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거룩함을 향한 여정
2018년 7월 8일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입력 Jul 12, 2018 04:42 PM KST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고후6:14-7:1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화합하며,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더불어 함께 차지할 몫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그들과 떨어져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나 주가 말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설교문

* 덩달아 내달리는 동물들처럼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저는 어느 때부터인가 삶을 순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거룩한 중심에 당도하기를 바라며 삽니다. 특정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만이 순례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도달하려는 갈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는 순례자라 할 수 있습니다.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순례자로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생체 리듬이나 속도에 맞추어 살기보다는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속도에 적응하느라 헐떡입니다. 숨이 가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저런 일에 시달리다 보면 공허감이 입을 벌리고 달려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공허감과 불안은 까맣게 잊고 살던 자기 삶의 본질을 돌아보라는 일종의 초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화가 떠오릅니다.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던 토끼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뛰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토끼가 달리자 숲 그늘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다른 짐승들도 덩달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면서도 그들은 정작 왜 달리는 줄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남들이 달리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우화이지만 우리 삶의 풍자로 손색이 없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세인'(das man)이라 칭했습니다. 그들의 특색은 세 가지입니다. 1) 평균적 일상성: 그들은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해야 하고, 남들이 누리는 것을 다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다수의 사람들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갑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대중적인 조작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삶의 행복과 불행을 남과 같아지기 혹은 남과 구별되기에서 찾는 이들은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기 어렵습니다. 2) 천박한 호기심: 그들은 눈과 귀를 온통 바깥을 향해 열어놓고 삽니다. 마주치는 것을 끊임없이 교체하면서 흥분을 느낍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대개 시간의 향기가 배어든 것이건만 이들은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권태가 언제나 그들을 사로잡습니다. 3) 잡담 혹은 빈 말: 그들은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일들을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들은 맥락을 살피거나 성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받아들인 정보를 다른 이들에게 재빨리 전달할 뿐입니다. 참된 인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쩌면 이게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위대한 정신 위에 누우라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너무 극단적입니다. 감정적인 여백이 줄어들었고, 따라서 타인들에 대한 허용치가 너무 작아졌습니다. 다들 언제라도 화를 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경쟁이 심화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발생한 스트레스 때문일까요? 낯선 존재 앞에서 기쁨의 탄성을 질렀던 첫 사람 아담이 오히려 낯설거나 조금 모자란 것처럼 보이는 세상입니다. 자기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릴 뿐입니다. 몽테뉴는 "아무 데로나 가려는 자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는 법. 그 어떤 항구도 목적지로 삼지 않은 사람에게는 바람도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합니다(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 안인희 옮김, 유유, 2012년 9월 3일, p.95에서 재인용).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면 잠시 멈춰 서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멈추어 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 그리고 들리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는 19세기 미국의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진실하고 순수한 삶을 갈망하는 신학자 해리슨 블레이크와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책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여행하다 지칠 때면 우리는 짐을 내려놓고 길가에서 쉽니다. 그러니 삶의 무게에 지칠 때면, 스스로 지고 온 거짓의 짐을 내려놓고,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상쾌함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 아름다운 법칙을 따르도록 하십시오. 그것에 저항하면서 자신을 지치게 하지 마십시오. 육체를 쉴 때 우리는 육체를 지탱해 온 힘을 멈춥니다. 그리고 대지의 무릎 위에 편안히 눕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을 쉬게 할 때도 우리는 위대한 정신 위에 누워야 합니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류시화 옮김, 오래된미래, 2005년 3월 10일, p.47-48)

위대한 정신 위에 누워야만 정신이 쉴 수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소로우는 "단 하나의 사물이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성공한다면, 비록 그것이 나무에 매달린 얼어붙은 사과 한 개에 불과하더라도" 대단한 성과라면서, 바로 그것을 통해 어슴푸레한 우주와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순례란 이런 것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것 속에서 영원의 광휘를 보는 것,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것, 바로 그 때 인생은 신비가 됩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빛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느낄 때, 우리는 영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런 세상을 망가뜨리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게 됩니다. 자연 파괴, 동료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순례자로 살고 있습니까? 여전히 욕망 주위를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거룩함을 향한 여정으로 이해하는 것일 겁니다. 속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룩함이란 '구별되다', '성별하여 드리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롬12:1)라고 권했습니다. 나 좋을 대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시작되지만, 거룩한 삶은 일상과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밥 먹고, 일하고, 사귀고, 놀고, 잠자는 일체의 인간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함은 종교적인 행위를 기반으로 하지만,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구체화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려운 이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그들의 설 땅이 되려고 애쓰고, 그들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삶, 바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거룩한 삶입니다.

* 누구를 닮았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믿는 이들이 얼마나 쉽게 악에 물들 수 있는지를 잘 알기에 성도들에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의와 불의,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등 네 가지 대조를 통해 성도들이 굳게 지켜야 할 정체성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벨리알은 유대교 경외서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인데, 부도덕이나 가치 없음과 같은 악이 구현된 사탄적 존재입니다. 쿰란 문서에서는 빛의 아들들에 저항하는 흑암의 아들들의 지도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한 믿지 않는 이들과 교류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과도 잘 지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과의 사귐이 우리의 불의와 어둠, 그리고 과도한 욕망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세상이 얼마나 끈적끈적한 곳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고전15:33)라고 말한 것입니다.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인질로 잡힌 이들이 범인에게 동조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 닮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이 명하는 바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갖게 살려고 애씁니다. 그런 조율의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은 '자기 부인'(self-denial)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경험, 나의 지식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을 때 새로운 존재의 싹이 움터 나옵니다.

엠마우스 운동은 프랑스에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머물 공간을 마련해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운동입니다. 그 운동을 이끌었던 아베 피에르 신부는 그 치열한 실천 과정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구분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만족하는 사람 즉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 사이에 있다고 말합니다(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2001년 5월 1일, p93). 교회에 다니는 이들 가운데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빛이 아니라 어둠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몸은 교회에 와 있지만 마음은 세상을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공감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최근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동년배 친구를 산으로 끌고 가 집단 구타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만나 가끔 얼굴도 보고 하던 사이인데 괜히 센 척하는 게 미워서 손을 봐주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붙잡힌 그 아이들은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고 오히려 소위 '빵'에 들어가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답니다. 그 보도가 얼마나 사실에 입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영혼이 없는 좀비들을 보는 것 같아 오싹해집니다. 어둠이, 벨리알이, 우상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자기들의 종으로 삼고 있는 시대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생명의 뿌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 사람은 함부로 삽니다.

* 새로운 출발

바울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늘 주님이 머무실 곳을 마련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 주님의 마음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속을 자꾸 깨끗이 닦아야 합니다. 이따금 교우들 집에 심방을 가보면 집안이 참 깨끗합니다. 하지만 그게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저도 잘 압니다. 목사를 청하고는 식구들이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청소를 하는 것이지요. 거실과 방, 욕실, 장식장 위의 먼지도 다 닦아냅니다. 누추하고 더러운 곳에 손님을 모시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주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그런 것 아닐까요? 우리 마음이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욕망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삶의 인력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그들과 떨어져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나 주가 말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고후6:17)

저는 이것을 세상과 절연하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공간을 창출하라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정치학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할 때, 오히려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사멸성을 뜻하는 mortality와 대조되는 단어로 natality 곧 탄생성이라는 단어를 제시합니다. 이사야는 암몬-에브라임 연합군의 침공 앞에서 두려워 떠는 아하스 임금에게 두려워 말라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합니다(사7:14). 예수님의 탄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던 주님의 모범이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는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 곧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고 노래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길을 떠나는 순례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분위기를 세상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사랑하고, 나누고, 돌보고, 섬기는 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굳어진 마음이 부드럽게 변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조금씩이나마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기쁨을 안고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불쾌지수가 높아가는 계절이지만 세상에 유쾌지수를 높이기 위해 애쓰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거룩의 방향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 한 주간도 거룩함을 향한 순례자로 멋지게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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