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서광선 서평] "진리 독점"과 "진리 나눔" 사이에서

정재현, 『종교신학 강의: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 (비아, 2017)

글/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민중신학)

한 교회 청년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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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지난 24일 성공회 주교좌성당 프란시스홀에서 열린 신간 '종교신학'(비아) 북콘서트에서 저자 정재현 교수(연세대 연합신대학원)가 개괄적으로 책 소개를 하고 있다.

정재현 교수의 근간인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반갑게 환영하면서 즐겁게 정독하였다. 그러면서 최근 어떤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신학강좌에서 한 청년이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나요?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나요?"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서 이런 질문은 생뚱 맞는 것 같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에 대해서 한 말이 있던가? 종교개혁의 아젠다(agenda)에 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 가령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 개혁이 들어 있었던가?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종교개혁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했다는 것은 잘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심하게 말하면 좀 "무례한" 질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발제자 가운데 한분인 신학자가 뱉은 말은 더욱 엉뚱하고 "무례"하기까지 했다. "그런 질문은 성경을 읽어 보면 다 나온다. 성경만 열심히 읽으면 된다"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런 한국교회의 분위기에서 "다종교(多宗敎)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을 자세하고 친절하게 가르치는 이 책은 너무도 적절하고 필요한 책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이 서평은 보통 말하는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서평이라기보다는 일독을 권하는 "독서 추천"의 글이다.

기독교 배타주의와 제국주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2세대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 집안의 아들로 신앙생활을 해 오고, 목사 아버지의 목사직을 "세습"한 신학자로서 내 자신이 걸어 온 신학적 "길"을 돌이켜 보았다. 나는 일제시대에 소년기를 보냈다. 일본 정부가 강요한 신사 참배를 거부한 목사 아버지는 종교적으로 철저한 "배타주의자"였다. 기독교 아니면 다른 어떤 종교도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고 반(反) 기독교이고 우상숭배라고 "멸시"했다. 이러한 배타주의는 일제하 신사참배를 반대한 기독교 목사들이 모두 가지고 있었던 입장이었다. 그리고 종교적 배타주의 못지않게 항일 민족주의라고 하는 정치적 배타주의도 있었다. "모태신앙(母胎信仰)," 즉,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태어 난, 그리고 목사 집안에서 자라난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유일한 종교이고, 나아가서 참 종교라는 확고한 종교교육을 받았다. 기독교만이 종교였다. 불교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불교는 학교 소풍 갈 때 산속에 있는 절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번은 시골 동네에서 하는 굿판에 친구들과 함께 가서 구경했는데, 좀 무섭기도 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무당 굿 구경 갔었다는 것이 목사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아버지의 노여움과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왜 목사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 당시에는 이해를 못하고 아버지의 폭력에 반발만 했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데 다니고 구경만 해도 안 돼. 알았어?" 그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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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정재현 교수의 책을 보면, 이런 우리 목사 아버지의 태도가 바로 기독교인들의 "배타주의"라고 설명한다. 나는 사실 우리 아버지의 태도를 배타주의라기보다는 철저한 "의리(義理)" 정도로 해석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종교를 기웃거리거나,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기 종교에 대한 의리를 버리는 것이고 배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종교를 "배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종교에 더 충성하고 의리를 지키고 배신하지 말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모태신앙에 충실하고 예수님에게 의리를 지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끄고, 배울 생각도 안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재현 교수의 책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기독교에 대한 신앙과 충성은 그렇게 간단하거나 의리를 지키는 "미덕(美德)"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독교만이 최고고, 기독교만이 진리이고,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고, 나아가서 기독교식으로 사는 것만이 참되고 옳은 삶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종교는 미신 아니면 없어져야 하는 종교들이다," 이런 태도와 가르침이 바로 배타주의라는 것이다. 배타주의는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거짓이고 미신이며 동시에 없어져야 하는 종교라고 본다. 그리고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외치면서, 다른 종교는 "배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멸시와 억압과 경멸과 함께 없어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종교적 독선에다가 독재와 학살을 정당화하게 된다.

기독교의 역사를 봐도, 로마 제국에서는 기독교 역시 "타종교"였기에 멸시와 탄압과 학살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와서는 로마 교황들이 중동의 이슬람 이교도들을 정복하고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2세기 동안이나 이슬람 "이교도(異敎徒)들을 학살하였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도 1784년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예수의 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은 "배타주의" 정책으로 천주교인들을 색출해서 학살한 무서운 역사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 와서는 기독교인들이 불교 사찰에 몰려가 땅을 밟으면서 귀신 물러가라고 외치며 난동을 부린 일도 있었다. 종교 배타주의는 기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배타주의는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이름으로 인종적 배타주의가 있고, 문화의 이름으로 나와 다른 문화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문화적" 배타주의가 있다. 독일 나치 히틀러의 종교적 배타주의는 유태인 학살이라고 있는 인종적, 정치적 배타주의로 집약이 된 사례라 할 것이다. 최근에는 이슬람 테러리즘에 온 세계가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종교적 배타주의가 군사적 폭력으로, 그리고 나아가서 정치적 폭력으로 돌변해버린 셈이다. 종교가 무서운 폭력으로 둔갑한 사실을 과거의 역사에서 뿐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서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와 다르기 때문에 틀린 종교"라고 한단다. 여기서 "다름"은 "틀림"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배타주의의 입장이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만이 참 종교, 옳은 종교이다"라는 입장이다. "다른 것"이 반드시 "틀린 것"만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옳고 참"이라는 말도 성립이 된다. 정재현 교수의 말로 하면, 특수성이 보편성이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이 영어로 "different"만이 아니라 동시에 "exceptional," 즉, 예외적이고 뛰어난 것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의 특이성이 우수성, 우월성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배타주의는 다른 종교를 열등한 것으로, 동시에 틀린 것이고 오류이고 거짓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자기는 예외적이고 다른 종교와 다르기 때문에, 자기만 옳다고 하는 우월성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서구 기독교 선교는 우월성의 편견을 품고서 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에 그리고 비서구 나라들에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쳐들어갔다. 기독교를 모르는 미개한 야만의 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문명국가로 개화될 수 있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기독교 제국주의는 군함과 대포로 쳐들어 와서는, 서구 문명과 교육과 의료선교를 통해서 기독교의 우수성과 "자비"를 선전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타종교 배타주의는 서구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

포괄주의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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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지난 24일 성공회 주교좌성당 프란시스홀에서 열린 신간 '종교신학'(비아) 북콘서트에서 저자 정재현 교수(연세대 연합신대학원)가 개괄적으로 책 소개를 하고 있다.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야 비로소 아시아의 종교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목사 아버지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그의 종교적 배타주의와 미국을 숭배할 정도로 개신교 기독교를 미국의 종교로 찬양하는데 대한 회의가 생기면서 아시아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가르치는 아시아 종교들, 힌두교, 불교, 그리고 유교와 도교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름대로의 종교적 깨달음을 소개하고 종교적 경전을 읽게 하면서 이런 저런 아시아 종교들을 기독교와 "비교"하는 "비교종교학"이라는 과목의 공부였다. 그러면서 아시아 비기독교 종교들에도 나름대로의 진리와 배울 만한 특이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결론으로 가서는 다른 아시아 종교에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좋은 것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종교들도 나름대로의 무엇이 있지만, 기독교만큼은 못하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기독교가 우수하고 앞섰고 개명하다는 입장이었다.

다른 아시아 종교들을 종교라는 범주에 "포괄"시켜주지만(include), 넣어 주지만, 기독교만은 못하다는 우월성과 특수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포괄주의는 기독교와는 다르지만,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포용성과 너그러움, 혹은 좀 못하지만 종교로 봐 준다는 태도의 "관용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관용적 배타주의"라고나 할까? 정재현 교수는 그래서 포괄주의가 배타주의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다른 종교들은 결국 "미완(未完)"의 기독교라는 것이다. 모두 기독교적 진리를 포함하고 있지만, 기독교만 못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 "포괄주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포괄주의의 한 특이한 예로 카알 라너 신부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정재현 교수는 그의 강의에서 포괄주의의 하나로 소개한다.

간단히 말해서 "불교" 역시 기독교의 진리를 담고 있지만, 이름만 기독교라는 이름을 쓰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 역시 "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배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내 뼈저린 경험을 소개해 보겠다. 40여 년 전, 이화여대에서 신학을 강의하고 있을 때, 학생들이 주최한 종교 강연에서 당시 동국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치고 있던 서 모 교수를 초청하여, 그 교수와 나를 발제강사로 하고 대담한 일이 있었다. 내가 기독교의 중요한 요점, 즉, 예수의 가르침과 삶,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를 하고, 불교학 교수의 불교 이야기를 들었다. 불교학 교수의 명 강의를 듣고 나는 감동을 받고, 그 서 교수의 강의에 찬사를 보냈다. "여기 불교를 가르치는 서 교수님은 나보다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보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고도 기독교인보다 훌륭한 기독교인입니다. 가톨릭 신부인 카알 라너 교수는 이런 불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옆에 서 있던 불교학자 서 교수는 나를 가리키면서 하는 말, "아닙니다. 여러분, 여기 서 있는 이 기독교 신학자 서 교수야 말로, '익명의 불교인'입니다." 학생들은 손뼉을 치고 책상을 두들기고 발을 구르며 불교학 교수의 말에 찬사를 보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 자리에서 나의 대담자인 불교학자에게 사죄했다. 나의 기독교 우월주의를 그렇게 부끄러움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냈던가? 기독교의 우월주의를 드러내며 지적, 종교적 오만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을 자책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어엿한 불교학자를 기독교인이라고 기독교를 그에게 뒤집어 씌웠을까 싶었다. "당신이야 말로 익명의 불교도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어야 하는데, 나를 불교인으로 보는 것 같은 것에 대해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을 생각하면, 그 불교학자에게 칭찬으로 한 "익명의 기독교인"이란 말이 얼마나 모욕적이었을까 생각하면 40년이 지난 오늘, 이 글을 쓰면서도 부끄러운 것을 감출 수가 없다. 내가 "익명의 불교인"이라는 말이 듣기 좋지 않으면, 불교도가 "당신은 익명의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을까 생각하면, 이런 말은 적절치 않다는 것을 통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재현 교수의 말이 맞다. 포괄주의는 배타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런 깨달음을 가지게 된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종교다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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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혜암신학연구소 제공)
▲『종교신학』 서평을 쓴 서광선 박사(우)와 저자 정재현 교수(좌). 위 사진은 2017년 5월, 서울 안암동에 위치한 혜암신학연구소(소장 이장식 박사)에서 만남을 가지던 모습. 서광선 박사는 한국에서 철학적 신학을 연구한 1세대 신학자이고, 정재현 박사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종교철학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30여 년 전에 서울에 있는 유서 깊은 감리교 신학대학의 변선환 총장이 종교다원주의자라는 이유로 한국식 "종교재판"을 받고, 총장직도 뺐기고, 교수직과 목사직에서도 물러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개명천국 20세기 말 한국에서 일어 난 일이었다. 변 박사가 한 말이 많지만, 문맥과 상황을 제쳐 놓고 그가 한 말 한마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이 말이 문제가 되어서 종교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에도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고, 기독교 아닌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천당에 간다는 뜻이었다. 기독교만 예외적인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만 진리를 독점하거나 기독교가 가장 우월한 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고 진리를 담보하지 않는 거짓 종교가 아니라 옳고 참된 것이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종교불가지론(不可知論)도 아니고 회의주의도 아니고 종교상대주의도 아닌 것이, 종교마다의 절대성과 특이성과 참된 것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기독교인들에게만 배타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나름대로의 배타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정재현 교수의 강의에 소개되는 배타주의나 포괄주의는 모두 다 서구 신학자들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한 말들이고 그 입장에서 다른 종교들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질문들에 대해서 한 말들이다. 정교수가 지적한대로 동양을 업신여기고 미개한 문명으로 보는 서구의 시각, 에드워드 사이드가 한 말대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숨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다가 비서구 기독교인들은 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오염되어 스스로의 토착종교를 무시하고 서구 기독교의 우월성을 맹신하게 된 문화식민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나의 친구 불교학자가 내가 한 말, "당신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말을 고맙고 달갑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배타주의나 포괄주의의 입장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종교다원주의자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종교적 진리의 다원성을 명확하게 선포한 것이었다.

정재현 교수가 소개하는 종교다원주의자 인도 태생의 레이문도 파니카 교수는 다종교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로 "우상타파"를 강력히 권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배타주의는 우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가 가장 뛰어나고 가장 독특하고 가장 우월하다는 생각, 즉, 종교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고집하고 있는 종교, 즉, 기독교만이 옳고 다른 종교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틀렸다, 그러니까 배울 것도 없고, 그들과 대화할 필요도 없다는 "종교적 오만, 지적 오만, 윤리적 오만, 영적 오만"은 바로 종교우상주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우상을 타파하는데서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다른 종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나 자신이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회개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재현 교수의 말을 빌리면, "'종교 간 대화'로 표현되는 '다름'과의 만남을 결국 우상 파괴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자에게 무엇을 베풀거나 그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윤리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자기'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자기동일성의 속박에서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 그러므로 우상 파괴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우리의 믿음이 참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고도 불가피한 과제입니다," 259-260).

그 이유를 정재현 교수는 종교적 인간론으로 결론내린다. "종교적 인간은 이미 다종교적 인간입니다. 당연하지만 종교적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무종교인도 나름의 신념들이 뒤얽힌 결과이니 다종교적 인간입니다. 다종교적이다 보니 종교적이기도 하고 무종교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다종교성은 인간의 꼴이고 얼입니다. 하나의 이름으로 덮는다고 그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다름이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사회뿐 아니라 개인이 이미 다종교적입니다"(269).

"나는 그리스도인이지만, 동시에 익명의 불교인이고 익명의 무당이고, 익명의 유교도이다"라는 말이 이치가 통한다고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종교 상황에서 선택해야 할 길이고 삶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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