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크리스찬북뉴스 서평] 털 달린 원숭이 예수?
교회를 나온 신학, 사람들과 대화하다

입력 Jun 04, 2018 06:55 PM KST

신학을 다시 묻다

후카이 토모아키 | 홍이표 역 | 비아 | 212쪽 | 13,000원

hukai
(Photo : ⓒ비아)
▲신학을 다시 묻다 겉표지.

스페인의 한 교회에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로 불리는 100년이 넘은 예수 프레스코 벽화가 있었다. 스페인 화가인 엘리아스 가르시아 마르티네스(Elías García Martínez)가 그린 것으로, 가시관을 쓰고 한쪽으로 얼굴을 약간 기울인 표정의 예수다.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 그름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 그림이 훼손되자, 벽화를 복원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고, 아마추어 복원가인 80이 넘은 세실리아 히메네스(Cecilia Giménez)에게 맡겨졌다. 복원이 완성된 후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는 이전의 그림과는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 사람이 아닌 털 많은 원숭이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소문이 알려지자 관심도 없던 이 그림은 수십만 명이 찾는 명화가 됐다. 명화의 제목처럼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가 되고 말았다. 교회는 발 빠르게 대처했다. 사람들이 몰려오자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고, 많은 수익을 올렸다. 1년 만에 5만 유로(한화 약 7,500만 원)의 수입을 올렸고, 티셔츠와 머크컵 등에 새겨 수익도 챙겼다.

이곳은 관광지가 되었고, 이 소식을 아는 사람들은 기회가 되면 스페인 사라고사 주 캄포 데 보르하(Campo de Borja) 지방 중심지인 보르하(Borja) 마을에 소재한 미제리코르디아 성지(Santuario de Misericordia, 성당)를 찾는다고 한다. 가보고 싶지 않은가.

아마추어 작가인 히메네스 할머니는 초보자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들은 이베이에 올려 경매를 진행할 만큼 기본적인 실력을 갖춘 화가이다. 그런데 왜 예수를 원숭이로 만들었을까?

바로 '에케 호모'가 그려진 곳이 석고로 된 교회 벽이었기 때문에, 일반 캔버스와 석고벽은 화법 자체가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한 히메네스는 선한 의도로 출발했지만, 고난받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털 많은 원숭이로 그리고 말았다.

신학은 쓸모없는 학문인가?

신학은 어떤가? 위의 이야기를 언급한 저자는, 신학에서도 충분히 이러한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신학은 성경만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연구하는 신학은 다양한 사회 조직과 법 제도, 자유민주의 등과 같은 서구적 기원에 바탕을 두고 있다(191쪽).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진정한 신학은 이러한 현실과 마주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사회적 맥락이 결여된 신학은 독단적이며 왜곡된 형태로 이식된다. 저자의 결론을 들어보자.

"그리스도교는, 그리고 신학은 현대 사회의 관용 없는 그릇된 절대주의, 그 반대편에 있는 무절제한 상대주의, 그리고 그 양쪽에 잠복해 있는 자기절대화 모두를 거부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신학과 그리스도교 역사의 잘못된 발전이 잉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가 본래 갖고 있던 모습과 사회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일에 신학이 기여함으로써 신학은 오늘날 세계에 말을 건네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196쪽)."

부제를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로 정했는데, 이 책이 말하는 의도를 요약한 것이다. 사회 속에서 신학이 어떤 기능을 감당해 왔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의 세계 속에 신학이 마주할 때, 신학의 필요성에 대해 의의(意義)를 제기하는 것에 대한 답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신학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전제로 한 다음,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그 내용의 이해를 돋는 학문(27쪽)'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의 정의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학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전문적으로 신학을 하지 않고도 '성경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종교개혁자들의 발의를 저해할 수 있다. 또 신학을 하지 않는 일반 성도들을 2류 신자로 취급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마지막 하나는 비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무의미한 일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학을 중단해야 하는가? 저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렇기에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신학을 모르면 오늘날 세계의 구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30쪽)".

신학은 세계와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프레임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세계대전이 일어날 즈음, '전쟁 신학(Wartime theology)'이란 단어의 빈도 수가 높아졌다. 독일 신학자들은 창조질서의 원리와 루터의 두 왕국론을 새롭게 해석하여 전쟁을 찬성하고 옹호한다.

현대 정치신학도 한 세기 전의 전쟁 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신학은 저자의 주장처럼 '추상적인 논의가 아니라, 정치나 전쟁을 뒷받침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론이다(33쪽)'. 신학을 통해 원래의 이미지가 아닌, 털 달린 예수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학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 또한 사회적 맥락 속에 '신학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신학자 자신이 세상과 동떨어져 순수한 신학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시대의 아들로서, 시대의 정신을 갖고 있다.

또 하나님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그 사람을 부르셨고,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하셨다. 저자는 역사 속에서 신학의 궤적을 추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학함'이 무엇인지 재고(再考)한다.

1-2장은 서론에 해당하며, 신학이 무엇이며 신학을 왜 해야 하는지 살핀다. 2장에서 저자는 초대교회에서 종말이 지연됨으로 교회가 떠안게 된 신학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신학은 삶에 대한 '재해석'인 것이다.

"신학이란 시대정신이나 사회적 상황이 낳은 물음에 대해, 그리스도교라는 무대 위에서, 당대 언어나 사상을 활용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는 시도로 불 수 있기 때문이다(51쪽)".

궁극적으로 신학은 삶과 실존에 대한 '답'을 준다.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이었다. 중세 사람들이 던진 질문에 교회가 답을 주지 못하자, 개혁자들이 '답'을 제시한 것이다.

3장에서 중세의 신학적 흐름을 살핀 다음, 4장에서 종교개혁과 중세 몰락의 의미를 설명한다. 저자는 이 시기를 '정체성 형성으로서의 신학(41쪽)'이라고 부른다. 4장 말미에서 보수적 루터파는 '내셔널리즘과 결합한 신학(117쪽)'을 만들어 냄으로써 전쟁 신학을 합리화한다.

종교개혁을 단순한 교리의 개혁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성공과 그 과정은 독일의 근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과 종교개혁 정신이 '안성맞춤(99쪽)'이었던 것이다.

실용주의 신학의 등장

17세기에 들면서 '실용주의로서의 신학'이 등장하는데, 종교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권이 주어지면서 이때의 신학은 종교가 '상품'으로 전락한 시기에 해당한다(42쪽). 저자는 종교개혁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 과정에 대해, '신학의 시장화'라는 제목을 달았다.

보편 교회라는 명칭을 지녔고, 실제로 한 교회인 가톨릭에서 분열해 나가 새로운 종교의 형태를 제공한 종교개혁은, 불가피하게 분열의 씨앗을 심었다. 종교개혁 이후 종교가 핵융합 반응처럼 분열에 분열을 더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 부분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2009, DMI)>에 심도 있게 서술되어 있다.

저자는 근대의 상징인 프랑스 혁명 속에서 신학의 새로운 변모를 발견한다. 종교의 장소가 교회라는 공간에서 사람의 마음으로 옮겨간다. 교회적(的)은 아니지만 종교적이 된 사람들은 '개인의 내면(146쪽)'으로 그리스도교의 활동 장소를 옮긴다. 일종의 세속화로 불리는 현상이다 세속화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의 전조현상으로, 일상을 탈피한 '신비주의(147쪽)'가 등장한다. 두 번째 변화는 '신학이 종교학으로 바뀌었다는 점(147쪽)'이다.

이러한 두 가지 변화가 현실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시기는 '바로 지금 한국교회'다.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세속화는 현대 교회가 가진 다양한 형태의 교단이나 종교 형태 등을 배태(胚胎)한다. 현재 우리의 가나안 성도들은 당시 교회 밖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프랑스 혁명은 무신론적이며 불신앙적이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초월적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자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이라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현대의 가나안 교인들의 발생은 신학이 교회라는 공간에 함몰되어, 사회에서 부정과 부패를 주도하면서도 거룩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반동이 아니고 무엇인가?

신학의 시장화

실용주의 신학의 등장은 종교개혁과 프랑스 혁명이 낳은 사생아다. 저자는 기독교의 '시장화'가 싹튼 시기와 관련, 영국의 청교도 등장을 주목한다. 영국 국교회 아래 청교도는 을의 위치였고, 반목과 협력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국교회를 인정하지 않지만, 자유와 인권을 강조했던 청교도들은 신대륙을 건너가 그들만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실용주의다. 미국 사회사와 교육사에서 '실용주의'라는 단어는 미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한국교회 제도를 택하지 않으면 모든 교회는 사회에서 자발적 결사체가 되며, 종교 시장에서 자유로이 경쟁할 수 있게 된다(162쪽)".

미국에서 '자유, 신용, 단체 소속서' 등이 그토록 발달하게 된 이유는 이러한 종교적 이유 때문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시장, 세계화, 경쟁'이란 단어가 대부분 미국에서 건너온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또 시장에 '자유'가 붙고, 세계화와 '민주적'이란 표현이 은밀하게 밀착된 이유가 그들이 가진 실용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개인화되고 경쟁 체제 안에서, 신학은 신학 자체가 아닌 개인의 물음에 답을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영향력은 공적이 아닌 개개인의 물음에 얼마만큼 보편적이고 구체적으로 답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저자는 이것을 '신학의 시장화(173쪽)'라고 말한다.

실용주의에 함몰된 신학은 진리성과 정통성이 희미해진다. 대신 '사용 가능한 신학(174쪽)'이 되고, 시장의 유행을 따라가는 상품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진리를 다루는 신학이 '결국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일회용 신학, 유효 기간이 지극히 짧은 신학을 양산(175쪽)'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신학의 오용을 염려하면서, 마지막 장에서 다시 '신학의 현실성'을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신학의 현실성이란 무엇일까?

먼저, 다양한 기독교를 인정하라. 신비로운 동방정교회나 가톨릭 예배가 전부가 아니다. 설교 중심의 개혁주의 전통만 순수한 전통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 어떤 교단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춤추며 찬양하고 예배한다. '낯섬과 놀라움'을 받아들여야 한다(184쪽).

둘째, 교회 밖 신학을 신중하게 고려하라.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고민이 철저히 종교적이고 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교회가 그들에게 답을 해야 할 필요도 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며, 교회 밖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가진다. 즉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셋째, 신학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라. 신학함으로 그 사회와 역사, 문화가 갖는 이면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다. 저자는 타이타닉이 빙하에 충돌하여 침몰한 사건을 언급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신학을 안다는 것은, 이러한 수면 아래 있는 얼음의 세계, 사회의 심층 구조,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산출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이다(189쪽)".

서두에 이야기한 '털 달린 원숭이 예수'의 이야기는 이 부분에 첨부돼 있다. 피상적인 관찰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우리는 신학함으로 다시 역사와 사상, 사회와 문화 등의 다양한 변이의 과정을 살필 수 있고, 진단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을 철저히 상대화하여 '참된 의미에서 대화(195쪽)'를 시도해야 한다. 신학은 신을 신고 교회를 나와, 사회로 들어가야 한다. 바울이 이방인들과 직면하고 그들에게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을 알려 주었던 것처럼 해야 한다.

이웃과 대화하기 시작할 때 신학함은 비로소 시작된다. 왜냐하면 '신학은 근본적으로 대상을 겸손한 자세로 마주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문(195쪽)'이기 때문이다.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처음 신학을 시작하던 초대교회의 임무가 아니었던가. 이제 저자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교가 본래 갖고 있던 모습과 사회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일에 신학이 기여함으로써 신학은 오늘날 세계에 말을 건네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나는 오늘날 세계에 깔려있는 심층적인 문제를 풀 실마리를 신학을 통해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196쪽)".

필자인 나도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신학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원숭이로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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