수 있으면 되고, 목소리가 나와서 여하튼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면 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정장 한 벌만 구입하면 되고, 기도를 폼 나게 할 수 있으면 된다. 정 신학교를 졸업해야만 한다면 널린 게 신학교다. 일반 성도들은 성서 자체에 관해서 듣고 싶은데 정작 목회자들이 성서를 잘 모른다. 목회자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은 "교회에서는 이래야 해, 성도들이라면 저래야 해"라는 자신들이 세워 놓은 규칙들뿐이며, 담임목사라면 다른 사람에게 최대한 비상식적일지라도 대접받는 방법을, 부목사들이라면 담임목사에게 최대한 순종하며 다른 사역자들과는 처절하게 경쟁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목회자들을 떠올려보고 그들의 전문성을 찾자면 대부분 이런 것들이 생각난다. 노래를 잘하거나, 눈치가 빠르거나, 여하튼 남 앞에서 말은 잘하거나, 때로는 세상 물정 모르도록 착하거나, 무례할 정도로 비상식적인 명령을 하는데 이상하게 따라야만 할 것 같은 위압감을 줄 수 있거나, 웃기거나, 담임목사 말에 순종하는 면에서 최고거나, 부목사들을 다루는데 최고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자기 아버지가 목사다.

요즘에는 교회에서 목사들에게 그 누구도 성서에 관한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 것 같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사들에게 그저 설교 시간에 이상한 소리만 하지 말기를 바랄 뿐인 것 같다. 성서의 오역을, 성서 원문의 뉘앙스를 우리에게 전달해 줄 목회자는, 성서에 대해서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목회자는 어디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것일까? 자신들만큼은 성서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대책 없는 목사들이 천지에 널려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말고, 진짜 목사를 만나고 싶다. 그런 목사를 찾아서 세상에 소개해 보고 싶다. 우리 기독교 전체를 위해서.

* 외부 필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장효진 객원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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