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구주와 함께 죽었으니

장윤재 목사(이화대학교회)

- 에스겔 36:24-28, 갈라디아서 2:19-21, 마가복음 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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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Jesu Juva. 우리 인생의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길든 짧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끝이 있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더없이 소중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감옥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느리게 가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은 감옥 안에서의 시간입니다. 갑갑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는 감옥 안에서 재소자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있는데, 영화를 보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영화보다도 다 지나간 옛날 영화를 틀어주기 일쑤여서 불만이 많다고 합니다. 옛날 영화에서는 세월이 많이 흘러간 것을 표현할 때 이런 방법을 씁니다. 우선 꽃이 가득 피어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눈이 내리면서 꽃이 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두 번쯤 반복한 후에 '십 년 후'라는 자막이 뜹니다. 이를 때 재소자들 대부분이 한숨을 내쉰다고 합니다. '아, 내 징역살이도 저 영화 속의 시간처럼 휙 지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밖에 나가서 맛있는 사제음식도 사먹고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일은 그 다음입니다. 한숨을 내쉬는 재소자들에게 교도관이 장남삼아 이렇게 물어본답니다. '저 영화처럼 내일 아침이 십년 후가 되면 좋겠어요? 그럼 금방 나갈 수 있잖아.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지. 지금 당신 나이가 서른다섯이니까 내일 아침에 마흔다섯이 되어 출소하는 거요. 그래도 괜찮겠지?' 괜찮은 제안 같습니다만, 이렇게 물으면 열에 아홉은 얼른 대답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글쎄요... 생각을 좀 해봐야 하겠는데요...' 여러분, 감옥 안에서의 십년은 행복한 세월이 아닙니다. 비좁고 불편하고, 춥고 배고픈 십년입니다. 어딜 가지도, 누굴 만나지도 못하는 철창 안에 갇힌 십년입니다. 그런데도 재소자들은 그런 십년을 선뜻 버리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세월만 죽이는 감옥 안에서의 시간도 아까와 선뜻 버리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내 인생입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는 그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우리의 하루하루가 값지고 소중한 것이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100년을 산다고 가정해 보니까, 우리는 잠자는데 평균 30년, 먹는데 9년, 노는 데 10년, 옷 입고 머리 빗고 치장하는 데 7년, 전화 거는 데 2년 (여자 분의 경우에는 5년), 담배 태우는 데 5년, 누워 있는 데 5년, 다른 사람 기다리는 데 6년, 신발 끈을 묶는 데 1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30년이 채 안 된다고 합니다. 요즘 운전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자동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고려하면 실제 일하거나 잠자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가 100년을 산다고 해도 땀을 흘리며 값지고 의미 있게 가꿀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그 짧은 인생의 시간을 값지고 소중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감옥을 방문해봅니다. 요즘에는 사형이 확정되어도 쉽게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게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한국도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의 한국은 아주 달랐습니다. 그러던 시절 사형수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교도관들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대법원의 최종심에서 사형이 확정되기 이전과 그 이후 사형수들의 삶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합니다. 아무리 악독한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사형이 확정되기 전에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으니까 마구 악을 쓰고 소란을 피웁니다. 그러다가도, 판사의 입에서 '사형!'이라는 최종판결이 떨어지면 대개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고 기운이 쭉 빠져 몇날 며칠 동안 꿈쩍도 안 한다고 합니다. 완전히 죽은 사람 모습이라고 합니다. 며칠이 지나면 그는 지금까지와 전혀 딴판의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다는 게 너무도 분명해진 다음에 어떤 사형수들은 자기 몫의 식사를 거의 자기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대신 감방에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쥐들이나 벌레들의 먹이로 주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눈에만 뜨이면 밟아죽이던 짐승이나 곤충들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어미와 같이 보살피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슬슬 피하던 쥐들도 마침내는 밥을 먹여주는 사형수들의 무릎에 앉기도 하고 심지어 어깨에 올라타 앉기도 한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이제 내가 살아날 가망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진 바로 그 다음부터 사형수들의 삶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나는 죽는다,' 아니 '이미 나는 죽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던 일부 흉악범들의 삶이 바퀴벌레나 쥐와 같이 이른바 '하찮은 미물'도 소중히 돌보는 삶으로 180도 바뀌어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이 미래의 어느 순간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실이 되었을 때, 일부 사형수들은 비로소 자기 생명의 소중함과 나아가 모든 생명의 소중함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서신의 2장 15절에서 21절까지의 핵심은 20절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국의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가 같이 번역한 공동번역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를 다음과 같이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메시지는 초대교회가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아니라 '나도'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이것은 교리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물론 여기서 내가 '죽었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어떤 것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내가 죽은 것, 곧 관계가 끊어진 것이 율법과 옛 자아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을 지배하던 율법과 옛 사람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단순히 나의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갱신되었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나'라는 자아가 '그리스도'로 대체되었다는 말입니다. 겉모양은 여전히 나지만 속사람은 그리스도로 교체되었다는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습니다. 니콜라스 케이지와 존 트라볼타가 주연한 '페이스 오프'(Face Off)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 악당이 첨단 성형의술을 이용해 한 경찰관의 얼굴피부를 뜯어 자기 얼굴에 붙이고 자기 얼굴피부는 그 경찰관의 얼굴에 붙입니다. 이게 의학적으로 가능한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지만, 하여간 이 악당은 이후 자유롭게 활보하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대신 이미 수배 중이던 악당의 얼굴을 뒤집어 쓴 그 경찰관은 도리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겉 얼굴을 바꾸는 정도의 'Face Off'가 아니라 속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곳, 곧 마음과 영혼의 중심을 그리스도로 완전히 교체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짧은 구절 안에서 세 번째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번역은 바울의 원뜻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글성경은 모두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 내 밖에 있습니다. 하지만 King James Version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I live by faith of the Son of God).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속사람은 그리스도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은 자신 안에 들어와 옛 사람을 밀어내고 그의 주인으로 사시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곧 자신의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내 밖에 계시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속사람이 되어버리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 분'에 대한' 믿음이 아닌, 그분'의' 믿음이 곧 나의 믿음이 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분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심오한 그리스도 신비주의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신비주의란 신과 하나가 되는 극치의 경험입니다. 어느 찬송가의 가사처럼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나와 그리스도의 합일(合一)의 경험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 이것은 교리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 이것은 소중한 신앙고백입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신념(belief)에 불과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Jesus died for me!" - 이것은 소중한 고백이지만, 골고다 언덕 위에 달린 것은 예수님일 뿐 여전히 나는 그를 멀찍이서 바라만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나의 의지와, 나의 계획과, 나의 자만과, 나의 명예와, 나의 지위와, 내가 가진 것이 나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앞에 감사와 감격의 눈물은 흘리지만 내 삶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잘 믿지만 그를 닮아 살지는 못합니다. 매년 고난주일과 부활주일이 올 때마다 우리는 골고다 언덕 위를 바라보며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감사하지만 우리의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안의 옛 자아가 여전히 나를 지배합니다. '오직 믿음'을 강조한 루터의 종교개혁 500년 동안 개신교회가 계속해서 겪은 어려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신앙(faith)이란 어떤 것에 대한 완벽한 자기 동일시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 나의 속사람이 그리스도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곧 나의 믿음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으려 해도 닮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어찌 내 삶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향기가 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정 죽음을 경험한 자만이 값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한국 감옥의 일부 사형수들 이야기처럼 '이제 나는 죽는다' 아니 '나는 이미 죽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들도 바퀴벌레나 쥐와 같은 소위 미물들의 생명을 귀히 돌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내 앞의 현실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생명의 소중함과 다른 생명의 거룩함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우리 몸의 생명의 원리를 알고 계시는 분들에게는 하나도 새로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세포의 죽음과 대체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며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매분마다 우리의 몸에서는 약 30억 개의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위 안벽 세포는 매 5일마다 완전히 새로 바뀝니다. 우리의 간은 두 달마다, 우리의 피부세포는 6주마다 완전히 새 것으로 대체됩니다. 우리 몸 전 세포 속에 있는 핵의 98%는 일 년에 한 번씩 완전히 새것으로 바뀝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기본원리가 이처럼 매순간 죽고-사는 이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죽기 때문에 사는 원리입니다. 수많은 세포들이 죽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세포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한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래 전 미국의 한 대형호텔에서 큰 화재가 난 적이 있습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2백여 명의 투숙객들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죽기 일보직전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지난 한참 후 당시 구조된 2백여 명을 일일이 추적하여 그들이 이후 어떤 삶을 사는지 조사해보았습니다. 당시 그 대형호텔에 투숙할 정도면 사회적으로 대단한 명망과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이 그 사건 이후 인생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장애인을 돌보거나, 말기 암환자와 지내거나, 거리의 노숙자를 먹이거나, 빈민지역에 들어가 무료진료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화재의 현장, 생지옥과 같은 곳에서 이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죽음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조된 이후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기에 비로소 환한 생명의 가치와 고귀함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토록 자기중심적이던 삶이 고통 받는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으로 대변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식을 거행합니다. 세례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물에 담그다' 혹은 '적시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밥티스마'에서 파생된 말로, 과거의 죄스러운 생활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새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의 종류로는 물속에 몸을 완전히 담그는 침례, 이마에 물을 붓는 세례, 그리고 물을 뿌리는 살수 등이 있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냅니다. 급진적 종교개혁가들은 유아세례를 폐지하고 성인세례만 인정하면서 수세자들의 진실한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우리는 우리가 결단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한다는 믿음에서, 아기들에게도 세례를 베풉니다.

구약시대에는 맑은 물을 뿌려서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기는 정결예식이 있었습니다(에스겔 36:24-28). 하지만 신약시대에 이르러 세례요한은 광야에 나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세례를 베풉니다. 단순한 정결예식으로가 아니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마가복음 1:1-4). 그가 광야에 나가, 즉 성전 제의 밖에서, 그리고 물로, 즉 돈이 들어가는 희생제물 없이 무료로, 나아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갈망하며 그 길을 예비하는 대림절 기간에 세례를 베푸는 것도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거라고 했습니다(마가복음 1:8). 그 성령의 세례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세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바울의 신비한 신앙고백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만이 부활의 새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세례는 바로 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하나 되는 가장 복된 신앙의 경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진실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곧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곧 우리가 어떻게 죽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점입니다. 아침 해가 곧 서산에 지듯이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너무도 아쉽고, 너무도 소중하며, 너무도 아까운 기회가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게 아깝고, 그렇게 소중하며, 그렇게 아쉬운 찰나가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에게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할 기회도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의를 위해 헌신할 기회도 많지 않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종말'을 살기 바랍니다. "오늘이 나의 인생의 최후의 날인 동시에 최초의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엄숙한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며, 숙연한 눈으로 가족과 친지와 이웃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좋은 딸과 아들로, 좋은 아내와 남편으로, 사람 향내 나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이웃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의 사랑이 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중하고 엄숙한 생명을 아름답게 사무치게 빛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Soli Deo Gloria! (2017.12.17.)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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