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잃어버린 자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시편 147:1-4, 디모데후서 1:9-11, 누가복음 19: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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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누구나 살면서,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하게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열쇠도 잃어버리고, 지갑도 잃어버리고, 스마트폰도 잃어버립니다. 반려견을 잃어버려 애타게 찾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잃어버린 적은 없으신지요? 아이를 키우다보면 대체로 한번쯤 잃어버리는 경험이 있는가 봅니다. 저도 언젠가 큰 놀이터에서 서 너 살 된 저희 아이를 한 시간 정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공포감이 생생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잃은 것'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읽은 양'의 비유, '잃은 동전'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 중에서 나중 두 비유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며, 처음 비유는 마태복음 18장에 평행본문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잃은 양'에 대한 누가의 비유는 마태의 비유와도 몇 가지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로, 마태복음에서는 이 비유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마 18:1)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예수님을 반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눅 15:2)에게 말씀하십니다. 비유 말씀의 대상이 달라지면 비유의 메시지도 달라집니다. 둘째로, 잃은 양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단어가 두 복음서에서 서로 다릅니다. 마태는, "잃다"는 동사로 "플라나오"(planao, 영어로는 go astray)를 쓰는데, 이 단어는 옳은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나아가다는 뜻입니다. 마태가 생각하는 '잃은 양'이란 스스로 엇나가고 방황하는 교인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잃다"는 동사로 그리스어 "아폴룸미"(apollumi, 영어로는 lose)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실제로 분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누가가 생각하는 '잃은 양'이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죄인'으로 간주돼 버림받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세리'와 '죄인'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모든 배제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결국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방황하는 구성원이 하나도 없도록 하라는 목회적인 권면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는 예수님이 적대자들에게 자신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눅 19:10) 온 분임을 알려주는 논쟁적인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잃은 동전'의 비유와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계속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잃은 동전 혹은 '잃은 은전'의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이 비유는 앞에 나온 잃은 양의 비유와 똑같은 메시지를 던집니다. 즉 '잃었던 것을 다시 찾아 기뻐한다'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물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해 애쓴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애쓰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았을 때 그토록 기뻐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잃은 자들을 다시 찾았을 때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잃은 아들'의 비유도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특수자료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서나 심지어 외경 복음서 어디에도 평행본문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비유는 보통 '탕자의 비유'(parable of the prodigal son)이라고 불려왔습니다. 하지만 누가가 이 비유를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의 비유에 뒤이어서 편집한 것을 고려할 때 이 비유의 보다 적절한 명칭은 '탕자의 비유'라기보다 '잃은 아들의 비유'가 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세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을 찾아 기뻐하는 것을 공통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를 나누셨습니다. 그것은 유대 정통파에게 참기 어려운 도전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땅의 백성들'이라고 부르며 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손님이 되거나 이런 사람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것도 철저히 금지했습니다. 당시 엄격한 유대인은 "죄인의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 "죄인의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말살되면 하늘에 기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런 배타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기쁨을 세 가지 비유로 일러주신 것입니다.

당시 양떼들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공동 소유였습니다. 책임은 둘 혹은 세 사람의 목자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양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데 명수들이었습니다. 방황하는 양의 발자국을 따라 몇 킬로미터도 언덕을 넘어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개 목자들은 양떼들을 무사히 이끌고 시간 맞추어 마을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때로는 아직 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산에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오는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은 그쪽을 향해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멀리서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마을로 걸어오는 목자를 보게 되면 온 마을은 기쁨과 감사의 환성을 지르게 됩니다. 바로 이 모습이 예수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묘사하신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집으로 돌아올 때 모두가 기뻐하는 것과 같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았을 때 기뻐하신다!' 실로 여기에는 놀라운 사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인습과 전통에 집착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오직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단정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추방시키고 배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에서도 우리는 같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눅 15:8)며 예수님은 두 번째 비유를 시작합니다. 드라크마는 은전입니다. 팔레스타인 농가에서 이런 돈을 잃어버리기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전형적인 농가는 직경이 50센티미터가 안 되는 작은 원형 창문 하나로만 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집안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마루는 다듬은 흙바닥에 마른 갈대와 골풀을 깔았습니다. 그래서 돈 한 닢 찾기란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동전을 잃어버린 그 여인은 그 은전이 반짝이기를 바라면서 마룻바닥을 쓸고 또 쓸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족의 끼니를 잇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었거나 당신의 풍습을 고려해보았을 때 결혼예물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니 그 동전을 찾았을 때 그 여인의 기쁨이 얼마나 컸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바로 그와 같으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에게 대단히 낯선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스스로 타락해도 하나님께 돌아와 긍휼을 베푸시길 기도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찾으신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은전을 찾은 여인은 벗과 이웃을 불러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눅 15:9)고 기뻐합니다.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방황하다 결국 집을 향해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눅 15:20-23) 잔치를 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자녀를 다시 찾을 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분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이 세 가지 비유를 소개한 복음서의 기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 공생애 활동의 마지막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대(大)주제를 반복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잃은 누가복음 19장의 저 유명한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도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만큼 삭개오의 이야기는 누가의 독특한 신학과 사상을 말해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여리고(Jerico)는 당시 매우 부유한 고을이었습니다. 해발 760미터나 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무려 1,200미터나 내려온 덥고 무성한 요단계곡 안에 위치한 여리고는 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기름진 토양과 풍성한 과일로 유명한 이곳에는 울창한 종려나무 숲이 있었고, 주변 수 킬로미터까지 향기를 풍기는 발삼(balsam) 향나무 숲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리고를 '종려나무의 도시'(city of palms)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도시를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여기서 생산되는 대추야자와 발삼 향유가 로마제국의 사방으로 팔려나가며 큰 부를 쌓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여리고는 로마제국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과세의 중심지였습니다. 삭개오는 바로 이 도시의 세리장, 즉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들이 얼마나 큰 탐욕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눅 5:27-32). 그러니 삭개오라는 인물이 얼마나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을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는 부정축재로 큰 부자가 된 사람이었고, 그의 직업과 불의한 행동 때문에 동족의 멸시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마을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혹 기적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꽉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 무리 속에 삭개오도 끼어서 예수님을 보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리들 속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키가 워낙 작아 예수님 일행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키가 크고 힘 센 자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기를 한참 반복하다가 그는 결국 무리에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몸이 작기 때문에 밀러날 수밖에 없는 경험, 그래서 무대의 중심에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좌절, 이것이 단지 삭개오만의 일이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삭개오가 이미 전에도 수없이 되풀이해서 겪어 온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키가 작아 아마도 어릴 적 별명이 '땅꼬마' 혹은 '숏다리'였을 삭개오는 툭하면 몸이 크고 힘센 녀석들에게 짓밟혔을 것이고, 예쁜 여자들도 상대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늘 뒷전으로 밀리고 업신여김을 받고 자랐다면 삭개오가 자기 주변과 세상에 대해 선한 마음을 갖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비정한 현실 앞에서 그는 또다시 분노를 삭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약하다 싶으면 이내 밀어내고 짓밟아버리기 일쑤인 세상에서 살아갈 처세술로 자신의 작은 키를 대신해줄 나무, 그것도 남들은 감히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큰 나무 위로 올라가 떵떵거리며 살겠노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좋다, 내가 너희들 머리꼭대기에 올라가서 네 놈들을 한없이 내려다보며 살 것이다!' 그는 이렇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택한 '크고 강한 나무'는 바로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는 그 커다란 나무를 오르고 또 올라서 결국 동족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세리들의 우두머리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내심 통쾌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대놓고 덤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설사 뒤에서 어떤 욕지거리를 하더라도 자기 앞에서는 설설 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역시 내가 그 고생을 다하면서 나무 위로 오르고 또 오른 것은 백번 잘 한 일이다'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일행을 보려다가 사람들에게 치여서 무리 밖으로 밀려나간 삭개오는 다시 이제까지 그가 살아온 방식대로 즉시 그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습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니라 또다시 '남보다 앞서 먼저 높이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커다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가 오른 나무는 한 때 성서번역이 잘못돼 '뽕나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팔레스타인 땅에는 뽕나무가 없습니다. 히브리어로 '베카임' 그리고 그리스어로 '쉬카모레아'로 불리는 이 나무는 돌무화과나무, 혹은 이집트 무화과나무입니다. 이렇게 나무 위에 오른 삭개오의 모습은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사실 평생 그가 살아왔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아니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무리를 뚫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삭개오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힘이 없다고 업신여김을 받은 것이 너무도 분해서 더 오를 데가 없을 때까지 '나무타기'를 거듭하는 인생들을 말입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높은 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보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예수님은 이미 그를 찾고 있었습니다. "삭개오야!" - 그것은 수많은 익명의 무리 가운데 단 하나 특별히 지목해서 불린 이름이었습니다. 그 호명(呼名)은 그동안 이리 채이고 저리 밀려서 늘 가장자리밖에는 차지하지 못했던 삭개오를, 모두가 보는 자리로, 무대의 중심으로 전격적으로 불러내는 목소리였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어(詩語)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그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꾀와 처세술로 독하게 살아오는 동안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었던, 그의 영혼의 가장 밑바닥에 이제는 보일 듯 말 듯 감추어져 있던 그의 선함을 불러일으키는 생명의 목소리였습니다. '삭개오야, 나는 너를 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너를 알아주지 않지만, 나는 너의 아픔을 안다. 너의 눈물을 안다. 그리고 네 영혼 안에 감추어진 순결을 본다!' 그것은 울고 있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본 예수님의 따뜻한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삭개오'(Zacchaeus)라는 이름은 '순결'을 뜻하는 히브리어 '자카이'(Zakkai)의 그리스어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그의 '인생의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살이가 서러워 독한 마음을 품고 오르고 또 올랐던 그 높은 나무에서 어서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이상 그런 곳에서 그렇게 머물러 있는 한 나와의 진실한 만남은 이룰 수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삭개오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홀로 서럽게 버려지는 일이 없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고 하셨습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의 필연을 뜻하는 '데이'(dei)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일부라는 의미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단어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현재적 실현을 뜻하는 말로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빈번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공개적인 선언으로 삭개오의 집은 갑자기 여리고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삭개오도 당연히 이 사건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데뷔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그에게 이제 그의 주변은 더 이상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회개와 사랑의 대상으로 일시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의 집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보면서 삭개오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새로운 일과 자신이 살아야 할 새로운 삶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님께 고백하고 결단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훨씬 상회해서 구제와 배상을 다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소유의 절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율법에 의하면 이웃을 구제할 경우 소유나 수입의 5분의 1이면 충분했습니다. 삭개오는 남은 재산의 절반도 자신이 토색한 것이 있다면 네 배나 배상하는 데 쓰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율법에 의하면 의식적인 강도 행위가 명백할 경우에만 네 배로 보상하도록 했습니다(출 22:1). 평범한 도둑이었다면 갑절만 배상하면 됩니다(출 22:4,7). 만일 속여 빼앗은 자가 자수하고 자발적으로 배상한다면 본래 물건의 액수에 5분의 1만 더해 지불하면 됐습니다(레 6:5, 민 5:7). 그러니 삭개오가 지금 얼마나 법이 요구하는 것을 넘어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곧바로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 19:9). 삭개오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집 전체가 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공동체 전체를 살린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래의 온전한 상태로의 회복을 뜻합니다.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오늘 읽은 공동기도문의 기도시(민에스더의 "삭개오의 기도")처럼 그는 "가지면 행복해질까 하고 무서운 세월을 살았"지만 "이제는 가진 것들보다도 잃어버린 것들이 더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손 잡아주고 기대어 볼 이름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눅 19:9)라고 선포하시면서 그가 이제 구원을 받았음을, 즉 이제 그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본래의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누가복음이 말하는 '잃어버린 자'는 저주 받고 파멸될 처지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잘못된 위치에 있음'(in the wrong place)을 뜻합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하여 그동안 잘못된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삭개오를 예수님은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실로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말씀대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시편 147:203) 분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인생의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계십니까? 날마다 무엇을 찾아 그 위태로운 나무 위를 높이 오르고 있습니까? 무엇에 쫓겨 그 나무를 타기로 결심했습니까? 그 나무가 과연 진정한 평화와 기쁨, 그리고 구원을 주던가요? 지금 여러분은 어느 나무 위에서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구경'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인생의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우리를 "쳐다보시며"(눅 19:5) '아무개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나무 위에서 내려오십시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내 속울음 듣고 계셨던 주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속히 내려오십시오. "생전 처음 나를 나이게 한 그 눈빛"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나를 불러준 그 [생명의] 목소리"에 응답하십시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눅 19:1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잃어버린 동전을, 잃어버린 자식을,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잃어버린 자를 찾았을 때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가 우리가 높이 올라 있는 인생의 무화과나무 앞에 와 계십니다. 어서 속히 그 나무에서 내려오십시오. 열등감과 슬픔과 좌절과 미움의 마음으로 남들과 경쟁하며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던 그 위태로운 나무 타기를 이제 그만두십시오.

대신 그런 삶에서 내려와 회개와 용서와 나눔과 구원의 참 기쁨의 삶을 살아가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십시오. 그리하여 수많은 구경꾼 속에 영원히 잊힌 존재가 아니라 가족과 이웃과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함께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로 새 날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8.6.17.)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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