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그 날 그 부활절 저녁에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에스겔 37:1-6, 빌립보서 3:10-14, 요한복음 20: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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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21세기가 시작되기 전 미국의 한 잡지사가 저명인사 1백여 명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인류가 발명한 것 중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답이 나왔습니다. 자동차다, 비행기다, 컴퓨터다, 혹은 민주주의다.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더글러스 러시코프라는 과학자가 대단히 인상적인 답을 제출했습니다. 그의 답은 고무지우개였습니다. 그는 거기에 덧붙여 컴퓨터의 'delete' 키, 화이트, 그리고 헌법의 개정조항 등, 인간의 실수를 수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류의 발명품 중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대답입니다. 만약 인생에서 내 실패와 실수를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는 고무지우개와 같은 것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바로 그런 지우개의 역사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그 날 저녁,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의 실패와 좌절을 깨끗이 지우시고 우리가 모인 이 교회라는 신비한 공동체를 탄생하게 하신 그 날 그 부활절 저녁의 사건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부활절 새벽 화려한 주님의 모습만 보려고 하고, 그 뒤에 가려져 있는 제자들의 명백한 실패와 좌절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절망과 패배 위에서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믿음의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는지도 보지 못합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이야기는 곧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실패와 좌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성서는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힘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신 다음의 일들을 기억하시는지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던 제자들은 모두 무서워서 뿔뿔이 도망쳤습니다. '바위'라고 불릴 만큼 믿음직스러웠던 베드로도 자신의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험한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실 때 멀리서나마 몰래 뒤따라간 제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성서 아무 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라는 호칭도 받지 못한 여인들만이 슬피 울며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 골고다 길에서 지쳐 쓰러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간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고 시골에서 올라오고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 처절한 십자가 형틀 위에서 신음할 때 제자들은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는 일도 제자들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아리마대 출신 요셉이라는 사림이 예수님의 장사를 대신 지냈습니다. 상대적으로 체포의 위험이 덜해진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드리러 올라갔던 이들 역시 제자라는 호칭을 받지 못한 여인들이어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듯 철저히 자신의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듯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에 동참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부활사건에 참여하는 데도 실패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야 뒤늦게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거기서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그 부활절 저녁의 사건이 벌어진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동참하는 데 실패한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몰래 숨어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바로 그 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 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for the fear of the Jews) 문을 안으로 닫아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서를 읽으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날 저녁 과연 그들이 정말로 무서워했던 것은 누구였을까? 그 날 저녁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장 마주치기 두려웠을 인물은 누구였을까? 어쩌면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부활했다고 전해들은 예수님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다시 뵌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던 제자로서의 자부심은 이미 땅에 떨어진지 오랩니다. 솟구쳐 오르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그 분에 대한 한없는 죄송함과, 인류 구원을 위한 그 결정적 시점에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에, 그들이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다시 뵐 수 있었겠습니까? 제자들이 정작 걸어 잠그고 있던 것은 그 다락방의 문이 아니라 아마도 그들의 창피한 마음의 문이었을 겁니다. 제자들은 그날 주님의 낯을 피해 이 세상 끝까지 도망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영원히 예수님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본문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suddenly) 그들 한 가운데 오시어 'salom alekem!'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라고 인사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짧은 본문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두 번이나 반복된 예수님의 이 평화의 인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곧바로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 즉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새로운 사명의 말씀입니다. 만약 그 날 그 부활절 저녁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이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우리들의 귀에 이 주님의 환한 평화의 인사가,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이 새로운 소명의 말씀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야단과 질책이 쏟아져도 아무 할 말이 없었을 그 제자들에게 주님의 이 인사와 새로운 사명의 말씀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질책과 꾸중이 쏟아질 줄 알았던 예수님의 입에서 제자들은 뜻밖에 따스한 평화의 인사와 그동안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시던 일을 대신 맡으라는 엄청난 위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만약 평범한 인간이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겁니다. '베드로, 네가 그러면 그렇지. 원래 그런 놈인 줄 이미 알았다. 널 믿은 내가 바보다. 요한 너도 나를 무지 실망시켰어!'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패를 상기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지나간 며칠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과 똑같이 제자들을 품으시고 믿어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던 부끄러움과 죄책감, 자신에 대한 창피함은 눈 녹듯 사라졌을 것입니다.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다시 살아났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긍정으로 긍정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믿는 데 실패했지만, 그 분은 제자들을 믿는 데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분을 부정하였지만 그 분은 제자들을 긍정하셨습니다. 그 분의 믿음이 제자들의 불신앙을 이겼습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16강만 돼도 소원이 없다던 한국 축구팀이 4강까지 진출하는 기적이 일어나 온 국민을 감동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 모두를 또 한 번 감탄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길거리 응원단입니다. 수많은 시민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도 대단했는데,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거리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는 건 실로 놀라운 감동의 드라마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언론 보도에 의하면 그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외국손님들이 많이 오시니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역시나' 하는 부끄러운 현장들이 처음에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사 기자들이 부정적인 장면들보다 깨끗이 치워진 거리 같은 긍정적인 장면들을 적극 부각시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자신들도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갑자기 모두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우리가 원래 이런 사람들이었지!' '그렇고말고, 우리가 이렇게 수준 높은 선진 시민이야!' 인간이 가진 작은 긍정적인 요소를 부각시켰더니 전체가 다 자기긍정이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분출해 내더라는 겁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를 긍정해주고 믿어주는 데 인색합니다. 하지만 쇠를 만드는 것은 쇠이고, 사랑을 만드는 것이 사랑이며, 긍정을 낳는 것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요,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은 추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입니다. 나의 긍정이, 나의 아름다움이 또 다른 긍정과 아름다움을 낳습니다. 때문에 변화를 원한다면, 나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이 역사의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을 불러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믿는데 실패했지만 (그리고 실패하지만), 주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신뢰해주십니다. 제자들은,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다가 좌절하고 낙담하고 주저앉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어 우리를 다시 그 선교의 현장으로 부르십니다. 바로 그 분의 그 놀라운 사랑과 믿음이, 그 날 그 부활절 저녁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소심한 제자들을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수님의 진정한 사도들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전체의 클라이맥스로 나아갑니다. 그 날 그 부활절 저녁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일어난 놀라운 성령 사건으로 가보겠습니다. 두 번의 따스한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의 두려움을 깨끗이 지우시고, 곧이어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심을 선언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후~'하고 숨을 내뿜으시며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20장 22절이 요한복음 전체의 절정을 이룬다는 것에 성서학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는 듯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변호해주시는 분'(Advocate) 혹은 '도와주시는 분'(Helper)이라는 뜻을 가진 이 성령을 보내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16-17). 그리고 그 영은 진리의 영이며(15:26),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13). 예수께서는 이 약속을 첫 부활절 저녁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때,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뿜으셨다(emphysao)라는 요한의 증언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의 영을 '숨'으로 표현한 곳은 딱 세 군데뿐입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2:7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그 사람이 비로소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을 때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두 번째는 오늘 읽은 에스겔서 37:9에, 패망한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마른 뼈들이 널려있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숨이 사방에서 불어와 그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에스겔의 환상 속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오늘 우리의 본문 요한복음 20:22에 마지막으로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을 숨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의미할 때에만 엄격히 제한되어 쓰였던 것입니다. 흙에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죽음의 골짜기에서 새 민족을 일으키신 것처럼, 제자들의 실패와 불신앙의 폐허 위에서도 하나님은 기어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신비한 새 생명공동체를 창조하셨음을 요한복음의 저자는 힘 있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예수께서 사망에서 일어나신 그 날 새벽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십자가의 처형으로 뿔뿔이 흩어져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의 불신앙을 용서하시고 직접 숨으로 성령을 불어넣어주신 그 날 저녁에 완성되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죽음과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믿음 없는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의 승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식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열정은 식는 법이 없습니다. 제자들의 실패 속에서도, 우리들의 불신앙 위에서도 하나님은 기어이 성령의 새 역사를 시작하시고야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이 아무리 부족하고 불완전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사랑과 믿음의 불씨로 세상 전체를 태워버리고도 남는 거대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마지막 날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생각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시고 긍정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다시 시작하지 못할 실패한 인생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부정과 추함과 오욕의 역사를 깨끗이 지우고 새로 시작하지 못한 민족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는, 마더 테레사의 말처럼,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하나님은 지우개입니다. 우리 각자는 인생이라는 노트에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날마다 열심히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쓰다보면 깨끗이 지우고 다시 쓰고 싶은 문장도 존재할 것입니다. 2천 년 전 그 첫 부활절 저녁에 제자들의 실패와 좌절을 깨끗이 지우시고 새 생명과 희망의 역사를 쓰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새 삶을 살도록 우리들의 절망과 좌절을 깨끗이 지워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에 대해 "No"(아니오)라고 말합니다. '너는 틀렸어. 너는 실패했어. 이젠 넌 가망 없어!'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Yes"라고 말씀하십니다. '난 널 믿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small no"들에 대한 "Big Yes"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를 뒤집어놓음으로써 우리를 창조적인 변화로 이끌어내시는 분"입니다(God is the One who opens us to creative transformation by reversing our self-evaluation). 신앙이란, 폴 틸리히의 말처럼,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믿어주심으로 우리의 불신과 미움과 의심을 이기셨습니다. 그 분의 숭고한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 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 것입니다. 2천 년 전 그 첫 부활절 저녁의 그 사건이 지금 여러분 모두의 사건과 감동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2018.4.1.)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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