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애써 주님을 알자

2018년 2월 11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호6:1-6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 인간과 하나님의 숨바꼭질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 직전 주일로 통상 변화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주님이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 모습이 해처럼 환하게 변화되셨던 사건을 기념해 왔습니다. 수난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기 전 마치 심호흡을 하듯 주님은 제자들을 빛의 세계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현장에 있던 세 제자는 그 때 비로소 스승으로 모셨던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빛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밝고 덜 밝은 차이는 있지만 빛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의 과제가 있다면 어두워진 우리 존재를 닦고 또 닦아 맑아지는 것일 겁니다. 예수님은 더러움과 어둠이 없었기에 빛 그 자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빛이라" 이르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엡5:8)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빛의 자녀답게 살고 있습니까?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세상 앞에 드러내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 앞에 설 때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향한 순례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땅의 현실에 붙들려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 영혼의 뜨락에는 이런저런 허섭스레기들이 가득 차 있고, 거미줄 또한 잔뜩 쳐져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고단하다는 핑계로 하루 이틀 청소를 게을리 한 결과 우리는 불투명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예배는 이제는 돌아오라는 주님의 부름과 인간의 응답이 아름답게 만날 때 이루어집니다. 예언서를 읽다보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부름과 자주 마주칩니다. 인류의 첫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나무 뒤로 몸을 숨긴 이후, 인간은 버릇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인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숨바꼭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죄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기도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는 권고로 시작됩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떠났음을 전제로 합니다. 떠나지 않은 자는 돌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마음을 거두어 자꾸만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떠난 줄도 모르고 산다는 데 있습니다. 떠난 줄 모르니 돌아갈 생각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문화, 종교, 정치, 경제도 있는 법입니다.

* 어두운 시절

호세아는 주전 8세기의 예언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동방의 강자인 앗시리아가 그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근동 지역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디글랏빌레셀 3세가 통치하던 시기는 최악이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민족과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봉신封臣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노예를 획득하고, 조공을 강요함으로써 앗시리아의 배를 불렸습니다. 또한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이주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들었던 땅을 떠나 낯선 곳으로 옮겨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위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왕국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군사적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왕들이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각자 자기 마음에 맞는 왕을 세우려는 자들의 달아오른 마음을 빵 굽는 화덕에 빗대기도 했습니다(7:6). 아무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음모와 술책, 속임수와 폭력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길르앗은 폭력배의 성읍이 되었고, 사람들의 발자국마다 핏자국이 뚜렷하다고 자기 시대를 고발합니다. 제사장 무리들은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을 살해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서로 속이고 도둑질하고 떼 지어 몰려다니며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약탈(6:8-7:2)했습니다.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은 애굽이나 앗시리아에게 빌붙어 권력을 차지하거나 유지하려 했습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는 일 뿐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고, 줏대 없는 비둘기이다. 이집트를 보고 도와 달라고 호소하더니, 어느새 앗시리아에게 달려간다."(7:11) 호세아는 권세자들의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사심 없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다 보이는 것을 정작 당사자들만 모르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내남없이 타락한 그 시대, 신뢰도 이웃 사랑도 다 사라진 그 시대를 향해 호세아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8:7)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죄는 자기중심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는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사고하게 만듭니다. 남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죄인을 가리켜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이라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죄에 사로잡히는 순간 사랑의 능력은 상실됩니다. 사랑은 자기 초월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더 이상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기의 안일한 평안을 포기합니다. 호세아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오로지 자기 안위에만 마음을 쓰는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6:4b)

이렇게 사랑의 무능력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절박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궁극적 관심이 아니라 부차적 관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잊혀졌습니다. 호세아는 이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나는 저 광야에서, 그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먹이고 살렸다. 그들을 잘 먹였더니 먹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를수록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나를 잊었다."(13:6)"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8:14a)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조금 불편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본능을 거슬러 타자들의 마음을 살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짐짓 하나님을 잊으려 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이웃과의 연대에서 비롯되는 생명의 따스함이 사라지는 동시에 세상이 점점 살벌하게 변합니다. 음모와 술책과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은 그렇게 도래하는 것입니다.

*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간결하지만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주님께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될까요? 일상의 삶을 중단하고 산 기도에 매진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의 길은 땅의 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땅의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 높은 곳에 이르려면 저 낮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10:12)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야말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정의만 외치면서 정작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사랑을 말하면서 정의를 소홀히 하는 것은 다 잘못입니다. 이스라엘의 전도자는 말합니다.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전7:16) 그러면서 그는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전7:18)고 말합니다. 이건 어중간한 중간을 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균형을 잘 잡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사람은 때에 맞춰 사는 것이 군자의 중용이라 말합니다.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집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 시중時中이라 합니다. 그에 비해 소인의 중용은 거리낌 없이 사는 것(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中庸2章)입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야말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 속에 담긴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12:6)

사랑과 정의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로 돌아감입니다. 우리의 가능성에 의지할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감입니다.

*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는 주님

호세아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말에 '괴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밑을 받쳐 안정하게 하다"라는 뜻이지만 "유난히 귀엽게 사랑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우인 임자헌 선생이 <명銘, 사물에 새긴 선비들의 마음>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명銘이란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삶을 함께한 물건을 노래한 글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15세기 사람 어세겸(1430-1500)이 쓴 걸상에 대한 명銘이 있습니다. "몸이 기대는 곳/너는 고이 받들라/기울지도 비스듬하지도 말아/내가 올라앉게 하라". 임 선생은 해설을 통해 "걸상의 주 임무는 사람이 편안히 앉을 수 있도록 사람을 괴어 받쳐 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묻고 대답합니다.

"'괴다'에 왜 사랑한다는 뜻이 있는 것일까? 무언가를 괴어 주는 것은 그 대상을 내가 품어 편안하고 안정감 있게 자리할 수 있도록 받쳐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괴어 주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나의 공간을 내놓는 행위이다."(임자헌, <명銘, 사물에 새긴 선비의 마음>, 한국고전번역원, 2017년 12월 20일, p.25)

이 글을 읽다가 문득 우리를 괴어 받쳐주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상처 입은 새처럼 연약한 이들을 품어 안으시고, 그들을 괴어 받쳐주시는 그 사랑,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우리들, 때로 불의에 눈 감기도 하고 불의에 가담하기도 하는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호6:3)

이 단호하고도 확고한 사랑 덕분에 우리는 삽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호세아는 그분의 오심을 '여명'에 빗대고, 쏟아지는 가을비와 땅을 적시는 봄비에 빗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 삶에 오고 계십니다. 오시는 그분에게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 또한 누군가를 괴어 주고, 누군가를 위해 우리의 공간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안팎으로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의의 시대가 가고 힘의 시대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폭력과 사기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자꾸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날 때 불의의 어둠도 물러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낙심하지 말고 정의의 씨앗을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십시오. 변함없는 사랑으로 이 냉랭한 세상에 봄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되십시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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